제 5장, 1995년 7월 7일 금요일, 7:16 A.M. 8년 3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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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1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 1974년

케이펠은 1980년, 짧은 기간 병을 앓다가 사망

서문

1974년 3월 20일, ‘리뷰 오브 더 뉴스[The Review of the News]’지에 실린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의 글, “키신저의 범죄[The Kissinger Caper]”에는, 공산 국가의 정보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전직 장군이, 키신저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기 이전부터 소련 간첩이었음을 밝히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기사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십 만 부도 넘는 부수가 재발간, 배포되기도 했다. 수 천 장도 넘는 편지들이 상하원 의원들에게, 그리고 다른 정부 관료들에게 날아 들었다. [하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변화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클린턴은 로즈 장학금[Rhodes scholarship]을 받고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 갈 때부터 이미 KGB에 연계되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반역자들의 둥지[the nest of traitors]’는 대단히 큽니다. 친구들이여.]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이 편지들에 대한 답장에는 헨리 키신저가 세번에 걸친 신원 조사를 받았으며--1961년, 1969년 그리고 1973년--, 이에 따른 보안성 검토 결과, 적합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답장들은 국무부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답장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보안 적합성 판정은 국무부가 내린 것으로, 국무부는 FBI가 전 분야에 걸친 면밀한 조사로 키신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내용까지 담긴 정보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상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앨저 히스[Alger Hiss],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 존 애브트[John Abt], 버지니우스 프랭크 코우[Virginius Frank Coe], 로렌스 더건[Laurence Duggan], 찰스 크래머[Charles Kramer], 그 밖에도 무수한 인물들이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자 소련 간첩단의 멤버들이었음이 밝혀졌고, 이들 역시도 FBI의 조사를 받았지만, 모두 보안 적합성 판정을 받았었다는 것이다.

국무부 장관이 소련 간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앨저 히스[Alger Hiss]의 사례를 기억해 본다면, 그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Soosevelt] 대통령의 최고 참모이자, UN을 설립한 주요 입안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도 최고위급 국가 정보기관 관리들이나 정부 참모들이 소련 간첩인 것으로 밝혀진 사례들이 많이 있다. ‘상원 국내 보안 분야 분과 위원회[The Senate Internal Security Subcommittee]’는 (양당 공동으로) 장시간에 걸친 조사와 많은 목격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정부 부처내 연계된 국가 전복 세력[Interlocking Subversion in Government Department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 때 당시(1953년) 사실이었던 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사실인 채로 남아 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보고서 인용]

소비에트 국제 조직은 미국 정부 내에 성공적으로, 그리고 대단히 심각한 수준으로 침투해 왔으며, 이러한 침투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하자르계 유태인들의 미 정부 침투사’ 참조--역주) 이러한 침투는 우리 정부내 최하위 계급에서부터 최고 정책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다. 이렇게 침투한 간첩들은 자신들의 소련 지휘권자들에 의해 하달되는 분명한 계획에 따라 지금껏 움직여 왔다.

침투의 일반적인 패턴은 처음에는 경제 부흥과 관련된 기관들에 잠입해 들어 오고, 이어서 전쟁 수행 업무 관련 기관들, 다음에는 외교정책과 전후 재건 프로그램 등을 관리하는 기관들로 이어지는데, 항상 국가 핵심 업무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정부에 침투해 들어 온 공산주의자들은 막후에서 움직인다.--리서치 업무를 가이드하거나, 미국 정책의 바탕이 되는 메모랜덤을 준비하거나, 내각 관료들의 연설문을 작성하거나, 의회 조사에 영향을 미치거나, 법안의 초안을 만들거나, 행정기구 재정비에 관여하거나 하는 방식이다.--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소비에트 상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수 천 개도 넘는 미국의 외교, 정치, 군사, 과학, 경제 관련 기밀들이 우리 정부 안에 침투해 있는 이들 소련 간첩들, 그리고 이들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빼돌려져 왔다.

연방 조사국(FBI)[the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과 여타 정보 기관들이 정부 내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들을 제공해 왔지만, 의회 위원회가 이들의 음모와 관련된 사실들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정 부처들도 이들 소련 첩자들이 정부내 요직으로 승진해 올라 가는 것을 거의 차단하지 못해 왔다. 행정 부처 내의 막강한 그룹들과 개인들은 정부내 소련 간첩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들을 철저히 방해하고 약화시켜 온 것이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주요 직위에 대한 지명이나, 전보, 승진 등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공산당 소속이 아님을 맹세하는 선서를 되풀이하곤 하지만, 이러한 거짓 맹세와 관련하여, 사실상 단 한 차례도, 그 누구도 처벌된 사례가 없다...

소련의 음모를 획책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과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우리 정부 내에서 유효하며, 이는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고 있는 중이다.

[보고서 인용의 끝]

헨리 A. 키신저는 거의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자(언터쳐블)[an Untouchable]’처럼 보인다. 키신저의 정책과 프로그램들은 항상 국가 안위를 희생시키고, 미국의 국고를 털어서 국제 공산주의 음모를 강화시켜 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과 선출직 공직자들은 감히 그에 대해 비판하기를 주저한다. 오히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 앨저 히스[Alger Hiss] 또한 그가 소련에 비밀 문건들을 넘긴 것과 관련한 위증죄로 체포되기 직전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었다. 그를 보호해 주고, 그를 대신하여 증언해 준 사람들 가운데는 국무부 장관, 대법관, 기타 정부 최고위급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히스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길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의 훌륭한 인품과 충성심, 애국심을 증언해 주곤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앨저 히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로, 오늘날도 여전히 수 백 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동유럽의 공산주의 경찰 국가에 살고 있다.

헨리 A. 키신저는 소련,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보다 강화시켜 주기 위해 그들이 수 십 억 달러에 이르는 외국 자본을 유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으며, 또한 그의 노력으로 인해 한 때 자유주의 국가들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겉보기에는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공산주의 정부들을 구성하게 되었다.

미국당[the American Party](1969년 설립된 군소정당으로 미국독립당으로부터 유래했으며 2008년 해체--역주) 대표 톰 앤더슨[Tom Anderson]은 “키신저의 범죄”라는 기사의 복사본을 상하원 의원 모두와 9000개에 이르는 신문사에 발송한 적이 있다. 그러나 헨리 키신저의 영향력과 그를 둘러싼 보호세력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주요 언론 매체들은 모조리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이 나오게 되었다.

나를 단지 액설런시(우월자)[Excellency]로 부르게”

오늘날 전 세계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인물인 헨리 A.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출발할 때부터 꼭대기에서 출발했으며, 더더욱 높이 올라만 갔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마자 그는 키신저를 외교 정책에 있어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참모로 선택했으며, 그 공식 직함은 국가 안보 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er]이었다. 사실 1968년 선거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국 국민들은 키신저를 정부 핵심 인사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의 상대 후보였던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도 얼마 후,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헨리 키신저를 똑 같은 자리에 앉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도대체 누구인가? 과연 이 자가 누구이길래, 미국에서도 세계에서도 이런 중량급 인사가 된단 말인가? 이 자가 도대체 어떤 자격을 가졌길래, 대통령 선거에 나온 양당 후보 모두가 그에게 국가 운영을 맡기려 했단 말인가? “총명함”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중요한 “커넥션”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비밀 공산주의 요원으로서, 모스크바로부터 하달되는 명령과 통제에 따라 보호를 받으며, 이러한 비호 아래 큰 고난 없이도, 또 신분이 발각되지 않고도 권력직에 올라, 세계 정복이라는 플랜을 수행해 나가기 때문인가? 어쩌면 지금 거론한 세가지 모두 다일 것이다.

키신저가 ‘닉슨 행정부’에 올라 타, 전 세계에 걸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할 무렵, 그는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미국 국민들 앞에 숨기려고 했다. 당시 키신저는 외교 관계 위원회에서 발간하는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지에 곧 실리게 될 글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키신저는 잡지 편집팀을 통해 이 글을 빼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고의 일부를 변경시키려는 것도 불발로 끝났다. 키신저의 글은 정확히 처음 쓴 그대로 실렸고, 이내 키신저는 자신의 “탁월함”에 대해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키신저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영리한 인물이었다.

키신저의 “중요한 커넥션”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록펠러 가문[the Rockefellers]이었다.(‘시오니스트, 볼셰비키 그리고 록펠러 카르텔’ 참조--역주) 닉슨 대통령의 최고 참모가 되기 전 10년 동안, 키신저는 이미 넬슨 A. 록펠러[Nelson A. Rockefeller] 뉴욕 주지사의 외교 정책 최고 참모였으며, 록펠러는 닉슨에게 “키신저를 열광적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키신저는 정치적으로 록펠러 사람이었다. 그는 1964년과 196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록펠러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길 기대하며 참석했고, 록펠러의 조력자 역할을 했었다. 학창 시절 키신저는 이미 자신이 세운 정치 이론에 대한 호평으로 록펠러 장학금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가 록펠러 재단[the Rockefeller Brothers Fund]에 소속되어 “오늘날의 미국이 직면한 도전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개념 개발”이라는 특별 연구 프로젝트(1955-57년)의 총 책임자로 근무했던 시절, 그는 1955년과 1956년에 개최된 컨퍼런스에서 록펠러 가문의 사적인 이익을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반공산주의자로, 공산 폴란드 정보기관에 잠입해 들어가 장군에 준하는 직위에까지 올랐던 한 인물은 오늘날 헨리 키신저를 소련 간첩으로 지목하고 있다. 키신저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 파병된 미 육군 중사로 근무하던 시절, ODRA라 불리는 특별 그룹의 일원으로 포섭되었던 것이다. 이 장군이 입수한 정보는 철저한 검증을 거친 결과, 모두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KGB(소련 정보기관)와 GRU(소련 군 정보기관) 소속 요원들과 무관들의 명단을 밝히고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그들 가운데 고든 론스데일[Gordon Lonsdale]이라는 가명을 썼던 콜론 몰로디[Kolon Molody] 소련 대령은 휘하에 네 명의 요원들인 헨리 호그턴[Henry Houghton], 에텔 지[Ethel Gee], 피터[Peter], 그리고 코헨[Cohen]이라는 가명을 썼던 헬렌 크로저[Helen Kroger]를 데리고 영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호그턴을 통해, 영국 해군 정보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KGB 요원 존 바살[John Vassal]도 정체가 밝혀졌다.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의 경우는 런던에 있는 MI6와 연계된 최고위급 영국 정보기관 간부로 활동하던 간첩이었다.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그는 비버[Bieber]라는 가명을 썼던 이스라엘 비어 대령[Col. Israel Beer]의 사례를 폭로했는데, 비어는 이스라엘 정부의 군사 참모로 활동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경우는 슈티그 에릭 베너스트롬 대령[Colonel Stig Eric Wennerstrom]의 사례가 있는데, 그는 실제로도 KGB 소속 장군이었다. 같은 정보 소스를 통해 밝혀진 다른 사례들로는, 서독 정보기관에서 활동했던 하인츠 펠페[Heinz Felfe], 한스 클레멘스[Hans Clemens], 푸어만[Fuhrmann], 그 밖에도 다수의 인물들이 KGB의 명령을 수행 중이던 간첩들로 밝혀졌다. [하톤: 아직도 O.J. 심슨 사건에 “음모”가 개입된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덴마크의 경우는 블레킨베르그[Blekinberg], 프랑스에서는 비톤스키[Bitonski]의 사례가 밝혀졌다. KGB와 GRU의 네트워크는 자유 세계의 여러 곳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있었으며, 이들은 단지 발각된 것에 그치지 않고,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선고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이 인물이 제공한 정보와 관련하여 지금껏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키신저에 관한 정보는 1961년과 1962년 중앙정보국(CIA)에도 넘겨졌지만, 이 무렵 그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던 하버드 대학 교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1973년, 그는 새롭게 영국 정보 기관과 미국 정보 기관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닉슨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 발탁된 이상, 더는 키신저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끔찍하게 중요한 정보를 건네도 미국의 공식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이 장군은 키신저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대중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통제받는 언론과 통신 매체들은(‘미국 언론 통제사’ 참조--역주) 키신저의 실체에 대해서 어떠한 공개적 코멘트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독립 언론 매체들만이 키신저를 소련 간첩으로 거명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의 행동들’에만 입각해서 같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장군의 키신저에 대한 폭로와 거의 정확히 같은 시점에 발생했던 일은 키신저와 낸시 매긴스[Nancy Maginnes] 양의 결혼식(키신저는 1949년 앤 플라이셔[Ann Fleischer]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가졌으나 1964년 이혼하고, 1974년 낸시 키신저와 재혼--역주)이었는데, 당시 매긴스는 결혼 식장 안으로 들어가라는 사인이 있기 전 얼마 동안 짐을 모두 꾸린 채, ‘특별한 상황’에 대비해서 대기하고 있기도 했다. 매긴스 양은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보호받던 또 한 명의 인물이었다.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에서 짧은 허니문을 보낸 후, 키신저 부부는 중동으로 떠났으며 그 곳에서 한 달 이상을 체류했다. 그러는 동안 키신저는 ‘평화 계획’을 만들어 냈는데, 이 계획안은 반대 캠프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수용되었다.

오늘날 키신저의 공식 직위는 미 국무장관이지만, 그의 활동 범위는 이를 훨씬 넘어 선다. 어떻게 국무장관 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을 때, 그는 “단지 나를 액설런시(우월자)로 불러 주시오[Just call me Excellecy]”라고만 대답했다. 키신저는 자신이 준비하고 또 조성해 가고 있는 세계 정부의 수반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배후의 있는 인물인 넬슨 록펠러가 그러한 최고의 영예를 갖도록 한 발 물러 설 것인가? [하톤: 자 우리 모두는 록펠러 형제들에게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그렇지 않습니까? 헨리 키신저에게도 똑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넬슨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는 모두 1979년 사망했으며, 헨리 키신저만 복제됨. ‘시오니스트, 볼셰비키, 록펠러 카르텔’, ‘미국 언론 통제사’ 참조, 복제인간과 관련해서는 ‘로보토이드 & 씬테틱’ 참조--역주) 그렇지만 이는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책이 쓰여진 1974년 당시 “공개적”으로 알려진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록펠러파나 키신저파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그렇지만, 당신들은 그들 중 누군가를 보더라도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볼 것입니다.]

세계 정부의 구성은 뉴욕에 있는 미국 유태 위원회[the American Jewish Committee]의 공식 간행물인 ‘코멘터리[Commentary]’지에서 예견했던 일로, 1958년, 이 잡지는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 “UN 세계 정부는, 법적 손질을 거친 후, 실질적으로 미국과 소련이 공조해서 움직이는 세계 정부로 변모하게 된다.” “데탕트”를 통해 냉전을 종식시키려는 닉슨-키신저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금, 미국과 소련 간에는 동맹 관계 형성이라는 큰 그림이 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산을 막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 천 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해외 원조와 군사 지원에 써 왔다. 한국전과 베트남전, 두 전쟁은 공산주의를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수 만 명의 미국인들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미국 납세자들에게 수 십 억 달러의 부담을 지웠다. 반면, 소련은 북한과 북베트남에 대해 주로 비행기, 총, 탱크와 같은 군수 물품을 지원해 주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게 되면서 ‘긴장 완화’를 명분으로 한, 동맹 관계 형성에 드는 비용을 다시 우리가 대고 있는 중이다.

키신저는 1974년 3월 25일 모스크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의 최대 목표는 다가오는 3년 안에, 양국 국민들간--그리고 양국 지도자들간--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발전된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미국내 데탕트에 대한 장애물들과 반대 여론이 높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는 “우리는 이런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나갈 것을 서약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가 외부로 공개된 키신저의 6번째 소련 방문이었으며, 당시 그는 소련 최고 관료들을 만났다. 이 때 발표된 공동 선언문은 미소 양국이 함께 서명한 합의에 기초한 몇 가지 큰 틀에 따라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취지의 것으로, 양국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무역, 경제, 과학, 기술 분야에 있어서 사기업체와 같은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하톤: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이러한 일들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 봐 왔습니다!]

끝없이 증대해 가기만 하는 소련과의 교역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the world Communist movement]’을 보다 강화시켜 주고 있으며, 이는 닉슨-키신저 행정부의 공동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미국은 심각한 에너지 부족으로 자원 확보에 몰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돕는데 힘을 쏟아 왔으며, 미국 정유 업체들은 수 십 억 달러어치에 달하는 석유를 소련에 수출할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상원 재무위원회에 출석했을 당시, 키신저 국무장관은 닉슨 행정부의 대외 정책은 서구 세계와의 관계 보다는 소련을 돕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인 것이다. 헨리 키신저가 전용 비행기를 타고, 소련, 공산 중국과 중동, 그리고 공산주의 위성 국가들을 상대로 자신만의 사적인 외교를 수행해 나가고 있는 동안, 협상의 자세한 내용들은 미국 국민들에게 비밀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 의회에 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크네세트[Knesset]의 의원인 가드 야코비[Gad Yaccobi]는 하버드 대학 국제 세미나를 계기로 헨리 키신저의 문하생으로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1967년 그는 키신저의 강의 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 중에는 미국과 중국, 베트남, 러시아 그리고 중동과의 관계에 있어서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키신저는 마치 마스터 플랜[master plan]에 따라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자면, 키신저는 공산주의 국가 수반들과 협약을 맺고 약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백악관이나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동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또 한가지 밝혀진 사실은 중동에서 협상을 진행할 때, 키신저는 미국과 소련 정부를 동시에 대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키신저가 이집트의 수도를 방문해서 이집트 대통령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불과 몇 시간 후에, 미국은 이집트와의 외교 관계를 복원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정보 소스에 따르자면, 미 해군 소속 부대(해군 장성이 지휘하는)가 수에즈 운하의 기뢰를 제거하고, 미 정부가 수에즈 운하를 통한 선박 운항 재개를 도울 목적으로 약 2천 5백만 달러를 지원한다는 발표는 그보다 조금 뒤에 이루어졌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자면, 헨리 키신저는 정부보다 앞서서 소련과 곡물 계약(일반적으로 “곡물 대강탈[great grain robbery]”로 알려져 있다.)을 체결했는데, 이로 인해 미국 국내시장의 밀가격은 세 배로 뛰었을 뿐만 아니라, 사료용 곡물의 심각한 부족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따른 연쇄반응으로, 육류 가격은 물론 다른 많은 유제품들의 가격도 수직 상승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각 가정으로부터 수 백 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추가로 거둬들여진 셈이었다.
pp.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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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1995년 7월 12일 수요일, 7:12 A.M. 8년 3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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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3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

(Part 2 이후로 이어지는 장에서는 키신저의 전 생애를 연대순으로 구체적으로 재고찰하며, Part 3에서는 하버드 대학 교수 시절부터 닉슨 행정부에 발탁될 시기까지의 행적을 서술--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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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록펠러” 파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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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키신저는 점차 베트남 “전문가”가 되어 갔으며, 국무부에 소속된 자신의 친구를 통해 존슨 행정부[the Johnson Administration]에게 “생각해 볼만한 언질들”을 던져 주곤 했다. 백악관은 키신저가 보유한 다양한 인적 관계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들 가운데는 장 생트니[Jean Sainteny](1907-1978, 프랑스 정치인, 2차 대전 직후 베트남을 관할하는 프랑스 총독으로 근무--역주)의 아내인 클로드[Claude]도 있었는데, 그녀는 한 때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생트니는 호치민[Ho Chi Minh]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로는 레이몽 오브락[Raymond Aubrac]과 에르베르 마르코비치[Herbert Marcovich]도 있었다. 폴 스콧[Paul Scott]은 1969년 11월 12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 언론 매체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힌 적이 있었다. : “베트남전과 관련된 일급 비밀 가운데 하나는, 키신저가 북 베트남과의 비밀 회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명의 미스터리한 프랑스 사람들이 키신저와 북 베트남간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들은 레이몽 오브락과 에르베르 마르코비치 교수로 모두 당시 호주 특파원으로 와 있던 윌프레드 버쳇[Wilfred Burchett]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버쳇은 소련과 중국이 종종 고급 정보를 구하거나 외교 작전을 펼칠 때 활용한 인물이기도 했다.”(버쳇은 KGB 요원으로 밝혀졌다.--저자주)

오브락은 UN 식량 농업기구[U.N.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의 이사로 근무하는 동안 호치민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구였으며, 파리 대학 교수였던 마르코비치를 통해 1967년 하버드 교수로 재직중이던 키신저를 소개받기도 했다. 키신저와 마르코비치는 친소련 백만장자였던 사이러스 이튼[Cyrus Eaton]이 조직한 푸그워시[Pugwash] 회의를 통해 일찍이 만난 적이 있었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이전에, 키신저는 닉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 “나는 결코 그 자를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자는 재앙이오.” 헨리 키신저는 닉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첫 지명한 인사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최고 참모로 발탁되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키신저가 이 “재앙”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이것은 일반 대중들만 모르는 그들만의 별개의 이야기였다. (닉슨과 키신저는 록펠러 카르텔내의 양대 파벌을 형성. 참고로 조지 부시 시니어는 닉슨 밑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나중에 키신저 휘하로 옮겨간 인물--역주) [하톤: 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지명은 키신저의 부상과 닉슨의 추락을 향해 나아가는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은 국가를 위해서 잘 된 일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 반대였습니다.--키신저가 바로 “딥 스로트[DEEP THROAT]”(워터게이트 사건의 단서를 제공한 고발자의 암호명--역주)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역자가 대통령을 위해, 그리고 당신들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여전히 이 쓰레기 조각에 불과한 로보토이드(헨리 키신저, ‘로보토이드 & 씬테틱’ 참조--역주)에게 우롱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했을 때,--키신저는 이미 키신저 협회[Kissinger Associates] 소속의 친구 하나(옐친)를 모스크바에 두고 있었고, 이 친구에게 “몰락”한 고르바초프[Mr. Gorvachev]가 보유했던 대통령 지위가 건네졌던 것입니다. (소련의 붕괴는 키신저와 부시(시니어)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이에 동조하며 신세계질서를 지향했던 소련내 공모자들이 꾸며낸 속임수, ‘1991년 8월, 가짜 쿠데타와 반쿠데타’ 참조--역주)] 백악관 최고 참모진들 가운데, 헬드먼[Haldeman]과 에어리히먼[Ehrlichman]은 키신저에 적대적이었지만, 키신저는 이들을 제압했다. 키신저는 자신의 유태계 백그라운드를 축소, 은폐했으며, 자신에게 호의적인 언론들을 키워냈다. 결국 이상한 음모가 헬드먼과 에어리히먼을 몰락시켰으며, 키신저의 지위와 권위는 보다 더 높아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키신저에 적대적이었던 자들이 키신저를 제거하기 한 발 앞서, 키신저가 먼저 자신의 적들을 제거했으며, 키신저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라는 백악관에 대한 압력은 높아져만 갔다. 결국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헨리 키신저에 앞서 국무장관을 수행한 인물--역주) 또한 제거되었으며, 키신저는 명분도 살리고, 게임에서도 승리했다.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키신저가 아랍-이스라엘간의 충돌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국방부와도 국무부와도, 다른 어떤 부처와도 미리 논의할 틈이 없었으며, 심지어 대통령과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이미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pp.63-64



제 8장, 1995년 7월 13일 목요일, 7:12 A.M. 8년 331일

......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4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

제 1쇄: 1974년

[인용]

진짜 재앙

하버드 크림슨[Harvard Crimson]지의 편집자인 데이비드 란다우[David Landau]는 1971년 7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 “키신저는 정부내 자신이 보유한 지위를 자신의 더 큰 야망과 목표를 숨기기 위한 ‘보호용 망토’처럼 사용했다. 대통령 최측근에서, 그는 닉슨의 의사 결정 과정 상의 객관적인 중재자처럼 행동하며, 대통령 외교정책의 중요한 형성자이자 지지자가 되어 갔다. 그는 관료 조직들을 단순히 편안한 의지처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행정 각 부처들이 쓸데없는 프로젝트들과 연구들에 매달리도록, 일종의 함정에 밀어 넣어 옳아 맨 다음, 영리하게 각 부처들로부터 참모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권한들을 빼내 자신의 사무실로 옮겨 갔다.” 란다우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도 주목했는데, 키신저는 대통령의 비밀 참모라는 점을 내세워, 의회 청문회에 제출된 기록물과 관련한 증언을 요청 받았을 때는, 자신이 ‘공무상의 특권’을 보유했음을 주장하며, 성공적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과거 키신저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한 인사는 노엘 E. 파멘텔 주니어[Noel E. Parmentel, Jr.](정치담당 언론인--역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 “그는(키신저는) 우리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네. 그는 당신의 안전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고(가할 것이며), 당신의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다네. 대학시절 마리화나 피운 걸 트집잡을 수도 있고, 어떻게든 당신을 따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네. 그는 모든 부서 안에 자신의 스파이들을 보유하고 있네. 한마디로, ‘공포의 부처[Ministry of Fear]’를 운영하고 있는 격이지. 모든 전화는 다 도청되며, 그는 엄청난 기록물들을 보유하고 있다네.”

키신저는 국가 안보 참모로 지명된 후, 자신의 휘하에 두는 보좌관들, 컨설턴트들, 사무직원들의 수를 엄청나게 늘렸으며, 그들 중 다수는 모호한 배경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 가운데 두 명이 국가 정보 기관의 보안성 검토 결과, 부적합한 인물들로 밝혀져 직접 해고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전직 FBI 고위 관료가 밝힌 바에 따르자면, 키신저가 개인적으로 지명한 사람들 가운데는 심각한 보안상의 결함을 가진 자들이 무수히도 많았으며, 대부분 스파이 활동이나 비밀 정보 누설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부내 최고 직위에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갖다 앉혔다.

예를 들어, 국무장관이 된 키신저는 미국 SALT(전략무기제한협정) 협상팀내 정책정보 수집 담당으로 보리스 클로슨[Boris Klosson]을 발탁했는데, 이 자는 이미 정보 기관들 사이에서는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키신저의 ‘나쁜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클로슨이 안보 위해 인물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기록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일례들이 있었다. 한 소련의 여자 첩자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구류된 적이 있는데, 그녀가 접촉선을 적어 둔 노트에는 클로슨의 현 주소가 쓰여 있기도 했다. 클로슨이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무렵, 그는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KGB가 모종의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과 관련한 첩보 보고서가 미국에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기도 했다. 클로슨은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이후에도, 자신의 책임 아래, 그가 소련에서 미국으로 되돌아 가는 일을 허락해 주었다. 클로슨은 오스왈드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다는 내용의 허구의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심지어 오스왈드가 공산주의자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되돌아 가는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왈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다. [하톤: 우리는 이 책을 “재발행”하는 과정에서, 논쟁이 되는 내용에 대해 일일이 참견할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헨리 키신저와, 또 저자가 이 책을 쓸 무렵, “활용가능했던” 정보들일 뿐이라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한 폭로와 진술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서술이 제시될 때 마다, 그 때 그 때 당신이 따라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각각의 주제들을 다룰 때 마다 매번 잘못된 부분들을 정정하고 업데이트를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케네디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들’ 참조--역주)]

칠레의 막시스트 대통령, 아옌데[Allende]가 축출되고 난 후, 키신저가 칠레 주재 미국 대사로 지명한 사람은 데이비드 포퍼[David Popper]였는데, 그는 앨저 히스[Alger Hiss]의 추천으로 국무부에 들어왔던 자로, 히스와 함께, 아메라시아 매거진[Amerasia magazine]과 커넥션을 가졌던, 긴 명단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 간첩들과 밀접히 연계된 인물이었다.(아메라시아 매거진은 1940년대 간행된 극동 문제를 다루는 학술 잡지였으나, 편집 및 출판과 관련된 인물들 대부분이 소련 요원들로 구성. 1945년 6월, FBI가 잡지사 사무실을 급습하여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정부 비밀 문건들을 압수했으나, 수사 과정에서 FBI의 영장없는 도감청, 그리고 정부 비밀 문건들이 소련에 전달되었다는 증거 부족 등이 문제가 되어 소수의 인물들만 벌금형에 처해지고 마무리됨--역주) 아메라시아 사건에 관한 조사에서 1700여건이 넘는 비밀 문건들과 기밀 서류들이 다양한 정부 부처들을 통해 빼돌려졌음이 밝혀졌다. 포퍼는 한 변절자를 통해 소련 정보기관 요원으로 거명되었으며, 공산주의 잡지인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지의 편집자이자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던, 작고한 루이스 부덴츠[Louis Budenz]를 통해서도 역시 공산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키신저는 대만 주재 미국 대사로는 레오나드 운저[Leonard Unger]를 지명했는데, 그는 태국의 반-공산주의 정부 전복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운저는 공산주의 및 정부전복적 성격의 ‘워싱턴 서점 협회[Washington Bookshop Association]’ 회원으로, 협회로부터 급여를 받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으며, 또한 이 협회 사무실은 비밀 공산당 모임이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장소였다. 정보 기관들에 따르자면, 운저는 지난 25년 이상, 국무부내 한 그룹과 함께, 소련의 통제를 받아 오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키신저는 미 외교업무 감찰관으로는 스스로 동성연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자를 지명했는데, 이 역시 키신저가 백악관에서 근무해 온 이래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보안 당국의 견해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정보 기관에서는 키신저에게 제임스 서터린[James Sutterlin]은 잠재적인 안보 위해 인물이며, 그러한 자를 그처럼 민감한 직위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정부 보안 당국의 최고위급 관리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키신저는 말 그대로 수 백 명에 이르는 동성연애자들과 안보 위해 인물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짓는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이미 국무부 및 국무부와 연계된 각종 기관들에서 근무하는 최고위직 관료들 사이에는 동성연애자들 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공식 보고서에 따르자면 서터린은 독일에서 근무하는 동안 추문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내용은 몇몇 국가의 정보 기관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보고서에서 서터린은 에드워드 캘리[Edward Kelly]라는 인물과 동성애 관계를 가졌으며, 에드워드는 이 후 바르샤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보안 담당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있었던 몇 가지 일들에 대한 결과로 (서터린과의 추문을 덮을 수 있는 명분으로) 국무부로부터 사직을 강요받게 되었다. 새롭게 지명된 외교업무 감찰관(서터린)과 전직 보안 담당관이었던 에드워드 캘리와의 동성애 사건은 군 정보 장교의 보고를 통해 워싱턴 당국에도 알려졌다. 한편, 에드워드 캘리는 바르샤바에 체류하는 동안 폴란드 공산당원이면서 정보 기관 요원이었던 남성과도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바르샤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졌던 이 “섹스와 스파이 스캔들”의 전모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외교 및 비밀 코드 북이 복사되어 넘겨졌으며, 일부 외교관들은 포섭되기도 했다. 미국 외교관들 가운데는 자유롭게 활동하는 소련 간첩들도 있었으며, 대사관에 근무하던 많은 공관원들은 잘 훈련된 여성 공산주의 요원들에 의해 포섭되었다. 이 모든 일들은 캘리가 대사관 보안 담당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발생했다. 워싱턴 정보 소식통에 따르자면, 국무부내에는 최고위급 성도착자들을 폭로와 징계로부터 보호해 주는 비밀 협정이 존재한다고 한다.

키신저는 국무부 난민업무 담당 관리로 루이스 아놀드 위스너[Louis Arnold Wiesner]를 지명했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는 처사로, 이들을 망명자 내지는 난민으로 간주하여 미국에 손쉽게 입국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정보 기관 보고서에 따르자면 위스너는 이미 심각한 안보 위해 인물로 간주되었던 자로,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신 대중들[New Masses]’, 그리고 ‘청년 노동자[Young Worker]’와 같은 공산주의 출판물의 열렬한 구독자이기도 했다. 그는 공산당 회합에 참석하기도 했고, 대학시절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정부전복적 성격을 띠었던 ‘미국 학생 동맹[American Student Union]’의 회원이었으며, 학내 ‘공산주의 청년 연맹 총회[Young Communist League chapter]’ 창설을 시도한 이력도 있었다.

국무부 장관 키신저는 미국 소유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신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자신이 “실질적인 진전”이라 부르는 일들을 추진해 왔다. 그는 파나마 운하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반환하는 협상을 담당하는 미국측 특사[Ambassador-At-Large]이자 자신의 조력자로 엘스워스 벙커[Ellsworth Bunker]를 선정했다. ‘국가 안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벙커는 또 하나의 안보 위해 인물이었다. 그는 ‘미소간 문화 관계 협회[the American Russian Institute for Cultural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의 단순 회원이 아니라 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미 검찰총장 뿐만 아니라 ‘상원 국내 안보 분과 위원회[the Senate Internal Security Subcommittee]’는 이 조직을 공산주의 기구이자 정부전복적 성격의 기관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미 ‘외교관계 협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오랜 회원인 벙커는 ‘외교 정책 협회[the Foreign Policy Association]’의 명예 의장이자, ‘급진 세계 문제 협회[the radical Council on world Affairs]’의 회원이며, ‘(막시스트) 신 사회 연구 학파[(Marxist)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이사이기도 했다. 남 베트남 매각 계획 수립시에도 지원 역할을 했던 벙커는 파나마 외교 장관인 후안 안토니오 탁[Juan Antonio Tack]과 예비 협정을 체결했다. 키신저는 미국이 530 평방 마일에 이르는 파나마 운하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내용의, 친-공산주의 파나마 정부의 요구에 비밀리에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 소식통에 따르자면, 신 협약에는 1903년 체결한 조약에 나와 있는 “영구적으로”라는 표현은 삭제될 예정이라고 한다. (최종적으로 1977년 체결된 신 파나마 운하 조약에 따라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부로 파나마 운하 소유권을 파나마에 반환. 당초 1903년 1차 조약 체결 당시 미국은 파나마 운하 부지를 영구적으로 양도받고 운하건설권을 취득하여 1914년 완공, 운영--역주) 키신저와 벙커는 1903년 조약을 폐기하고 신 조약을 체결하는 일에 동의했다. 신 조약에서는 운하 지역내 미국의 형사 및 민사 재판관할권도 포기하게 되고, 파나마 정부에 대한 연간 지불액도 증가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미국의 주권이 종료될 예정이다.

키신저의 또 다른 타겟은 그간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이 되어온 나라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쿠바였다.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는 지금까지 단계별로 진행되어 왔다. 멕시코 레플리카[Replica]지 보도에 따르면, 지난 여름 키신저는 마치 영화 스타가 고향을 방문하듯이 쿠바를 방문해 (키신저는 비밀 방문의 전문가이다.) 카스트로를 만났다고 한다. 잡지에 따르자면 키신저는 멕시코를 방문할 때마다 쿠바를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그의 쿠바 방문은, “닉슨 대통령의 참모로서의 방문이자, 다른 주요 인사들을 대동했던 방문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없는 사소한 방문’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잡지에 따르자면, 키신저는 북미나 세계 여러 지역의 관광객들처럼 멕시코 항구 도시 아카풀코[Acapulco]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지만, 이 항구 도시를 이렇게 자주 드나드는 것은 그러한 목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잡지 기사는 키신저가 이 곳 항구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며칠씩 머문 후 비밀스레 빠져나가는 일에 대해 변명을 늘어 놓고 있으나, 그 실질적인 목적은 1972년 수차에 걸쳐 피델 카스트로 루즈[Fidel Castro Ruz]와 면담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키신저는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이는 정확히 말해서 더 이상 비밀도 아닌 것이다.

키신저의 그러한 ‘비밀 방문들’은 그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modus operandi]의 일부였다. 1972년 2월, 그는 12회에 걸쳐 프랑스를 비밀리에 방문했는데, 베트남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영예로운 평화”를 위한 예비 조약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키신저는 군용기를 이용하고, 자주 비행기를 갈아 탔으며, CIA의 은신처(안전 거점)에 머무르며, 공산주의자들을 만나고 협상했으며, 때로는 그들이 선택한 비밀 장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수많은 우회 외교를 통해 종국적인 “평화”가 도출되었지만, 잘 알려진 군부내 인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미국이 북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에게 비밀 보상을 약속했던 일로서 사실상의 패배로 간주되었다. 3년 반에 걸친 협상은 1972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무렵에, “전쟁 승리”라는 소식과 함께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키신저의 유명한 “평화가 가까웠다”라는 언급은 선거를 불과 12일 앞둔 시점에서 행해졌다. ‘외교 정책[Foreign Policy]’지 1974년 여름호에 테드 슐크[Tad Szulc]가 쓴 기사에 따르면, 키신저의 보좌관들 가운데 몇몇 인물들의 언급에 따르자면, 키신저는 “닉슨에게 신속한 평화를 안기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자면, “한편으로, 키신저는 선거 이후 닉슨이 외교 상황 전체의 새판짜기를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듯 했으며, 닉슨의 타고난 성향상, 재선된 이후에 강경 자세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려했다”고 한다.

그렇듯 평화는 닉슨과 키신저에게 딱 알맞은 시기에 찾아 왔지만, 실은 보다 빨라질 수도 있었다. 이라 E. 맥밀리언[Ira E. McMillian] 해군 소장은 1970년 8월, 헨리 키신저와 함께 닉슨 대통령을 예방하고,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올 계획안을 제시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 계획에 흥미를 보였지만, 1972년 10월, 그러니까 차기 대선 이전에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맥밀리언 소장은 충격을 받았다. 그 때 이후로, 그는 다양한 접촉선을 통해, 자신의 평화 계획안을 밀고 나갔지만 허사였다. 결국 절망감 속에 그는, “대통령이 1972년 10월 재선 캠페인의 시기와 연계시켜 추진하지 않는 한, 평화 계획안을 지원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대외에 알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가운데, 키신저의 명령으로 맥밀리언 소장은 1972년 3월 17일 워싱턴의 한 거리에서 납치되었으며, 강제로 베데스다[Bethesda] 해군 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는 어떠한 혐의도 없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곳에 한 달 동안 갇혀 있었으며, 납치에 관한 아무런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장은 분명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는데,,, “평화는 오직 닉슨 행정부와 키신저의 ‘글로벌 플랜’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만 오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키신저가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한가지로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은 (공산) 중국의 “개방”이었다. 그러나 키신저의 그런 ‘환상적인 일처리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친구들인 공산주의자들은 소위 말하는 이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을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키신저는 당시 중국내에 임박한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으며,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해 이 사실을 중국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보기관 소속의 요원은 공산 중국에 대한 군사 쿠데타가 준비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택동[Mao Tse-tung]과 주은래[Chou En-lai]에 대한 암살 계획이 진행 중임을 알아냈다. 이 첩보는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에게 넘겨졌으며, 헬름스는 서둘러 텔아비브를 방문하여, 구체 사항들을 파악한 후 관련 사실들을 헨리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에게 알렸다. 키신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편으로 중국으로 날아갔으며, 그 결과, 중국 군부 최고위층의 일정 그룹을 형성하던 주요 인물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그러나 공산 중국 내에서 관련 뉴스들은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이후 키신저는 닉슨의 유명한 중국 방문 계획을 짰으며, 뒤따르는 일들은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했다. 1973년 12월까지 키신저는 공산 중국을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만) 6차례 방문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자 친구들에게 장래 미국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중국과의 친교 관계는 미국 외교 정책에 있어서 확고 불변의 사항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소련과의 “데탕트[detente]”와 마찬가지로, 키신저는 이러한 대중 우호관계를 향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데탕트”라는 미명아래,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교역상의 이득뿐만 아니라 기술, 원조 자금 등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이들 국가들은 공산주의 체제아래 탄압받던 대중에 의한 폭동의 위협들을 겨우 모면했다. 곡물 대강탈”[the great “Grain Robbery”]을 통해 소련은 미국의 곡물들을 거저나 다름 없는 가격으로 가져 갔다. 그 대신 미국 국민들의 곳간은 비어 갔으며, 곡물과 관련된 모든 가격들은 치솟기만 했다. 많은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업에 러시가 있었는데, [하톤 : 잘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건 1974년 이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비용은 모두 미국 정부로부터 보장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국민의 세금을 통한 것이었다. 미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낮은 저리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장기 융자를 제공해 주었는데, 역시나 미국 납세자들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업을 통해 이득을 올린 사람들 가운데는 헨리 키신저의 친형인 월터[Walter]도 있는데, 그는 이내 백만장자가 되었다. 월터 키신저는 1951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오하이오주 아크론[Akron, Ohio]에 위치한 ‘제너럴 타이어 및 러버[General Tire and Rubber Co.]’사의 해외 영업 담당 부사장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1957년까지 그는 ‘어드밴스 베큠 프로덕트[the Advance Vacuum Products Co.]’사의 사장이었으며, 이후 몇 년 간 그는 또 다른 3개 업체의 CEO가 되었다. 지금 그는 시카고에 있는 알렌 일렉트릭 이키프먼트[Allen Electric Equipment]사의 CEO로, 뉴욕주 롱아일랜드[L.I., N.Y.]에 위치한 샌즈 포인트[Sands Point]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 한편, 그는 서독 기업, 로에 컴파니[Rohe Company]사의 사장이기도 한데, 이 회사는 소련 정부와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 인근에 500개에 달하는 주유소 건설 및 장비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1억 2천 5백만불짜리 계약을 체결했다.

키신저의 외교 정책은 ‘돈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국민들의 돈이자, 당신의 돈). 한 국회의원은 (모스크바에 대한 수출입 은행 융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 “문제는 우리가 키신저에게 그런 자유를 줄만큼 여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키신저가 전쟁으로 엉망이 된 국가들에 자유를 가져왔고, 무질서와 혼돈의 상황에는 ‘기름을 쏟아 부어’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가 쏟아 부은 것은 돈이었으며, 그는 미국이 파산 직전에 이를 때까지, 때때로 파산의 “최후의 가장자리”에 몰릴 때까지 돈을 쏟아 부었다. 존 R. 래릭[John R. Rarick] 상원의원은 ‘우리의 부’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키신저식 “수표장 외교[checkbook diplomacy]”에 대해 토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10월 중동 전쟁을 차단하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미국의 납세자들에게 비용 부담을 지우는 방식으로는, 적어도 ‘고등학교 수학 과목’에서라면 학점을 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키신저가 여기 사용한 돈은 22억불이었습니다. 그 명목은 ‘10월 전쟁 기간 이스라엘을 위한 비상 군사 대출’이었습니다. 다른 지출 내역도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와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한 해외 원조’ 명목으로는 총액 2억 5천만불을 썼습니다. 그중에는 인도양에 있는 디에고 가르시아[Diego Garcia]라고 하는 점만큼 작은 섬에 미국 군사 시설을 짓고 강화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한 2천 9백만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보 지원’ 목적으로 5천만불을 사용했고, ‘군수물자 신용 판매’를 위해서는 3억불을 썼습니다. 키신저 박사를 ‘납세자들의 돈의 초특급 사용자[a big-time spender with taxpayers’ money]’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요르단 원조’에 2천 5십만불을 쓴 것도 주목할만 합니다. 명백한 군사 원조 선물로 1억불을 썼고, 3천만불은 군사 자금 융자에, 7천 7백 5십만불은 경제 지원에 썼습니다. ‘중동 슬러시 펀드[Middle East Slush Fund]’라는 명목으로는 1억불을 썼습니다.--국무부는 이를 ‘특수 요청 자금[Special Requirements Fund]’이라 부르기를 선호합니다. 이것은 키신저 박사의 ‘다양한 데탕트 목적 자금[miscellaneous dentente kitty]’으로서, UN 평화유지군 운영을 돕거나, 난민 원조, 기타 여러가지 개발 프로젝트 지원용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밑줄을 긋고 총액을 한 번 계산해 봅시다. 내 산수가 틀리지 않았다면, 미 재무부로부터 중동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알려진 것만 해도 31억 3천 6백만불에 달합니다. 닉슨 대통령은 회계년도 1975년 해외 원조 예산으로 51억 8천만불을 책정하고 의회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키신저 박사가 사용하게 될 이 돈이, 국제사회 협력 및 미국의 리더십 유지를 위한 것으로, 미국이 책임있고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 위한 최소 금액이라고 주장합니다.”
pp.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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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1995년 7월 15일 토요일, 7:20 A.M. 8년 33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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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5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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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넨펠트 사건[The Sonnenfeldt Case]

키신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업무와 관련한 조력자들 및 자신의 스탭을 구성할 때, 국무부로 팔을 뻗어, 대외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인물들을 끌어다 썼다. 국무부내 ‘소련 및 공산 세력 연구 및 분석 사무실’ 책임자로 있던 헬무트 소넨펠트[Helmut Sonnenfeldt]는 키신저의 최고 보좌관이 되어, 키신저가 공산주의자들과 비밀 협상을 하고 비밀 협정을 체결하며 전 세계를 돌아 다닐 때, 함께 동행했다. 소넨펠트와 키신저는 모두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도망나온 피난민들로, 그들 간의 친교관계는 2차 세계 대전 중 미 육군의 일원으로 독일에 파병되었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또 다른 독일 망명자 출신이었던 프리츠 크래머[Fritz Kraemer]가 이끄는 부대에 소속되었으며, 둘다 독일 군인 및 민간인 포로들을 신문하는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키신저와 마찬가지로 소넨펠트도 독일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대학 교육을 이수했다.

헬무트 소넨펠트는 1926년 9월 13일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생--역주) 1945년까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었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학사-1950년, 석사-1951년). 이후 국무부에 들어갔던 소넨펠트는, 미국 국민을 통제하는 ‘장막 너머의 관료제[behind-the-scenes bureaucracy]’를 구성하는 일원이 되어, 중요하면서도 보호받는 멤버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갔다. 그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오직 “장막 너머”에 있지 않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에만 그러했다. 닉슨 대통령이 키신저를 국무부 장관에 지명하여 그에게 백악관 최고 참모 시절 보다 더 많은 권력을 안겨 주었을 때, 소넨펠트를 재무부에 기용하여 쓰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소넨펠트를 재무부 차관[Under Secretary of the Treasury]으로 임명하기 위해서는 상원 인준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전에 소넨펠트의 배경과 경력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검토 결과, 소넨펠트는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비밀 정보를 빼돌려 외국 세력 아래에 있던 스파이에게 넘겨준 것과 관련하여 FBI로부터 엄격한 조사를 받은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소넨펠트가 빼돌린 기밀은 국무부 ‘정보 및 조사국’이 원 출처였으며, 당시 워싱턴에 나와 있던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스파이들의 세계에서, 누군가가 비밀 정보나 문건을 입수하여 다른 정보기관에 넘겨주게 되면, 그 자는 이 다른 정보기관 소속 요원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헬무트 소넨펠트는 명백히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첩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첩자인 것이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자면, FBI는 소넨펠트 사건을 엄중한 스파이 사례로 보았고, 기소를 위해 법무부로 사건을 넘겼다. 당시 법무부 장관(검찰총장)은 닉슨 정부 아래 제 1대 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였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국무부 고위 관료들과 로저스는 소넨펠트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미국의 비밀을 입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당황과 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며, 이에 따라 결국 불기소 처리되었던 것이다. 소넨펠트는 결국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를 유지했으며, 제 1급 외무관[Foreign Service Officer Grade 1]이라는 최고위직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제 1급 외무관이라는 직위는 대개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특정 임무의 장이나 대사로서 지명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소넨펠트는 양쪽 가운데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직위에 올랐던 것이다. 소넨펠트가 제 1급 외무관에 지명되었을 때, 스트롬 터몬드[Strom Thurmond] 상원의원은 소넨펠트가 1947년 12월 이래로 국무부에서 근무하긴 했으나 결코 외교관 생활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소넨펠트가 재무부 차관에 지명된 후, 여러 명의 전직 외무 관료들은 이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1973년 5월 15일 열린 상원 재무 위원회, 인준 청문회에 출석하여 지명 반대 증언을 하기도 했다.
p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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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넨펠트가 수차에 걸쳐 위증한 인준 청문회에서 행해졌던 이러한 (외무 관료들의) 증언의 결과로, 결국 닉슨 대통령은 그의 지명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소넨펠트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 키신저는 그를 국무부 참모직에 고용했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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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관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지만, 헨리 키신저는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았으며, 외교 정책에 관해서는 닉슨 대통령의 권고(명령)를 받았다. 키신저와 밀접한 관계였던 소넨펠트는 키신저가 모스크바와 북경의 공산주의자 리더들과 사적인 협상들을 진행할 때 다뤄졌던 모든 일급 비밀들을 공유했다. 소넨펠트는 키신저의 해외 방문시마다 동행했으며, 닉슨 행정부가 소련, 중국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데탕트 정책(지원, 교역, 재정 정책)을 펼칠 때, 늘 그 선두에 서서 이 문제들을 다루었다. 헨리 키신저와 헬무트 소넨펠트간의 우정과 협력 관계는 27년도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의 음모를 강화시키는 계획을 짜고 관련 프로그램들을 운영해 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소련, 공산 중국, 그리고 동유럽 위성국들내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협상 파트너들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미국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의회에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 협상들을 맺을 때에도 역시 그러했다. 이미 잘 알려진 헬무트 소넨펠트의 스파이법 위반 사건, 이에 대한 헨리 키신저의 비호, 그리고 이들이 법무부, FBI, 국무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그리고 백악관을 상대로 각종 조작을 펼쳐 왔음을 고려해 볼 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소넨펠트-키신저 관계은 분명코 워터게이트 사건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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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저널 제 144권 (미간행 저널), 제 5, 7, 8, 10장, pp.44-49, 63-71, 81-86에서 발췌



제 2장, 1995년 7월 19일 수요일, 12:25 P.M. 8년 337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9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1974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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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국제 공산주의 음모’가 단일 (공산주의) 세계 달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초창기, 무력과 폭력을 통해 미국 지배를 기도한다는 내용의 청사진은 미국 공산당 국가 의장이었던 윌리엄 Z. 포스터[William Z. Foster]가 1932년 쓴 ‘미국의 소비에트화를 향해[Toward a Soviet America]’라는 책에 나와 있었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지도부는 ‘바깥에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 대신, ‘안으로부터 승리를 달성해 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트로이의 목마’ 전술이 사용되었으며, 이 바뀐 전략에 따라 내부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나갈 것을 주장하는 이 책은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책, ‘미국의 소비에트화를 향해’를 신주 모시듯 했으며, 책에 나오는 자구 하나 하나를 다 실천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외부적인 무력과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 지배에 성공한 사례는 내부 전복을 통한 권력 쟁취의 청사진이 되었다. 이러한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협박, 매수, 기타 갖가지 우회적인 방법들을 통해, 정부내 핵심 인물들이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요원, 또는 공산주의의 통제를 받는 인물들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닉슨 대통령이 앞선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진 이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하게 되자, 그는 재정적으로 완전한 파산 상태에 이르렀으며, 정치 경력도 종말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닉슨이 더 이상 망가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 무렵, 닉슨은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의 초대로 뉴욕으로 갔으며, 록펠러가 소유한 연 10만불짜리 아파트로 이사한 데 이어, 그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 연봉 20만불을 받고 한 로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그가 지게 된 의무는 단지 록펠러 가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일 뿐이었다. 넬슨 록펠러는 1960년 이래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공천받기 위해 노력해 오던 중이었으며, 계속해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4년에는 베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게 밀렸고, 1968년에는 닉슨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그나마 닉슨은 자기 사람이라 결과를 수긍할만 했다. 어쨌거나 록펠러는 이것이 완전한 실패라고 느끼지는 않았으며, 심지어 “세번째 시도만에 자신이 성공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헨리(키신저)가 백악관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록펠러에게 있어서 닉슨은 돈을 주고 고용해야 되는 사람이었던 반면, 키신저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이자, 부하이며, 참모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키신저도 이제는 너무 멀리 나갔고, 키신저 자신의 에고도 너무나 커져 버렸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면, 어쩌면 1976년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인데, 키신저가 과연 록펠러를 위해 길을 비켜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하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동안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독자들이여, 부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록펠러 4형제를 모두 살해했습니다! 넬슨 록펠러는 복제되지 않았습니다.--키신저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단 한 명만이 복제된 채 남겨졌으며, 이 자는 키신저를 위한 서비스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즉, 데이비드 록펠러). 그 무렵, 제 정신이 아닌 엘리트들과 단일 세계를 지향하는 사탄주의자들의 이 당황스러울 만큼 놀라운 배신행위의 유일한 수혜자였던--키신저는 허니문을 보낸다는 “구실 아래” 몇 주 동안 “실종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키신저는 넬슨 록펠러에 대한 추도 연설을 한 다음 비행기를 탔으며, “무언가”와의 정면충돌로 인해 살해되었습니다. 대체할만한 “키신저”를 재생산하고 프로그램화하는 데에 몇 주가 걸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며, 정작 문제가 되었던 건, “과학자들”이 그의 선량한 아내, 낸시 키신저를 결코 원본 그대로 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결코 똑같이 다시 만들어 낼 수 없었고, 그저 늙은 키신저를 위한 쇼윈도 안의 마네킹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데 그쳐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이제쯤 헨리 키신저나 록페러 형제들과 같은 매력적인 정치인들을 가지고 노는, ‘더 위에 있는 권력[a HIGHER POWER]’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얼마간 소름이 끼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제 영혼없는 복제인간들이 그럴 듯 해 보이는 “양심”도 지니지 못한 채,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지켜보는 게 보다 쉬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게 그들이 기능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원천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그들은 인공적으로 제작된 DNA 복제물과 다운로드된 “기억”만을 갖고서 단순히 경험을 겪어 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록펠러의 경력을 살펴보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의 증거들이 넘쳐 난다. 전직 CIA 분석관을 지낸 R. 해리스 스미스[R. Harris Smith]는 당시 CIA 국장이었던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Gen. Walter Bedell Smith](1895-1961, 미 육군 장성, 주소련 미국 대사, 국무부차관, CIA 국장(1950-53) 등 역임--역주)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에게 록펠러가 공산주의자임을 경고했었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1945년 당시 국무부 차관보였던 넬슨 록펠러는 UN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했었다. 그 때, (FBI 국장) J. 에드가 후버는 요원들을 보내 앨저 히스[Alger Hiss] 및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관련한 2건의 FBI 일급 비밀을 록펠러에게 직접 건넸다. 비밀 보고서들은 록펠러가 묵고 있던 호텔을 통해 그에게 직접 전달되었으나, 나중에 록펠러는 자신이 두 건의 보고서 모두를 파기했음을 실토했다. 앨저 히스는 UN 설립을 배후 조종하던 최고 책임자로, 만약 록펠러가 그 때 전달받은 보고서대로 움직였더라면, 히스와 그의 조력자들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만들어졌던 국제 연맹[the League of Nations]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을 UN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록펠러는 UN 창설자들 가운데 한 명이 반역자라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여 UN이 설립되는 것을 저지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UN은, 록펠러 가문이 기증한 뉴욕의 본부 건물에서 여전히 세계 정부가 도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키신저와 닉슨이 공산주의 국가들과 데탕트 시대를 열고 교역 협정을 체결하기 훨씬 이전에, 록펠러는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사업할 목적으로 사이러스 이튼[Cyrus Eaton](1883-1979, 투자가--역주)의 자산을 활용하여 기업체를 만들었었다. 1967년 1월 16일자 뉴욕타임즈는 월 스트리트와 미국 미드웨스트를 잇는 은행 자산가 가문의 연대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1968년 1월 6일자 로이터 통신은 소련 정부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넬슨 록펠러 주지사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록펠러 대통령

넬슨 록펠러는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 일생의 야망이었으며, 이를 위해 록펠러 가문은 수 백만 달러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어쨌거나 닉슨-키신저 행정부가 실시하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통해 록펠러 가문은 자신들의 권고와 이익이 완전히 실행되고 현실화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록키[Rocky](록펠러의 애칭--역주)는 ‘게임’에서 이기는 것 뿐만 아니라 ‘이름’도 갖기를 원했다. 전 세계로 뻗어있는 재정적 이익 기반을 갖췄던 국제주의자 록펠러는, 선거에서 이기든, 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통령이 되기만 된다면, 세계 정부를 향해 나아가는 닉슨 행정부의 행보를 완수하고, 또 이를 위한 필수적 단계인 공산 블록[Red bloc]과의 “데탕트” 정책도 마무리 짓기를 바랬다. 총명하고 이기적이었으며, 넬슨 록펠러를 통한 중요한 커넥션들도 다수 보유했었던 키신저는, 임박한 록펠러의 세계 지배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키신저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워터게이트 사건 배후의 숨은 손이었고, 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록펠러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킬만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언론 매체에 대한 록펠러의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부하, 리처드 닉슨을 구하러 오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개는 넬슨 록펠러에 대한 공개적 지지자들과 비밀 지지자들이 끝없이 언론에 ‘누설하는 것’에 따라 흘러갔다. 이 사건의 시나리오는 결국, 닉슨이 사임하고 포드가 대통령이 되는 한편, 포드는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이었다. 포드는 자신이 197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 밝혔고, 그렇다면 그 자리는 자연스레 록펠러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민주당에서는 맥거번[McGovern]과 같은 자를 후보로 내세우겠지만 그는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전혀 대통령감이 아니었고, 혹은 테디 케네디[Teddy Kennedy](에드워드 M. “테드” 케네디[Edward M. “Ted” Kennedy]--역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채파키딕[Chappaquiddick] 사건(1969년 테드 케네디는 메사추세츠주 채파키딕 섬에서 교통사고를 내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현장을 도주해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역주)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불명예”스러운 일들을 잘 활용하면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을만한 자였다. 결국 넬슨 록펠러와 같은 명망있는 공화당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과거 록펠러가 대선 후보로 나서는 데 가장 큰 난제는 언제나 당내 경선이었다.
pp.16-18



제 3장, 1995년 7월 20일 목요일, 7:09 A.M. 8년 338일

......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소련 간첩, Part 10
by 프랭크 A. 케이펠[Frank A. Capell](1974년)

[인용]

미국을 위한 중요 선택에 관한 국가 위원회
[National Commission on Critical Choices for America]

‘미국을 위한 중요 선택에 관한 국가 위원회’는 넬슨 록펠러의 작품으로 1973년 11월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의 설립 목적은 오늘날의 세계 트렌드가 미국의 미래 안보와 안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 소스에 따르자면, 그 진짜 목적은 넬슨 록펠러를 1976년 대선 후보로 만들기 위해, 그의 이름을 알릴 만한, 국내적, 국제적 포럼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여러가지 사건들의 성격과 방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국제적으로 부상하는 문제들과 각종 세력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한편, 이에 대처할만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미국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을 돕는다”는 취지로 운영되었다. 그렇지만, 넬슨 록펠러는 이미 미국이 미래에 나아가야 할 코스를 그려 놓고 있었으며, 그 코스는 세계 정부를 향하는 것이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국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며, 키신저는 넬슨 록펠러로부터 명령을 하달받는다는 것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 정책은 과거 미국이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행해 온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록펠러-키신저 프로그램에 따라,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소련과 공산 중국에 조달되고 있으며 미국의 기술이 이들 나라에 갖다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소련과 공산 중국 뿐만 아니라 공산 블록을 형성하는 다수의 국가들을 위한, 공장 건설, 기계, 설비, 엔지니어, 기술자 공급 등을 목적으로 미국은 여러가지 협정과 계약에 서명했으며, 그러한 계약들 가운데 다수는 비밀에 부쳐져 있다. 헨리 키신저와 리처드 닉슨에 의해 수행되는 록펠러의 정책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정당화시켰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강화시켜 주었다.

상황을 주시해 온 워싱턴 정계의 한 인물에 따르자면, NCCCA(미국을 위한 중요 선택에 관한 국가 위원회)의 ‘그 어떠한 중요한 선택’도 록펠러 가문이 갖는 파워와 영향력을 공개적으로 밝혀주지는 못할 것이며, 원유 공급 감소와 치솟는 가격으로 세계적 위기를 불러 일으켰던 석유 파동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미국을 집어 삼켰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밝혀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위원회의 위원들은 20세기의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세계가 직면하게 될 주요 문제들에 대한 공청회를 전 미국과 외국에 걸쳐 개최하고, 세계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여러가지 컨퍼런스도 가질 계획에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들과 마찬가지로 이 위원회도, 공청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여러 가지 권고사항들을 제안할 예정이다. 과거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록펠러가 만들었던 위원회도 각종 공청회를 열었으며, 그 결과 건강, 교육 및 복지부가 만들어지고 뒤따라 주택 및 도시개발부가 생겼는데, 두 부처 모두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해 왔다. 넬슨 록펠러는 자신의 생애에 걸친 야망인 대선 승리에 집중하기 위해 뉴욕주 주지사 직을 사임했다. 헨리 키신저가 언론 및 상원과 가졌던 밀월관계가 끝난 것처럼 보였던 시기에, 키신저 역시 사임할 것이고, 록펠러와 같은 목표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1974년 7월 15일자, ‘U.S. 뉴스 &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지의 “워싱턴 소식[Washington Whispers]” 칼럼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 “헨리 키신저가 닉슨 행정부에서 사임하는 일은 국무장관의 측근들에 따르자면 ‘대단히 가능성이 높은 일’로 보인다. 키신저의 ‘내부 조직’ 바깥에 있는 자들도, 그가 사임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전 보스였던 넬슨 록펠러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는 일을 돕기 위해 분주히 활동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왔던 키신저식 일처리는 1974년 봄과 초여름에 이르러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키신저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기자들은 비록 부드러운 방식이긴 했지만, 국무장관이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캐묻는 듯한 질문들을 던졌다. 비굴한 상원은 심지어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지를 공개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 안보에 관한 하원 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Internal Security]’는 키신저가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Salzburg, Austria]에서 가졌던 “사임 위협[Threat to Resign]” 기자회견에서 한 언급들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 “... 국가안전보장회의 참여자 추천 명단에 있던 4명 가운데 3명은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밀어 붙여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두 명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스탭으로 지명되었는데, 안보 참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를 무마해 주었으며, 보안성 검토에 따른 문제점들 역시 내가 직접 말끔히 해소시켜 주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모튼 H. 할퍼린[Morton H. Halperin], 다니엘 데이빗슨[Daniel Davidson], 그리고 헬무트 소넨펠트[Helmut Sonnenfeldt]였다.

헨리 잭슨 상원의원[Sen. Henry Jackson]은 키신저가 1972년 ‘공격용 미사일에 관한 임시 협정’에 대한 의회 비준이 있기 전에 중요 정보를 의회로부터 숨기려고 노력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다룬 보고서를 준비했다. : 키신저는 전략무기제한 협정(SALT I 협정)[Stragegic Arms Limitation Talks(SALT I) accord]의 핵심 내용에 관한 해석과 관련하여 불명확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의회에 알리지 않았다. 이는 협정에 분명히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소련에 더 많은 이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협정에 대한 “명료화” 조항들을 채택하려고 노력했지만, ‘명료화’ 조항의 세번째 단락 자체가 소련에게 유리한 ‘법망을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해 주는 내용이었다. 잭슨 의원의 보고서에 따르자면, 그런 다음, 키신저는 이 명료화 조항의 허점에 대해서는 거의 1년 동안 함구했다. 결국 미 합동참모본부[the Joint Chiefs of Staff] 관계자들과 여타 몇몇 사람들이 나중에 겨우 이 허점을 발견했으며, 이에 따라 키신저는 관련 부분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통에 따르자면, 미국은 이 허점을 손보는 대신에, 소련에 또 다른 양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협정에 최종 서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키신저식 일처리 방식이었으며,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보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키신저는 바보가 아니었으며,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 군부는 키신저를 면밀히 관찰해 왔지만, 나중에 그에 대한 “스파이” 행위를 해 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 군부 관계자들은 키신저를 믿지 않았으며, 그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닉슨 대통령이 1974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동안 키신저는 미 군부와 관련한 몇 가지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국방’을 중요시해 온 국회의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소련 군부 뿐만 아니라, 미 군부를 설득시켜, “양국이 국방력 감축을 통한 이득을 갖도록 해야겠지만, 양쪽 모두에게 있어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이 공식 방문이 있기 직전에 키신저는 별도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키신저는 미 군부와도 연락을 끊고, 현지의 미국 대사관 직원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완전히 “독립적인 섬[incommunicado]”처럼 행동했다. 이 시기, 키신저는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미국 정부의 외교적, 군사적 연락선을 이용하는 대신, 소련 라디오를 통해 암호화된 내용을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에 전달했고, 워싱턴에 나와 있던 소련의 외교관들은 암호 코드를 풀어 재생된 메시지를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의 핵심 측근들에게 전달했다. [하톤: 부디 되돌아 가서 이 부분을 아주 주의깊게 다시 읽어 보시겠습니까?--다시!] 대통령의 군사 참모들은 자신들의 정보 루트를 활용해서, 키신저가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관여하고 교신해 온 내용들에는 전략무기 제한협정, 대 중동 무기 수출, 중국의 국경 분쟁 등 군사 관련 사항들이 들어 있음을 알아 냈다. 그렇지만, 미 합참 본부는 키신저의 협상, 계획, 그리고 전달 메시지 등과 관련하여 완전히 깜깜 무소식인 채로만 있었다.--모두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항들이었으며, 모두 소련 군부의 최고위층들은 아는 내용들이었다.

키신저의 이 끝없는 친-공산주의적 행보는, 소련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1973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1967년 병합한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 대한 영유권 등 아랍-이스라엘간 갈등 전반에서 비롯된 전쟁--역주) 이후 중동 협상 시기에 왜 키신저가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도 함께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실제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키신저는 항상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도 함께 대표해 온 인물이었다. 어쩌면 미국인들은 나무를 본다고 숲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옵저버[Observer]지는 키신저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

“무자비한 권력투쟁을 행하고, ‘세계 평화를 증진시킨다’는 것과 같은 “엄청난 거짓말들”을 천연덕스럽게 해 오면서, 키신저는 ‘자신이 조국이라 채택한 나라’인 미국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와 그 문명,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국가의 국민들을 상대로 끝없이 속임수를 펼쳐 온 교활한 반역자였다. 헨리 키신저와 같은 자가 오늘날 미국이 처한 현실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고, 서구 세계에 횡행하는 병적인 리더십을 간파해내지 못할 리가 없겠지만, 그는 엄청난 기회들을 오로지 자신의 권력 상승과 국제주의자들의 명분을 드높이는 데에만 활용해 왔으며, 오직 이를 위해서만 부지런하고도 무자비한 행보를 펼쳐 왔다. 키신저는 ‘데탕트’라는 획기적인 미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 기획한 인물이지만,--이 키신저의 정책은 미국, 유럽, 그리고 전세계의 이익을, 소련 및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의 이익과 한 데 합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키신저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이 백악관에 침투시킨 인물로서, 그는 미국의 정치, 경제적 구조에 변화를 일으켜, 미국의 정책이, 키신저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신 국제 질서[new international order]’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려고 노력했다.”

국무장관이 된 직후였던 1973년 10월 4일, 키신저는 UN 총회의 대표단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디너 파티의 호스트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키신저는 닉슨 행정부의 목표는 ‘세계 정부[World Government]’를 구성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잠재적 핵전쟁의 위기가 도래한 시대에, 그리고 이념 갈등의 한 복판에서도 즉각적인 통신과 교류가 가능해진 시대에, 우리의 가장 시급한 책무는 명백해 보이는 역사의 철칙들을 극복해 내는 것입니다. ‘세계 공동체[world community]’의 비전은 권력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 앞에 맹세하건대, 미국은 ‘세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보는 시험대 위에 올려져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이상은 항상 보다 높은 곳을 향해야 하겠습니다.” 키신저는 UN 대표단에 건배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소망의 보고인 UN을 위한 저의 건배에 여러분들이 함께 동참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세계 정부의 이 거대한 거미줄은 록펠러 가문이 기증한 땅에 본부를 세워 둔 채, 이미 구동중인 장치들을 활용하여 완전한 세계 지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 거대한 거미줄은, 키신저, 그리고 키신저를 돕는 음모가들이 이미 낡은 시스템으로 간주하는 ‘국가주의[nation-states]’에 바탕한 세계 모든 나라들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 한 때 주권의 최고 권위체였지만, 키신저처럼 입으로는 고귀한 이상들(정의에 입각한 세계 공동체라는 이상)을 부르짖지만 실상 개인적인 야망과 세계 지배라는 비전만이 가득 찬 자들이 만들어 내는 조약과 협정들의 연속 속에 오늘날 왜곡되고 뒤틀린 주권만을 갖게 된 이들 나라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선량한 미국인들이, 음모가들이 휘두르는 서슬 퍼런 도끼 아래 가시밭길로 인도되어 기소되고 처벌 받았던 사건--저자주)을 한 번 되짚어 본다면, 바로 ‘모스크바식 숙청[the Moscow purge trials]’의 ‘미국 버전[the American version]’에 다름 없었던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벌어져 온 일들의 참 모습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처음 사건을 기획했던 사람들이 여기서 주어지는 메시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앞으로 과연 누가 애국자가 되려 하겠는가?--키신저와 같은 슈퍼 사기꾼[super con man]에 의해, 불명예를 떠안은 미국인들은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낙인 찍혔으며, 다니엘 엘스버그[Daniel Ellsberg](1931- , 랜드 연구소 소속 미 전략 분석가--역주)와 같은 역적들은 명예롭게 되었다. ; 미국을 위해 일했던 참된 일꾼들은 감옥으로 갔으며, 친-공산주의자들은 “인권[civil rights]”이라는 미명 아래, 공공연한 간첩행위에 대해서도 벌받지 않고 넘어갔다. 분명코 이 사건은 청산되지 못했다. ‘독립 선언’에 서명한 우리 선조들의 뜻에도 배반되는 일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애국[patriotism]’이 자신들의 영예이자, 의무이며, 특권이라고 믿었다. 부디 역량있는 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이 음모가들에 맞서고, 이들의 의지를 꺾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게 되길 기대해 보자.

[하톤: 물론, 아직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책자 인용의 끝]

하톤: 사탄이 실제로 무엇과 같이 생겼으며, 또 누구와 같이 생겼을 것 같습니까? 헨리 키신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1925- , 제럴드 포드 및 조지 부시 (시니어)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냈고, 조지 부시 (주니어) 대통령 시절에는 해외 정보 참모 회의[President’s Foreign Intelligence Advisory Board] 의장을 맡았으며(2001-2005),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 안보팀 구성 자문 역할 등을 수행--역주)와 같은 자들, 여타 위기 상황들을 미끄러지듯 빠져 나가는 끔찍한 공산주의 적-그리스도들의 혼합된 모습이 아닐까요? 이번 세기 내내 당신들은 이러한 적들이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이들이 당신들을 위한 법을 만들어 당신들을 노예로 삼고, 또 당신들이 가진 모든 자산들을 죄다 훔쳐 가게 내버려 뒀습니다.--그러한 반면, 당신들은 어쩌면 보다 나은 길을 열어 보였을지도 모를 지도자들은 고의로 암살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악행만을 일삼는 사악한 엘리트들이 그들에 대한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꾸며낸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키신저와 또 키신저를 따르는 무리들이 제거되지 않는 한, 미국에, 아니 미국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진정한 자유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최고위층의 플레이어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당신들의 정부를 기초부터 다시 세우지 못한다면, 당신들의 문명은 머지않아 ‘사라진 문명[lost civilization]’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대청소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더 큰 악[MORE EVIL]으로 누르는 것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악은 반드시 선[GOODNESS]을 통해서만 쓰러뜨려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들은 새로 지어 올릴 ‘기초’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그렇게 하길 선택하기만 한다면, 이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오버로드들[OVERLORDS](천상의 메신저들--역자 추정)은 단지 길을 보여주는 자들[WAY-SHOWERS]일 뿐입니다.--오버마인드[OVERMIND](인류의 상위자아 또는 하나님--역자 추정)는 변환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합니다. 악은 단지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선이 사라진 존재일 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에고를 가진 자아[EGO SELF]가 드러내는 불균형적인 측면에 따라 ‘육체적인 표현’을 얻는다는 환상 속에 이를 혼동하고 파괴시킬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악의 “지도자들”에게 악이 계속해서 불타 오를만한 연료를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렇게 큰 불길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들은 그들 모두를 처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 자신이, 악이 드러내는 모든 방법, 모양, 형태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변화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나은 방법’은 궁극적으로 항상 널리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진실의 지혜’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문명 전체가 몰락해 버리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이 지구 위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되려 하십니까? 대안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종말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당신들은 에테르체의 존재들이 탄 거대한 은빛 우주선들이 나타나서 당신들을 도와주길 바라십니까? 당신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던 이 행성 위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물들을 대상으로 오직 대혼란만을 야기해 온 당신들을 위해, 그들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까?

이 은빛 우주선들에 탄 “자들”는 누구일 것 같습니까? 이 우주선들은 천사들과 메신저들의 우주선들일까요? 자, 나는 당신들에게 몇 가지를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 어떤 “다른” 통제자들[controllers]에 의해 통제를 받는 것이 오롯이 악에 의지하여 사는 것보다는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친애하는 자들이여, 궁극적으로 ‘통제’는 마찬가지의 특성을 갖습니다.--통제란 결국,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놀랍고도 축복받은 창조(선물)[CREATION]인--이성과 선택[reason and choices](‘자유 의지의 이해’ 참조--역주)--의 완전한 상실일 뿐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저 먼 우주[outer limits]”에서 온 자들의 모습으로 괴물[GARGOYLES]의 형상을 받아 들였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경이로운 에테르체 천사들의 모습을, 날씬하면서도 작은 돌연변이들(그레이 형태 외계인--역주)의 형상으로 대체시켜 놓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 자신들의 종족들을 파괴시켰으며, 당신들의 도덕적 선의 규율[code of moral goodness]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당신들은 당신들의 삶의 근원인 당신들의 행성의 완전한 파괴를 향한 마지막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행성의 운명이 짐승[BEAST]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이 “짐승[beast]”은 컴퓨터를 닮은 것도 아니고, 바 코드[the bar codes]를 닮은 것도 아니며, 어떤 종류의 동물을 닮은 것도 아닙니다.(‘신 국제 경제 질서’ 참조--역주) 짐승은 인류의 모습과 형태와 의지[SHAPE, FORM AND INTENT]와 정확히 똑 같습니다! 당신들이 이 짐승과 적들을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신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들의 모습을 만들었지만, 이 모습이 이제는 실로 대단히 추한 몰골로 변모되고 말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들”이 오게 될 것입니다.--진실[TRUTH]지혜[WISDOM]를 통하여. 당신들은 이를 분별해 낼만한 지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이미 너무나 두려움에 휩싸여서, 그러한 지혜 속에 일어서고 행동해 나갈 용기를 잃진 않았습니까? 당신들은 숨쉬고 걸어 다니지만, 죽어 있는 자[BREATHING, WALKING DEAD]로 이미 전락해 버리진 않았습니까???
pp.20-23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46권 (미간행 저널), 제 2-3장, pp.16-23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net/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blog.daum.net/truthin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