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권, 유태인들의 계보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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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37권, 유태인들의 계보

  1. #3

    Default 유태인들의 계보 III


    제 3장, 1995년 5월 4일 목요일, 3:31 P.M. 8년 261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3

    ......

    하자르족[the Khazars]의 등장

    634년경, 그 때 당시 바로 부유한 상인들이자 무역업자들로서, 일찍이 터키그리스 지방에 정착해 있던 유태인들은, 비잔틴 제국[Byzantium]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흑해를 가로질러 크림 반도[the Crimea]로 갔다. 우크라이나 지방에 위치한 크림 반도는 그때보다 1300년 이전에 이스라엘-키마리안족[the Israelite-Cimmarians]이 시티안족[the Scythians]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정착해 살았던 곳이었다. 오늘날의 남러시아 지방에서(그 곳에는 현대사의 중요 도시인 얄타[Yalta]도 위치해 있다.), 이들 유태인들은 번성해 나가는 이주지를 건설했다. 유태인들이 이곳으로 옮겨간 데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헤라클리우스[Heraclius]의 강요된 개종과 세례 요구를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불과 몇 년 전,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도 했었다. 크림 반도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이내, 야벳[Japheth]과 그의 손자 토가르마[Togarmah]의 후손들이었던, 사납고 호전적이었던 하자르족[Khazars]과 접촉했고, 이들과 교혼했다. 초원 지대[steppes]를 누비던 터키계 부족이었던 하자르족은 당시 광대한 영역에 걸쳐, 30여개의 다른 부족과 국가들을 지배하고, 이들로부터 무거운 공물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유태인들과 같은 부류의 이단자들[heretics(ketzers)]이나 추방자들[outcasts]은 하자르 왕국[Khazaria]에서는 명백히 환영 받았다. 하자르 왕국의 수도는 크림반도 동쪽 볼가강[the Volga River] 어귀이자, 카스피해[the Caspian Sea] 북서쪽에 위치한 이틸[Itil]이었으며, 이 곳은 오래 전부터 노예 무역이 번성하던 곳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 이 도시의 이름은 삭신[Saksin]이었는데, 삭신은 수 세기 전 아시리아의 포로로 있다 탈출한 부족들 가운데 한 부류였던 이스라엘-사카센족[the Israelite-Sacasene](오늘날 색슨족[Saxons]으로 알려져 있다.)이 명명한 것이었다. 이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하자르족은 강을 통과해 그들이 어렵게 쟁취한 영토로 들어가는 모든 선박에 대해 정확히 10%의 세금을 걷었다.

    중세 러시아-조지아 연대기[Russian-Georgian chronicle]에서는, 하자르족을 “곡[Gog]과 마곡[Magog]의 무리... 소름끼치는 얼굴과 야수같은 습성을 가졌으며 피를 즐기는 야만인들”이라고 묘사했다. 이것은 꽤나 묘사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자르족의 한 그룹은 카라-하자르[Kara-Khazars]라 불렸는데, 이들은 길고 검으며 헝클어진 머리에, 짙은 검정에 가까운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종족으로, 주로 그들의 근친 종족이었던 훈족[the Huns](토가르마[Togarmah]의 또 다른 후손에 해당하는 종족)과 결혼했다. 훈족은 밝은 안색에 파란 눈, 그리고 흐르듯이 드리워진 붉은 머리를 가진 종족이었다. 양 종족을 아울렀던 하자르의 왕은 카간 대왕[the Great Kagan](여왕은 카토운[the Katoun]이라고 불렀다.)으로 불렸으며, 기운이 넘치고 야만적인 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무리(그 때 당시 그 수는 약 50만 명 정도였다.)를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자[powerful, no-nonsense ruler]였다. 카간의 통치 기간은 정확히 40년(한 세대)으로, 변경할 수 없는 규칙처럼 정해져 있었다. 우연히 그 보다 더 오래 살거나, 또는 그 시기를 넘어 통치하려고 하는 자가 나타나면, 하자르 관습에 따라 자신의 휘하에 있던 최고 직위의 장군이 처형했다. 이 특이한 관습은 ‘레지사이드(국왕 살해)[regicide]’라고 불렸다. 하자르족의 이교도적인 종교는 샤머니즘의 야만적인 형태에 가까웠는데, 무수히 많은 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자르족은 제례 의식 때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주로 말이 선호되었다.)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바쳤는데, 대개 포로로 잡아 온 자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가장 똑똑한 자를 바쳤다.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하자르족이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A.D. 198년으로, 바르실리언족[the Barsileens](토가르마 계열의 근친 종족)과 연대하여, 아르메니아 지방에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나타났었다. A.D. 550년이 되었을 때, 그들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39년 뒤에는 비잔틴 제국과 함께 페르시아를 막기 위한 방어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 다음 세기에도 동맹관계는 유지 되었고, 627년 하자르족은 동 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또다시, 성가신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A.D. 685년 유스티니안 2세[Justinian II]는 16세의 나이에 비잔틴에서 동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으나, 곧 그는 유스티니안 1세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살인광에다 전제적 폭군임이 드러났다. 10년 뒤, 그가 도입했던 대단히 엄격했던 카톨릭 규정이, 국민들이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그는 곧 레온티우스[Leontius]에 의해 폐위되었다. 레온티우스는 즉시 유스티니안의 코를 절단했고(어쩌면 혀의 일부도 포함하여), 그 후 그에게 리노트메투스[Rhinotmetus]라는 징벌적 성격의 가혹한 별명을 붙인 다음, 크리-타르타리[Cri-Tartary](크림 반도)에 있는 체르소나에[Chersonae]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유스티니안은 이 곳에서 탈출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하자리아[Khazaria]의 수도 이틸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카간[Kagan]인 부시르 왕[King Busir]과 함께 막강한 부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들어가 비잔틴 제국을 탈환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카간은 이 거래에 대한 증표의 일환으로, 자신의 딸(테오도라[Theodora])을 유스티니안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내 부시르 왕은 이중 속임수를 써서 그를 죽이려고 했고, 이를 피해 유스티니안은 자신의 하자르 출신의 신부와 함께 불가르족[the Bulgars](토가르마의 또다른 후손들)의 땅으로 다시 달아났다. 불가르의 왕인 테르볼리스[Terbolis]는 이 때, 유스티니안의 비잔틴 회복을 돕기 위해, 만 5천 명의 중무장한 기마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결국 성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에, 유스티니안은 테르볼리스와 그의 전사들에게, 지원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금을 하사했다. 유스티니안 2세의 제 2 통치기는 A.D. 705년에서 71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 2 치세기 동안 그는 자신의 첫번째 통치 시기보다 훨씬 더 전제적이었고, 끔찍할만큼 잔인했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도 결코 천사가 아니었다. 결국 유스티니안 2세와 하자르의 피가 섞인 자신의 아들은 암살되었으며,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필리피쿠스[Philippicus]는 해방자로 환영받으며, 비잔틴의 황제가 되었다.--그렇지만 그 역시 불과 2년 뒤에 다시 폐위되었으며, 자신에 이어 황제 자리를 차지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에 의해 장님이 되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유태계 시오니스트 작가인 아서 쾨스틀러[Arthur Koestler]는 1976년에 출판한 자신의 유명한 책, ‘제 13번째 부족[The Thirteenth Tribe]’(‘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에서 이 이상한 사건들의 연속에 대해 놀랄 만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732년, 하자르가 아랍인들에 대해 거둔 승리의 소문이 도처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미래의 (비잔틴 카톨릭) 황제가 될 콘스탄틴 5세[Constantine V]는 하자르의 공주(세례명 에이렌[Eirene])와 결혼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아들이 레오 4세 황제[Emperor Leo IV]가 되었을 때, 그는 ‘하자르인 레오[Leo the Khazar]’로 불리기도 했다. 몇 년 뒤, 어쩌면 A.D. 740년에, 하자르 왕(불란[Bulan])과 자신이 거느리던 사법, 군사 부문의 집권층은 갑자기 유태인들의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유대교(유대주의)[Judaism]는 이내 하자르의 국교[state religion]가 되었다...” 야만적이고 거친 하자르 왕국의 이 이상한 집단-개종[mass-conversion] 사건은,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단지 “교활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성가신 종족은 당시 온 사방에 그들에게 적대적인 종족들로 둘러 싸여 있었던 데다, 몇몇 수적으로 우세했던 적들은, 비잔틴 기독교, 로마 카톨릭, 모슬렘, 또는 페르시아 신앙 가운데 한가지로 개종하기를 이들에게 강요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자르인들이 “유태인들”이 되었는가?

    그렇지만, 상당히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하자르사[History of the Khazars]’의 저자인 소련 공산주의 고고학자, M.I. 아르타모노프[M.I. Artamonov]의 가설에 따르자면, 하자르인들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례가 없이, 그들의 새로운 종교로서 유대교[Judaism]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실제로는 주의깊게 고안된 유태인들의 쿠데타의 결과[carefully-planned Jewish coup d’etat]였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하자르의 왕에 해당하는 카간[Kagan]은 단순히 무리의 수장 정도로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권력은 벡[Bek]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동 통치자[new co-ruler]의 손에 넘어 갔다는 것이다!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명백한 친-하자르계 저자였던 쾨스틀러는 “군대 통솔권을 포함한 모든 국사(國事)는 벡[Bek](때로는 카간 벡[Kagan Bek]으로도 불렸다)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벡이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고대 하자르의 정부 시스템은, 카간이 신성을 대표하고, 벡이 세속 권력을 휘두르는, “양두 체제[double kingship]”로 변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직후에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하자르인들로 하여금 유태인들의 언어뿐만 아니라 22개의 문자로 된 헤브루 알파벳[Hebrew alphabet]을 채택하게 한 데 이어, 심지어 할례[circumcision]까지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아르타모노프는 하자르인들을 “유태계 색채를 가진 기생충과도 같은 종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권력 승계는 그랜드 산헤드린[the Grand Sanhedrin](유태인들의 집회--역주), 그랜드 사트랍[the Grand Satraps](사트랍은 국가내 지역 통치자의 명칭--역주) 그리고 그랜드 케힐라[Grand Kehilla](유태 공동사회 대표자 명부[Communal Register])에 등록된 랍비들, 이에 더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대단히 우회적이면서도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탄주의 블랙 오컬트 음모단[Cabal of Satanic Black Occultists]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음침한 인물이자, 도처에 있던 모든 세파르딕[Sephardic] 유태인들과 에도미트[Edomite]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권력자로 간주되었던 ‘나시(왕자)[the NASI(Prince)]’--유태인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한 결정권자--에 의해 통제되었다. 나시는 그 옛날 유태인들이 바빌론의 포로민들로 살던 시절 이래로, 그들이 유지해 온 300인 위원회[Council of 300], 그리고 300인 위원회의 모든 의사결정을 통제했던 보다 작은 규모의 33인 위원회[Council of 33], 그리고 33인 위원회에 지시를 내렸던 실질적인 내부 그룹인 13인 위원회[Council of 13]를 관장하는 인물이었다.[하톤: 으으으으으음...!] 나시[the NASI]와 통치권을 공유했던 자로는 아브 베트 딘[Ab Beth Din]이 있었는데, 아브 베트 딘은 모든 바리새주의[Pharisaism]를 대표하는 종교적 수장이었다.(그리스도 시절, 이러한 통치권을 가졌던 양대 우두머리는 ‘주고트[zugot]’라고 불렸으며, 당시 피에 굶주렸던 두 명의 유태인, 샤마이[Shammai]와 힐렐[Hillel]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미스터리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의 오컬트적 수완가들은, 당시로서 보자면 ‘불길한 방향[Left-hand Path]’으로 나아가던 자들로서, 사실상 조하르[Zohar](카발라의 사상을 담은 책자--역주)의 비열한 마법, 그리고 유대 카발라[Kaballah](전통[the Tradition])(유대 신비교의--역주)(카발라[Kaballah](카발라[Cabala]로도 불린다.)는 아론 벤 사무엘[Aaron ben Samuel]이라는 유태인에 의해 850년 바빌로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전수되었다.), 그리고 역겨우면서도 변태적인 내용의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연구[the Study]), 또는 이들에 의해 헤브루어로 쓰여진 책자로 비밀스런 내용을 담은 아본 길라이온[Aavon Gilaion](죄[Sin]에 관해 기술한 책--역주)에 빠져있던 자들이었다.

    이 동방의 유태계 지도자들은 그들의 본부를, 그때 당시, 바그다드에 있던 탈무드 아카데미[the Talmudic Academy]에 두었으며, 훨씬 나중에 탈무드 아카데미는 콘스탄티노플로 이전되었다. 이 정부전복적 성향의 아카데미의 수장이 아브 베트 딘[Ab Beth Din](또는 가온[Gaon]이라고도 불린다.--“각하[excellency]”의 의미)으로, 아브 베트 딘은 중동과 근동 지방에 흩어져 살던 모든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 한편, 나시[the NASI] 또한 대단히 존경받는 에그자일아치[Exilarch](망명자들의 수장), 또는 “속박자들의 왕자[Prince of Captivity]”로, 유태인들의 자율적 공동체들 전체를 아우르는 세속적 권력을 대표했다.

    유대교로의 도매급 개종 이후, 약탈의 전사들이었던 하자르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과 교혼해 온 데다 마찬가지로 사나운 인척 집단이었던 아르메니아의 아슈케나지족[the Ashkenazim](고메르의 첫째 아들이자, 토가르마의 형제였던 아슈케나즈의 후손들)(하자르족과 아슈케나지족은 때때로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과 더불어, 모두 그 때 이후로는 그들의 적들로부터 “크림 반도의 붉은 유태인들[Red Jews of the Crimea]”로 불렸다. 이렇게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주변의 영토를 황폐화시키며 약탈하고 다닐 때, 항상 거대한 붉은 전투 깃발을 들고 다녔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일찍이 에도미트-몽골계 터키인들[the Edomite-Mongol Turks]과 교혼해 오기도 한 터였다.--그리고 에돔[EDOM]은 물론 붉은 색[RED]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무렵, 갑자기 크림반도(“작은 하자리아[Little Khazaria]”)에는 색다른 근본주의 유태 교파였던 카라이트파[the Karaites] 유태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카라이트파는 아난 벤 다비드[Anan ben David]에 의해 A.D. 765년 페르시아에서 창설된 소규모 종파였다. 그 때 이후로 유태인들 사이에는 이들의 교리가 널리 전파되기도 했다.(1897년, 러시아 차르 제국[Russian Tsarist Empire]에는 12,894명의 카라이트파 유태인들이 살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곧이어, A.D. 775년, 하자르 군주의 손자였던 레오 4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권을 물려받았다.--하자르인 레오 황제[the Emperor Leo the Khazar]로서. 그리고 이어지는 5년간 카톨릭의 비잔틴 제국을 철권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는 눈에 띄는 하자르의 공주이자 “꽃”이었으며, 그녀의 결혼은 대 하자르 왕국[the great Khazar]이 거대한 무슬림의 적들에 맞서, 결정적인 아르다빌 전투[battle of Ardabil]에서 승리를 거든 직후에 있었다. 이 무렵 베트스팔리아의 수도승[the Westphalian Monk]으로, ‘아키타니아(로마 제국의 지방 명칭--역주)의 기독교인 드루스마르[Christian Druthmar of Aquitania]’라고도 불렸던 자는 자신이 라틴어로 쓴 논문, ‘엑스포지토 인 에반겔리움 마테이[Exposito in Evangelium Mattei]’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늘 아래 단 한 명의 기독교인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이름은 곡[Gog]과 마곡[Magog]이며, 이들이 바로 훈족이다[who are Huns] : 그들 가운데는 가자리(하자르)[the Gazari(Khazars)]라 불리는 종족도 있는데, 이들은 할례를 하고, 유대주의[Judaism]를 철저히 준수한다.”

    그런데, A.D. 833년, 혹은 이 무렵, 하자르의 카간[Kagan]과 벡[Bek]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카톨릭의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흑해[the Black Sea]와 아조프해[the Sea of Azov]를 가로질러 돈 강[the Don] 어귀로 군대를 보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하자르 동맹을 도와, 양국간의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사르켈[Sarkel]에 거대하고 튼튼한 요새(백색의 성[the White Castle])를 지었다. 이는 “만만찮고도 위협적인 세계 무대의 신참자들로, 서쪽 지방에서는 바이킹[Vikings] 또는 노르스맨[Norsemen]이라 불렸고, 동쪽 지방에서는 로우스[Rhous] 또는 로스[Rhos] 또는 루스[Rus]라 불렸던 종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고, 쾨스틀러는 전한다. 이들 스웨덴 출신의 동부 바이킹족은 실제로, 하자리아의 가짜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던 진짜 세파르딕 유태인들, 그리고 이에 더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가짜 기독교인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 “그들의 서쪽 분파(노르웨이족[Norwegians]과 데인(덴마크)족[Danes]으로 구성)는 이미 유럽의 모든 주요 수로를 관통한 데다, 아일랜드의 절반도 점령한 상태였다. 이어지는 수십년에 걸쳐, 그들은 아이슬란드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노르망디를 점령했으며, 파리를 약탈하고, 독일, 론 강 삼각주 지대[the Rhone Delta], 제노아 만[the Gulf of Genoa]을 공격한 데 이어, 이베리아 반도[the Iberian Peninsula]를 돌아, 지중해와 다르다넬스 해협[the Dardanelles]을 거쳐 콘스탄티노플까지 공격했다”고, 아서 쾨스틀러는 명백한 두려움 속에 기술하고 있다.
    pp.2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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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

    Default 유태인들의 계보 IV


    제 4장, 1995년 5월 5일 금요일, 7:18 A.M. 8년 262일

    ......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4

    이러한 일들에 뒤따라, A.D. 862년 억세고 괄괄한 성향의 바이킹 루스족[Viking Rus](겁에 질린 아랍인들에게는 바랑(기아)인들[Varangians]로 알려졌다.)[하톤: ‘스타 트렉[Star Trek]’처럼 들리지 않습니까?]을 대동한 루릭 왕자[Prince Rurik](유틀란트의 로릭[Rorik of Jutland])는, 오늘날의 북 러시아 지방에서, 야만적이고 긴 머리를 가졌던 야벳의 무리[hordes of Japheth]를 누르고 권력을 잡았으며, 전략적 섬과 같았던 도시 노브고로드[Novgorod](오늘날의 레닌그라드[Leningrad] 남쪽에 위치)를 설립했다. 쾨스틀러에 따르자면, “바로 이곳으로부터” “그들은 큰 물길을 따라 남쪽 지방을 약탈해 내려갔다 : 볼가강[the Volga]을 따라 카스피해[the Caspian]까지 내려갔으며, 드네프르 강[the Dnieper]을 따라 흑해[the Black Sea]까지 내려갔다.” 3년 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고, 그 이후로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오늘날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용맹하고 억셌으며, 백색 피부를 가졌던 루스-바랑인 전사들[Rus-Varangian warriors]은, 고대 헤브루-이스라엘족에서 유래한 단[Dan] 족의 후손들인 동시에, 키마리안족[Cimmarians], 고트족[Goths], 삭센족[Sacksens]의 혼혈 종족의 후손들이었다. 키마리안족, 고트족, 삭센족, 이 세 그룹은 B.C. 700년경, 가미르[Gamir]에서 아시리아의 힘든 포로민 생활[Assyrian Captivity]을 겪다가 탈출하여 북서쪽으로 이동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소아시아[Asia Minor]를 건너고 유럽을 지나 대륙의 북서부 지방에 정착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역사 기록은 오직 성경에서만 누락되어 있다. 단 족[the Tribe of Dan]은, 우상을 숭배하던 솔로몬 왕의 사망 무렵에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를 떠났던 자들로서, 이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서쪽으로 갔으며, 그들이 지나간 여러 곳의 지명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얼마동안 이베리아(헤브루) 반도[Iberian(Hebrew) Peninsula]에 머물렀다가, 다시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지브롤터 해협 어귀 부분의 낭떠러지 바위--역주)을 지나 북쪽으로 나아갔으며, 계속되는 항해는 스칸--아비아[Scan-dan-avia]에서 끝이 났다. 여기서 그들은 -마크[Dan-mark]와 스웨-[Swe-dan]에 정착했던 것이다.(‘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참조--역주)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한가지 자료로는 프레데릭 하버만[Frederick haberman]이 1934년에 쓴 역사책, “우리의 백인 선조들을 추적하며[Tracing Our White Ancestors]”라는 책이 있다. 여기 보면, A.D. 9세기경 유태인 작가였던 엘두드[Eldud]가 밝힌, 다음 사실이 나와 있다 : “여로보암[Jeroboam]의 시대에... 동족들이 피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단 족[the tribe of Dan]은 이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편,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이 1976년에 쓴 책으로 역사의 진상을 면밀히 조명하는 “시리우스 미스터리[The Sirius Mystery]”(pp.166-167)에 보면, 보다 이른 시기의 50명의 단 족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나와 있다. 이들은 북 이집트의 항구를 떠나(B.C. 1453년) 로드 아일랜드(에게해 동쪽 그리스의 섬--역주)로 갔고, 거기서 다시 그리스로 들어 갔으며, 관련된 이야기들은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와 있다. 또한 이 책에는(pp.147-149) 예호바[JEHOVAH]라는 이름이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그리고 지중해 지역을 둘러싼 고대 세계의 신비주의 학파들과 연계된 다른 이교도 신비주의자들[pagan Occultists]에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한 완벽한 설명도 나와 있다.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바대로,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종교를 발전시켰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고, 서부 유럽(나중에는 미국에서도)의 기독교 국가들을 형성했던 것이다. 반드시 주의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유태인들[Jews]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헤브루-이스라엘족[the Hebrew-Israelites]과 세파르딕-에도미트 유태인들[the Sephardic-Edomite Jews]간에는 여전히 그들의 가슴 속에 서로에 대한, 깊숙이 뿌리박힌 내재된 증오심을 품고 있으며, 어쩌면 ‘인종적 기억[racial memory]’으로서, 이 증오심은 오늘날까지도 비밀스럽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10세기는, 하자르인들이(또는 그 속에 섞여 있던 진짜 유태인들이) 남부 러시아 지방에서 지역적 기반을 둔, 보고밀파[the Bogomiles]로 알려진 하위 그룹들을 형성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보고밀파는 기독교주의에 반대했던 적색 컬트[Red cult] 종파로 주로 불가리아와 발칸 반도에서 번성했다. 역사학자 헤케토른[Heckethorn]은, 그들은 역사상 가장 초창기의 공산주의-형태의 혁명 운동[Communist-type revolutionary movement in history]을 지향한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들에 반대했던 비잔틴이나 로마의 기독교도들도 사실상 더 나을 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시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도덕성이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전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와 마찬가지로, A.D. 875년, 교황 요한 8세[Pope John VIII]는 성직을 박탈당했던 ‘카푸아의 랜덜프 2세[Landulf II of Capua]’(테라 데 라부르 백작[the Count of Terra de Labur])와 함께 시실리에서 검은 형제단[the Black Brotherhood]의 일원으로서, ‘검은 미사[Black Masses]’에 실제로 참석하기도 했다!
    pp.33-34
    ......

    제 6장, 1995년 5월 6일 토요일, 11:58 A.M. 8년 263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5


    비잔틴과 하자르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

    A.D. 956년경, 무어인들이 점령한 스페인에서, ‘코르도바의 모슬렘 칼리프[the Moslem Caliph of Cordoba]’이자, 영리한 유태계 수상[Jewish Chief Minister]이었던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Hasdai Ibn Shaprut]는 비잔틴인들이 하자르에 대해 자신에게 언급한 다음 사실을 기록했다 : “하자르는 우리와 동맹관계에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예우한다. 우리는 서로 사절단과 선물을 주고 받는다...” 이 설명처럼,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하자르 왕국은 비잔틴 제국과 꽤나 단단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자르에 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었던 샤프루트는 전령을 통해 긴 장문의 편지를 하자리아[Khazaria]에 보내고, 답변이 있을 때까지 그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 몇 달 뒤, 그는 하자르 왕 조셉[King Joseph]으로부터 길고도 흥미로운 답장을 받았다. 정성스럽게 쓰여진 답장에서 왕은 샤프루트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답했을 뿐만 아니라, 하자르인들의 고대 조상까지 언급하여, 노아[Noah]의 셋째 아들인 야벳[Japheth]과, 보다 정확히는 야벳의 손자인(고메르[Gomer]를 거쳐) 토가르마[Togarmah]까지 거론했다. 토가르마는 모든 터키인들과 아시아,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걸쳐 있는 대부분의 슬라브족의 사실상의 대 조상[the actual great ancestor]에 해당되었다. 조셉 왕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명부에서 발견한 사실은 토가르마는 10명의 아들들을 두었다는 것입니다.[하톤: 으으으으으음...] 그리고 그 자손들의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위구르[Uigur], 두르수[Dursu], 아바르[Avars], 훈[Huns], 바실리[Basilii], 타르니악[Tarniakh], 하자르[Khazar], 자고라[Zagora], 불가르[Bulgars], 사비르[Sabir]. 우리는 그 중 일곱번째인 하자르의 아들들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아서 쾨스틀러의 흥미로운 책의 제목인 “열세번째 부족[The Thirteenth Tribe]”은, 사실상 그가 과녁을 좀 비켜나간[just a bit OFF THE MARK] 셈이다. 하자르인들은 사실상 토가르마의 7번째 부족이지, 야곱-이스라엘[Jacob-Israel]의 후손(쾨스틀러는 이렇게 추정했다.)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복잡한 사안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사실이다. 한편, 야벳[Japheth]이 나마[Naamah](카인계 여성으로 투발-카인[Tubal-Cain]의 여자형제)(투발-카인[Tubal-Cain]은 라멕[Lamech]의 아들이자, 카인의 7대손--역주)[하톤: 아-하!]를 통해 낳은 7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 그들 사이에서는 아리안 아세나[Aryan Asena], 즉 황제 종족[the Imperial Race], 또는 “명사들의 패밀리[Family of Notables]”로 불린다. 토가르마의 10명의 아들들은 자신들을 오노구르족[the Onogurs] 또는 “10개의 화살들[the Ten Arrows]”로 불렀다. 10개의 화살들은 준-유목민 생활을 하는 10개 부족의 연맹체를 의미했다.(쾨스틀러는 보다 구체적인 사항을 언급하지 않고, 이 부분을 다소 모호하게 표현했다.) 투발-카인[Tubal-Cain]은 문자 그대로 사탄의 직계 계보를 이었던 자로, 도처에 존재하는 메이슨들[Masons]에게는 항상 대단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메이슨의 지도자들은 모든 랏지 모임[Lodge meeting]에서 이 악마적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항상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었다. 한편,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난 18세기에 있었던 일화 한가지에 주목해 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는 여기 이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자신의 탐욕스러운 5명의 아들들을 “다섯개의 화살들[the Five Arrows]”로 비밀리에 불렀다. 이것은 나아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컬러풀한 문장(紋章)의 장식[crest]으로도 새겨졌다.

    구부러져도 부러지지는 않는다.
    하자르[KHAZAR] = 지드(유태인)[ZHID(JEW)]

    하자르의 카간이 샤프루트에게 이 놀라운 편지를 보낸 지 몇 년이 흐른 뒤, A.D. 965년, 대규모의 하자르 병력은 돈 강변 사르켈[Sarkel]에 위치해 있던 자신들의 거대한 요새에서 완전한 패배를 당했다. 이 사건은 분명히 “하자르 제국[the Khazar Empire]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기는 했지만, 분명코 하자르라는 나라[state]의 끝은 아니었다. “하자르는 넓게 펼쳐져 있던 슬라브 족을 통치했던 나라로, 그들의 영역은 모스크바 부근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자르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카서스, 돈 강, 그리고 볼가 강 사이에 위치해 있던 하자르의 본토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라고 쾨스틀러는 언급했다. 이 사르켈에서의 하자르의 패배 이후, 하자르족들은 중동부 유럽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Ukraine]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Poland-Lithuania]에까지 이르는 하자르인들의 이주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고대 지명들 가운데는 ‘하자르’ 또는 ‘지드[Zhid]’(유태인(쥬)[Jew])로부터 유래한 표현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 대 탈출[the great exodus] 속에서도, 패배한 하자르인들 가운데 몇몇은 뒤에 남았는데, “이들은 주로 크림 반도[the Crimea]와 코카서스[Caucasus] 지방에 머물렀으며, 오늘날에도 이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 ‘유태인들의[Jewish][하톤: ‘지디’시(이디시)[‘Zhid’ish(Yiddish)]] 거주지[enclaves]’를 형성하고 있다.”

    폴란드에 관해 설명하자면, “폴란[Polans]”족은 원래 토가르마의 여섯 번째 아들인 타르니악[Tarniakh]의 후손들이었다(나의 연구에 따르자면). 쾨스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폴란드 왕국의 창설과 관련된 최초의 여러가지 전설들 가운데 한가지에서, 유태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우리가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동맹 부족들이 그들 전체를 통치할 왕을 선출할 때(960년경), 그들은 아브라함 프로코브닉[Abraham Prokownik]이라 불리는 유태인(지드)[Jew(Zhid)]을 뽑았다. 그는 부유하고도 잘 교육받았던 하자르 상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로마나 예루살렘과 같이)일곱 개의 언덕을 가진[하톤: 으으으으음...(다시 한번)] 고대 도시였던 모스크바[Moscow](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다.)는 야벳[Japheth]이 나마[Naamah]를 통해 낳은 여섯 번째 아들인 메셰크[Mesheck](앞에서는 메셰시[Meshech]로 표현--역주)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러시아 토볼스크[Tobolsk]투발[Tubal](야벳의 다섯번째 아들)에서, 그리고 모스크바 남쪽의 거대한 강인 크(드)네프르[K(D)nieper]는 고메르[Gomer]의 둘째 아들인 디파르[Diphar](또는 리파트[Ripath])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0장 2-3절[Genesis 10:2-3](야벳과 고메르의 아들들을 나열--역주)은 에스겔서 38장[Ezekiel 38](곡[Gog]의 무리들이 이스라엘족을 공격하러 올 것이라는 예언--역주)을 통해 볼 때, 그 의미가 깊어지고, 보다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특히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세기말에 근접함에 따라, 미국을 상대로 한 붉은 적들[the Red enemies]이 비밀리에 공격의 대오를 갖춘 채, 정복을 위해 곧 들이닥치려 하고 있기에, 그 의미는 배가되는 것이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연구를 통해 확신하게 된 바에 따르자면, 사실상 야벳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 모두가 지금 이 세기에 접어 들어 공산주의[Communist] 국가들이 되었다는 것이다.(터키가 예외가 되겠지만, 터키도 곧 이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전쟁터에서 하자르족을 강타한 루스족의 지도자[the Rus leader]는 야만적이었으나 고귀한 키예프의 왕자 스비야토슬라프[Prince Svyatoslav of Kiev]로, 그는 거칠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우두머리였으나 말 그대로 그 누구도 포로로 잡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이로 인해 그는, 그 때 당시 여전히 하자르와 동맹 관계 있었으며, 루스족에 비해 힘의 우위에 있었던 비잔틴에 의해 패배를 당했다. 쾨스틀러에 따르자면, 그는 크네프르 강 북쪽에 있던 고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슬라브계의[Slavic]) 페체넥의 무리[horde of Pechenegs]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두개골을 컵으로 썼으며, 또는 금을 담아 두거나 술을 마시는 데 사용했다.” 스칸디나비안 루스족[the Scandinavian Rus]은 그보다 100년전이었던 A.D. 862년, 야베틱 슬라브족[the Japhetic Slavs]과 하자르계 유태인들(지드)[Khazarian Jews(Zhids)]로부터 키예프[Kiev]의 산악지대 요새를 전쟁없이 조용히 점령했으며, 그 때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100년도 넘는 세월에 걸쳐 광대한 영토에 자신들의 이름을 갖다 붙이게 되었다.--러시아[Russia].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서, 이 억센 단 족 계열의 백색 바이킹들[White Vikings of Dan]과 그들의 근친 종족들은 “아이슬란드[Iceland]에서 투르키스탄[Turkestan](터키인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중앙아시아 지역--역주) 접경지대까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북극해까지...” 차지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족의 후손들로서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아가 사무엘 하 7장 10절[II Samuel 7:10]에서 말한 약속의 땅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바이킹들이 미국 대륙을 발견한 것은 A.D. 1002년으로, 라이프 에릭손[Leif Ericsson]이 이끄는 용맹한 서부 원정대의 위업이었다. 이는 요셉의 부족[the tribe of Joseph]이 이끌었던 두번째 엑소더스[the second Exodus] 이후, 정확히 2,520년(다니엘서에 나오는 ‘타임, 타임즈, 그리고 하프 타임[a time, times and a half time of Daniel]’)(두 때와 절반으로 2,500년을 의미--역주) 후의 일이었다. 이 두번째 엑소더스 관해서는, 야셰르(야살)의 책[the Book of Jasher](야살의 책은 성경상에 등장하는 ‘참조의 책’으로 ‘공정한 자의 책[Book of Just Man]’으로도 불림. 1613년 헤브루어로 번역되었으며, 1887년 간행 영문판본이 존재--역주)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영웅적인 왕자의 죽음 이후, 스비야토슬라프의 아들이었던 블라디미르[Vladimir]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동 루스 부족[the Eastern Rus tribes]의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그는 처음에는 음란한 이교도로 시작했지만, 32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the Orthodox Greeks of Byzantium]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나중에는 그도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A.D. 989년). 그 후 블라디미르는 비잔틴의 공주 안나[Anna]와 결혼했는데, 이는 양국간의 동맹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쾨스틀러에 따르면, “몇 년 뒤, 그리스 정교는 단지 러시아의 통치자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공식적인 국교가 되었으며, 1037년 이후로,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루스족에 대항한 비잔틴-하자르간 동맹의 종결과 함께, 하자르족에 대항한 비잔틴-러시아간 동맹으로의 대체”를 야기했다. 몇 년 후인, 1016년, 비잔틴-러시아 연합군은 하자리아[Khazaria]를 침공했으며, 그 통치자들을 무찌르고, “이 나라를 정복했다.” 이 모든 사건들은 12세기까지 이르는 비잔틴 연대기에 정식으로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비잔틴의 역사학자였던 세드레누스[Cedrenus]는 이 패배한 하자르의 카간에게 게오르기우스 출[Georgius Tzu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하톤: 이런, 우리는 그저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연극이 끝날 때까지, 아마도 우리는, 연극 배우들 가운데,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것입니다.--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는 빛의 하나님[GOD OF LIGHT]의 동맹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분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1030년에도 대규모의 하자르 군대는 여전히 존재했고, 이들은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쿠르드족을 물리치고, 10,000여명을 살해했으며, 그들의 자산을 모조리 빼앗았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 주요 연대기[Russian Primary Chronicle] 고전 판본에 보면, 1079년에도 이들 하자르족은 러시아의 도시, 트무토라칸[Tmutorakan]에서 강력한 군집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4년 뒤, 러시아의 왕자 올레그[Prince Oleg]가 이 도시를 공격해, “왕자의 형의 죽음과 왕자 자신을 향한 음모를 꾸몄던 하자르인들을 도륙했다”고 나와 있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유혈이 낭자한 전쟁과 살육의 연속에서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하자르인들은 자신들의 이전 영토 안 곳곳에 흩어져, 소규모의 무리를 이룬 채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pp.44-46
    ......

    하자르 왕국의 몰락

    고대 하자르 왕국의 마지막 몰락과 함께, 두번째 디아스포라[a second Diaspora]가 뒤따랐으며, 이 거대한 규모의 유대화된[Judaised] 사람들은 본토에서 쫓겨나 모든 방향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지만, 이들은 언젠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러시아를 재탈환하겠다는 맹세를 했으며, 이 결연한 맹세는 그들의 뒤를 잇는 붉은(빨갱이) 후손들[Red descendants]에 의해 거의 정확히 8세기(9세기의 오기--역주) 후 피의 복수로 완수되었다. 한편, 이들 약탈꾼들 가운데 다수는 사실상 헝가리[Hungary](헝가리는 야베틱 훈족[the Japhethetic Huns]에서 유래한 명칭)에 의해 초대를 받아, 이미 지난 200년 동안 때때로 그래 왔던 것처럼, 헝가리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그 밖의 하자르인들은 크고 작은 무리를 이뤄, 슬로바키아[Slovakia], 폴란드[Poland], 불가리아[Bulgaria](야베틱 불가르족[the Japhethetic Bulgars]에서 유래한 명칭), 루마니아[Rumania], 러시안 그루지아[Russian Georgia](이곳에서 나중에 스탈린[stalin]이 태어났다.) 기타 여러 동유럽 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또한 이탈리아, 스페인, 이집트,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동의 여러 곳에서도 안전한 거처를 발견했다. 팀 뉴아크[Tim Newark]의 책 “야만인들[the Barbarians]”(런던, 블랜포드 출판사[London, Blanford Press], 1985년)에서 볼 수 있듯이,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는 17세기에 만들어진 목재 조각상에서는 당시 아슈케나지 “유태인”(지드)[an Ashkenazim “Jew”(Zhid)]과 아주 흡사한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일종의 헬멧 장식같아 보이기도 하는 “개의 귀와 염소의 뿔”을 갖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하자르인들이 철저히 흩어져 나간 빈 자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슬라브족의 일족으로 마찬가지로 야만적이었던 구츠족[the Ghuzz]에 의해 채워졌다. 이후 구츠족은 러시아 목초지대 어디를 가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지배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동안만 그랬을 뿐으로, 1세기 후인 A.D. 1237년, 그들보다도 더 포악했던 몽골족[Mongols]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그들을 완전히 쓸어 냈다. 이후 몽골족은 문명 세계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최대 규모의 유목민 제국을 설립했으며, 그 범위는 헝가리에서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이들 야만적인 몽골족들은 바투 칸[Batu Khan](징기즈 칸의 손자로, 주치 칸(징기즈 칸의 장남)의 차남--역주)과 바투 칸이 이끄는 ‘황금의 무리[Golden Horde]’(몽골족이 사용한 황금빛 텐트에서 유래했으며, ‘킵차크 한국[the Kipchak Khanate]’을 지칭--역주)의 지휘 아래 마침내 그들의 수도를 “볼가 강 어귀에 있던 도시, 일명 삭신[Saksin]이라고 하며, 일명 이틸[Itil]이라고도 하는, 사라이 바투[Sarai Batu]”에 세웠다. S.W. 바론[S.W. Baron]은 자신의 책, “유태인들의 사회, 종교사[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뉴욕, 1957년)에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하자르인들은 하자르 제국 영토의 한복판에 세워졌던 ‘황금의 무리’(킵차크 한국) 속으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하지만, 몽골의 부흥 이전과 이후에도 하자르인들의 후손들은 아직 정복되지 않았던 슬라브족의 땅[Slavonic lands]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궁극적으로 동유럽 지역에서 유태인들의 주요 거점을 형성하는 일을 도왔다.”라고 쓰고 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구츠족은 누구였고, 몽골족은 누구였던가?” 이 문제에 관한 내 연구에 따르자면, 구츠족(또는 킵차크족)[the Ghuzz(or Kipchaks)]은 토가르마의 첫째 아들이었던 위구르[Uigur]의 후손들이었으며, 몽골족은 야벳의 둘째 아들이었던 마곡[Magog]의 후손들이었다. 마곡의 후손들은 또한 토가르마의 셋째 아들이었던 아바르[Avar]의 후손들과 교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 모두의 후손들이 최초의 몽골 제국(A.D. 407-553년)을 설립했고, 오늘날에도 ‘공산 몽골[Communist Mongolia]’이라는 미스터리한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황인종들의 선조가 사실상 야벳[Japheth]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사실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명백히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야벳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가 중국인들 또는 다른 우랄-알타이 어족의 아시아계 인종들[other Asiatic Turaneans](그들중 다수는 르뮤리아[Lemuria]의 후손들이다.)과 교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황인종은 대체로, 흑인종, 적색 인종, 갈색 인종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아담-이전의[pre-Adamic] 인종들이었다. 그리고 적색 인종들은 사실상 오래 전에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후손들인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텔아비브 대학에서 중세 유태사[Mediaeval Jewish History]를 가르쳤던 A.N. 폴리악[A.N. Poliak] 교수는 1944년 발표한 ‘하자리아[KHAZARIA]’라는 제목의 자신의 연구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잘 알려진 유태 전설 상에는, ‘하자르[Khazar]’ 왕국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붉은 유태인들[Red Jews]’의 왕국이라는 표현만 나와 있다.” [하톤: 이제 당신들은 왜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묻히게 된 것인지, 그리고 왜 정확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진실의 역사가 밝혀지게 된다면,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은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당신들 모두가 참된 교육을 받지 않은 채로 성장하도록 유도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진짜 문제도, 문명도 잊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태계 저자이자 편집자인 다고베르트 D. 룬스[Dagobert D. Runes]는, 1952년 출간한 자신의 책(922페이지), “서구 문명에 있어서 헤브루의 영향[The Hebrew Impact on Western Civilization]”에서, 이들 하자르인들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진짜 유태인들은 유럽의 많은 젠타일[the Gentile](유태인이 아닌 자--역주) 왕들과 귀족들 곁에서 핵심 참모와 내각의 역할을 맡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은행가들, 조폐국 운영자들, 그리고 세금 징수인들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이들 “근거없는 세계시민주의 주창자들”은, 그들의 전문 영역이자, 증오와 경멸의 직업이었던 세금 징수 업무를, 종종 무력의 힘을 빌려가며[often at the point of a sword],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독일 라인란트[Rhineland] 지방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된 최초의 유태인들은 A.D. 906년 이탈리아 루카[Lucca] 출신의 유태인들이었다. 이들은 크림 반도 출신의 아슈케나지 가짜 유태인들[the Ashkenazim false Jews]과 상반되는, 세파르딕[Sephardics] 유태인들이었다. 쾨스틀러의 설명에 따르자면, 세파르딕 유태인들과 아슈케나지 유태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대체로, 세파르딕 유태인들은 장두형(머리가 긴 형태)[dolichocephalic(long-headed)](머리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형태--역주)이며,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단두형(머리가 넓은 형태)[brachycephalic(broad-headed)](머리의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형태--역주)이다. 이러한 차이는 하자르-아슈케나지[Khazar0Ashkenazi] 유태인들과 세미틱-세파르딕[Semitic-Sephardic] 유태인들간의 다른 인종적 기원에 따른 것이다.” 이들 세파르딕 유태인들이 독일에 도착했을 때, 그들 모두는 “좁은 띠를 형성하는 알자스[Alsace] 지방과 라인강 계곡에 인접한 지역”에 정착했다. 다음 세기 동안, 그들은 대단히 부유해졌으며, 이 지방에 사는 카톨릭계 독일인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다가, A.D. 1096년, 그들은 “제 1차 십자군 원정을 빙자한 히스테릭한 군중들의 공격에 따라, 완전한 절멸의 위험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벗어났다...”
    pp.48-49
    ......


    피닉스 저널 제 137권 (미간행 저널),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 제 1, 2, 3, 4, 6장, pp.14-49에서 발췌


    (피닉스 저널 제 137권은 미간행 저널로 원래 제목이 없으나, 하톤은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을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로 정해줄 것을 요청--phoenix)


    http://www.fourwinds10.net/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blog.daum.net/truthi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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