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139권, 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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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37,139권, 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1. #3

    Default 제137,139권, 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III


    제 5장, 1995년 5월 19일 금요일, 6:48 A.M. 8년 276일

    ......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3 :

    [인용]
    메이슨(건축 석공)[Architectural Masonry](계속)

    ......

    정확히 같은 시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은 미국도 마찬가지로 ‘집어 삼키기 쉬운 나라[ease pickings]’가 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멀린스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첫번째 유태인은 제이콥 바심슨[Jacob Barsimson]으로, 그는 1654년 뉴 암스텔담[New Amsterdam](나중에 뉴욕이 됨)으로 건너갔다. 1960년, 뉴욕에 살던 유태인 학자였던 말콤 H. 스테른[Malcolm H. Stern]이, 사적인 출판의 일환으로 극도로 한정된 부수만을 발간했던, ‘유태계 후손 미국인들[Americans of Jewish Descent]’이라는 책(단 550부만 간행)에 보면, 1654년은 유럽 각국에 거주하던 부유한 세파르딕 유태인들을 태운, “유태인들만의 메이플라워호[Jewish Mayflower]”가 뉴욕에 도착한 해였다고 한다. 이 놀라운 책은 미국 유태인들 약 25,000명의 조상을 16세기까지 정확히 다 추적해 올라가고 있다. 그 중에는 스티븐슨 가문[the Stevensons], 굿윈 가문[the Goodwins], 드랜시 가문[the DeLanceys], 리빙스톤 가문[the Livingstons], 롯지 가문[the Lodges], 티파니 가문[the Tifanys], 홉킨스 가문[the Hopkins], 그리고 록펠러 가문[the Rockefellers]도 있다.(록펠러 가문은 스페인에서 터키로 도망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이후 종국적으로 미국에 도착한 가문으로 원래 이름은 로겐펠트[Roggenfeld]였으나 이후 록펠러로 변경한 가문이었다.) 그들에 앞서 넘어 온 유태인들 가운데는 콜롬부스와 함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카리브해 연안의 섬으로 오늘날의 도미니카와 아이티--역주)에 도착한 5명의 “마라노스들[Maranoes]”이 있었는데, 이들은 북미 땅에는 사실상 결코 진출하지 않았었다. 바심슨 다음으로 온 유태인은 네덜란드 유태인 헤이맨 레비[Hayman Levy]로 이어서 도착했던 니콜라스 로웨[Nicholas Lowe]조셉 사이먼[Joseph Simon]은 이내 레비에 합류했다.--이들은 모두 인디언들에게 값싼 제품들을 파는 무역업을 했다. (그들은 이 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the Dutch West India Company]에서 함께 일한 관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동부 해변 지역에 평화롭게 거주하던 인디언들에게 럼주와 위스키를 파는 아이디어를 처음 고안해 냈던 건 로웨였으며, 이들은 곧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Newport, Rhode Island]에 증류주 가공 공장을 세웠다.--북 아메리카 최초였다. “짧은 시간 안에 뉴포트에 증류주 가공소는 22 군데가 생겼으며, 모두 유태인들 소유로, 가공소들은 ‘화주[firewater]’(위스키, 럼 등--역주)를 제작, 유통시켰다. 인디언들의 타락, 그리고 초기 정착민들에 대한 학살 등은 모두 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스토리들이다.” 멀린스에 따르면, 그러는 동안 뉴포트는 또한 통상적으로 “유태인들의 뉴포트[the Jewish Newport]--세계 노예 무역의 중심지[World center of Slave Commerce]”라 불리기도 했다. 1600년대 말까지, 6군데의 유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 뉴포트[Newport], 찰스톤[Charleston], 뉴욕[New York],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리치몬드[Richmond], 그리고 사바나[Savannah]. 그럼,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찰스 2세가 영국 국왕이 되고 전통의 영국 의회(컨벤션 의회)[the Convention Parliament]가 복구되고 난 후, 코먼웰스[Commonwealth](영연방)의 통치(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도 겸했다.)가 본격화되었을 때, 유태인들과 겪게 되는 문제점들도 다시 재발했는데, 특히 1664년, 유태인들이 배를 타고 대규모로 영국에 입국하면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바로 그 해, 템즈강[the Thames]을 따라 들어 온 유태인들의 배에는 쥐떼들이 들어 있었으며, 이 쥐떼들로 인해 대규모 흑사병이 런던에 창궐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유행병은 1년도 넘게 맹위를 떨쳤으며, 7만 5천명이 사망에 이르렀고, 많은 사람들이 도피를 위해 영국을 떠나가기도 했다. 1666년[하톤: 흥미로운 연도군요.]에는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9월 2일부터 9월 9일까지, 만 3천 채의 가구, 84개의 교회,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 길드홀[the Guildhall], 다수의 시장, 부두 등을 포함하여 도시 전체의 5분의 4가 파괴되었다. 악재는 항상 연속해서 3번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가사의하게도, 1670년, 도버[Dover]에서는 영국의 새 왕조와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간에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다.--영국에 카톨릭을 부활시키는 조약이었다! 열정적인 동성연애자이기도 했던 프랑스 국왕은 72년간(1643-1715)을 통치한 전제적 독재자에다 위그노들(프랑스 개신교도--역주)의 박해자였다. 2년 뒤, 윌리엄 3세(오렌지 공)는 네덜란드의 세습 군주가 되었는데, 물론 유태인들의 승인과 유태인들의 후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다 1686년 제임스 2세(찰스 2세의 동생으로 찰스 2세 사망에 따라 1685년 왕위에 오름--역주)가 로마 카톨릭을 영국에서 정식으로 승인하려 하자, 이내 유태인들과 프리메이슨들 양쪽 모두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1688년 영국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시작되었으며, 람세이 장군이 ‘이름없는 전쟁[Nameless War]’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혁명 역시 유태인들이 자금을 댔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솔로몬 메디나[Solomon Medina], 수아소[Suasso], 모세스 마카도[Moses Machado]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부유한 사립의 은행가들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영국을 구해내기 위해”, 네덜란드 오렌지공 윌리엄 3세를 “초대”했으며, 윌리엄 3세가 도착하자 마자 제임스 2세는 피난처를 구해 프랑스로 달아났다. “행복한 군주(메리 모나크)[Merry Monarch]”(영국 국왕에 대한 별칭--역주)는 이제 더 이상 자리에 없었다.(이후 1689-1702년간 오렌지공 윌리엄 3세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국왕을 겸임--역주)

    람세이 장군에 따르면, 런던에서 대규모 가신 그룹을 거느렸던 윌리엄 3세의 총 재정 담당과 참모 역할은 솔로몬 메디나[Solomon Medina]가 맡아 했는데, 11년 뒤 그는 공헌의 대가로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교활한 메디나와 함께 왕의 또 다른 앞잡이 역할을 했던 인물은,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될 자의 선대 조상이기도 했던, 제 1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John Churchill, first Duke of Marlborough]이었다. 그는 찰스 2세를 등진 핵심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유태 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말보로 공작(존 처칠)은 여러 해 동안, 네덜란드 출신의 유태인 솔로몬 메디나[Dutch Jew Solomon Medina]로부터 한 해 급여로 6천 파운드도 넘는 거금을 받았다.” 오렌지공 윌리엄이 새로운 영국 군주로 있는 동안, 지난 세기에 늘 그래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무상[secretary of State]의 지위는 여전히 주의깊게 선택된 프리메이슨이자 정보기관의 고위 관리가 맡았다.
    ......

    이어지는 사건들에 관해서는 멀린스의 ‘유태인들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 of the Jews]’에 보면 구체적인 사항들이 나온다. “1694년 오렌지공 윌리엄은 군대에 지급할 돈이 필요했다. 그는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해 올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 했기에, 대규모의 상비군을 항상 유지했어야만 했다. 이 때, 그의 참모들은 런던의 상인들과 논의해 볼 것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유태인들이었으나, 이들만이 윌리엄에게 빌려줄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윌리엄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자신들에게 ‘빚에 대해 발급하는 은행권 화폐’ 발행권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이 특별한 요구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의했다. 결국, 최초의 중앙 은행권이 탄생했으며, 젠타일들은 유태인들이 발행하는 ‘이자를 갖는 은행권 화폐’에 의한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태인들은 이 화폐 발행권에 대한 허가를 통해, 사실상 영국 국왕의 권위를 찬탈하게 되었다. 한 나라의 주권은 항상 화폐 발행권과 동일시되어 왔는데, 이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영국 은행[their Bank of England]”을 통해 이 권리를 획득했던 것이다. 오렌지공 윌리엄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유태인들에게 영국 은행 설립 허가권을 내 주었지만, 수 백 만 명의 젠타일들은 이로 인해 끔찍한 죽음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당신이 내는 고리(高利)’의 탄생 : 모카타[Mocatta]에게 감사

    유태인들은 시티 오브 런던에 설립된 이 새로운 은행의 총 책임자로 존 보우블론 경[Sir John Boublon]을 앉혔으며,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은 신속하게, 영국 동인도 회사(이 무렵에는 “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the United Company of Merchants Trading to the Far Indies]”로 불렸다.)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양쪽 모두에서 행해지는 마약 거래를 통한 수입에 대한 자금 세탁과 이체 기관이 되었다. “영국” 은행은 또한 유태인 리더들이 지휘하는 프리메이슨 그룹과 영국 정보기관 양쪽 모두에 대한 자금 지원의 핵심 역할도 했다. 이들은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포르투갈 태생의 세파르딕 유태인인 모제스 모카타[Moses Mocatta]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1671년 영국에 입국했던 인물로, 영국 은행의 설립과 함께 공식적인 금괴 브로커가 되었다. 그는 당시 국제 금괴 회사인 모카타 & 골드스미드[Mocatta & Goldsmid][하톤: 으으으으으음...]를 창설했는데, 이 회사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날 300년도 넘은 이 회사는, 소규모의 영국 유태인 은행가들과 긴밀히 연결된 채 움직이며, 국제 거래의 표준 금값을 임의로 “설정”한다[arbitrarily “fixed”]. 오늘날 이 회사의 파트너들로는 N.M. 로스차일드 & 선스사[N.M. Rothschild & Sons Ltd.], 사뮤엘 몬테규 & Co. Ltd.[Samuel Montague & Co. Ltd.], 샤프스 픽슬레이사[Sharps Pixley Ltd.], 그리고 존슨 메테이 뱅크스사[Johnson Mattey Bankers Ltd.]가 포함되어 있다.) 이 “끔찍한 금권력[terrible power of the purse]”을 통해, 이들 막강한 권력의 은행가들은 바로 그 날부터, 이 날 이 때까지, 무기력한 희생자들의 목에서 피를 빠는 뱀파이어들처럼, 영국 국민들의 피를 빨고 그들을 통제해 왔다. 람세이 장군은 이에 대해 재차 확인해 주고 있는데, 이 영국 은행의 설립과 함께, 제도화된 ‘국가 부채[National Debt]’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이는 유태인 대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출금으로 발생하는 이자에 대해, 영국이 매기는 세금 위에다 우선적인 상환권을 갖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래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똑 같은 일이 채 100년이 지나기 전에 미국에서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는 오렌지-나소 기사단[Order of the Kinghts of Orange-Nassau]이라는 배타적인 단체가 존재하는데, 바로 이 시기 형성된 단체로서, 이들은 나소 백작 윌리엄[William, Count of Nassau]을 통한 유태 자본의 영국 침략 및 영국 지배, 그리고 이어지는 “영국” 은행의 설립을 비밀리에 기념하고 있다. 이 단체는 파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t] 타입의 좌파 인사나 여타 같은 부류의 유명 인물들에게 (미트라교의?) 십자 훈장[Officer of the Cross (Mithraic?)]을 수여한다.(이 의심스러운 영예를 안은 최근 인물들 가운데는 급진 유태인이자, 록펠러가 후원하는 사기꾼[Rockefeller-backed quack]인 모리스 피셔베인 “박사”[“Dr.” Morris Fishbein](1889-1976, 의사, ‘미국 의학 협회 저널’ 발행인--역주)가 있는데, 그는 1913년 미국 의학 협회를 집어 삼킨 인물이었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S.W. 바론[S.W. Baron]의 책, “유태인들의 위대한 아이디어들” 319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1697년 초반 런던 증권 거래소는 이내 세계를 선도하는 증권 거래소가 되었는데, 이 기관의 124 회원석 가운데 12석은 영구적으로 유태인들에게 할당되었다.” 이들 12명의 브로커들은 시티 오브 런던으로부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단순히 그들이 이 돈을 최대한 활용했다’고만 언급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진술에 불과할 것이다.
    pp.44-46
    ......


    피닉스 저널 제 139권 (미간행 저널), “Choices”, 제 5장, pp.44-46


    (피닉스 저널 제 139권도 미간행 저널로 원래 제목이 없으나, 하톤은 헌정사[Dedication]에서 이 책의 제목을 “Choices”로 정해줄 것을 요청--phoenix)


    http://www.fourwinds10.net/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blog.daum.net/truthi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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