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8권, 하자르계 유태인들의 미 정부 침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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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078권, 하자르계 유태인들의 미 정부 침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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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장, 1993년 9월 9일 목요일, 1:42 P.M. 7년 024일

    ……

    [인용: 존 비티[John Beaty]의 책, “미국에 드리운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 over America]”(1951년 12월 초판 간행, 1954년 4월 제 11쇄까지 발행), 제 3장]

    [존 비티[John Beaty](1890-1961): 영문학자, 반공산주의 연구가. 1921년 콜롬비아대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19-1957년간 남부 감리 대학[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 정보장교로 근무--역주]

    하자르인들, 민주당에 가입하다.

    승리에 도취한 하자르인들[Khazars](‘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은, 다른 공산주의 “전향자”들의 도움 속에, 이미 그들 앞에 굴복해 있던 러시아를 상대로 계속되는 “숙청”을 통해 자신들의 장악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백 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은 즉각적인 살해로 또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했던 강제 수용소에서 천천히 밀려드는 공포 속에 죽어 갔다. 이런 방식의 숙청은 이곳 미국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적어도 소비에트식 통치 방식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미가 있다면, 학살된 1,500만 명의 사람들은 그 명단과 카테고리에 따른 분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국제 공산주의 단체의 고위급 인사였으나 나중에 “스탈린주의[Stalinism]”를 포기했던 인물의 진술) FBI 비밀공작원 출신의 대학 강사인 매트 스베틱[Matt Cvetic]의 최근 언급에 따르자면,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서른 살이 넘은 거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재-교육”을 시키기에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은 것으로 간주되어 학살되었다고 말한다. 구체 내역을 알고 싶다면, 텍사스 보거[Borger, Texas]에서 간행되는 ‘보거 뉴스-헤럴드[Borger News-Herald]’지에 편지를 써서, J.C. 필립스[J.C. Phillips]의 “우리는 빚이 있다[We Owe a Debt]”라는 기사(1952년 4월 16일자)의 재간행을 부탁해 봐야 할 것이다.

    하자르인들은 공포 정치를 통해 러시아 국민들을 정복했지만, 이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들(하자르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서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미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우리 나라를 그들의 주요 목표물 중 하나로 정한 이 숙명적인 선택에는--비록 아직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단계에 접어들진 못했지만,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상호 호혜적인 자본-노동 관계, 엄청난 생산성, 그리고 높은 삶의 질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 독재정체가 미국의 공화정체보다 노동자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이 새빨간 거짓말에 대한 명백한 반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식” 민주주의(영국과 미국)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끔찍한 방해물이며,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소련 지도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며, 특히 스탈린이 제 18대 공산당 의회에서 한 기조 연설(1939년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소련 정책의 공식적 선언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우리의(미국의) 개입이 있기 거의 3년 전에 나온 것으로, 조심스레 감춰지기 보다는 떠들썩하게 공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인력과 사무실과 부처를 보유한 국무부는 이 연설의 내용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식 민주주의”를 타도하려는 소련의 목표를 즉각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대규모 미국 개척의 두 번째 이유는, 미국에는 이민 금지법 혹은 이민 규제법이 전통적으로 미비했으며, 또 이와 같은 이민법이 통과되었을 때에도 그 엄격한 적용은 등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의 불법적인 미국 밀입국은 이민 및 귀화청[the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이 직면한 가장 심각하면서도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불법 밀입국은 엄청나게 증대했다. 놀랍도록 많은 숫자의 외국인들이 불법적인 지위로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1940년 발효된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등록되었다.”(‘미국의 이민 및 귀화 체계’, pp.629, 630)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개척의 세 번째 주요 이유는 미국은 거주 외국인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이 부재한 나라로, 심지어 이들의 활동이 정부 전복을 지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50년 수백만 명의 불법 밀입국자들 가운데 수백, 수천의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방할만한 적절한 조항이 없어서 그대로 다시 풀어주기도 했다.

    앞서 제 2장에서도 보았듯이, 하자르계 배경과 전통을 가진 인물들은, 1880년과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사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이 있을 당시 미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1917년에는 소비에트가 러시아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경도된 동유럽 출신들의 불법 밀입국은 제 1차 세계대전 종전(1919년)과 이민 제한법이 통과된 1924년 사이, 5년의 기간 동안 정점을 이루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입국 기록을 남긴 이민자들의 수는 약 3백만 명에 달하며, 그들 중 다수는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러시아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새로운 이민자들의 다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 기독 문명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러시아 지도자들의 실질적인 요원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 중 두드러지는 인물은 시드니 힐먼[Sidney Hillman](1887-1946, 미 노동계의 지도자로 미 합동 방직 노조[the Amalgamated Clothing Workers of America]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창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CIO)는 이후 미국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과 1955년 합병, AFL-CIO를 형성--역주)이었는데, 그는” 랍비(유태 율법) 교육”을 받다가(미국 인명사전[Who Was Who in America] 제 2권, p.254) 국제적인 수준의 정치 운동가로 변모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시드니[Sidney]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22년 전, 아주 유사한 명령이 레닌[Lenin] 자신에 의해 미국 내 활동중이던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달되었는데, 당시 힐먼[Hillman]은 미국-러시아간 산업 협동 조합(뉴욕 14번가, 103E)[The Russian-American Industrial Corporation at 103 E. Fourteenth St., New York]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분명히 러시아에서 넘어온 하자르계 이민자들 가운데 실질적인 소비에트 요원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또한 하자르계 이민자들 모두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confirmed Marxist]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의심없이 미국 전통의 관습을 따르기도 했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구성 비율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에 반하는 점들이 언급되거나 암시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이민자들은 앞선 시대의 이민자들과 비교해 봤을 때, 아주 상당 수의 사람들이 서구 기독 문명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으며, 또한 정치적 연대와 압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만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기로 마음먹은 자들이었다.

    20세기의 첫 30년동안, 비기독교도였던 수백만 명의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공화당에 가입했다. 당시 공화당은 다수 정당으로서 가입을 위한 홍보활동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반면 민주당은 상황이 나빴으며 더 많은 지지자들이 필요했다. 1912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큰 표 차이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그 때 공화당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지지층과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지지층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실제 투표수에 있어서 민주당의 윌슨은 태프트와 루즈벨트가 받은 표을 합친 것에 비교해 봤을 때 1,413,708표가 적었다. 사실상, 1892년(클리브랜드가 해리슨을 이긴 선거)부터 1932년(루즈벨트가 후버를 이긴 선거) 사이,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보다 많은 투표수를 얻었던 것은 단 한 차례로(9,129,606표 : 8,538,221표), 윌슨 대통령의 재선(1916년) 때였으며, 그 때 내건 슬로건은 “그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대선에서는 공화당이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었다. 1904년부터 1928년까지 있었던 7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받은 투표수를 계산해 보면, 민주당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평균적으로 45%이상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을 필요성을 넘어, 당시 민주당은, 정치적인 성향을 띤 동유럽계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또 이들 모두를 정당 서열상 높은 자리에 앉힐 수 있을만한 다른 특징도 가졌지만, 실상 그들 중 급진 좌파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던 소수만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공화당이 상당히 동일성을 띤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민주당은 여러 개 그룹의 집합이었다. 사실상 민주당은 ‘정치적 정당’이 전혀 아니었다. 대부분이 서로 서로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편의상 ‘동료’로 불리는 사람들 간의 결합이었다.

    20세기 초반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크게 두 가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남부 시골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톨릭 성향의 북부 도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물론 ‘서구 기독 문명’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공유하고 있긴 했지만, 그 밖에는, 공화당에 반대한다는 점(주로 이슈를 선점 당했기에)을 빼고는 정치적인 공통 분모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는 1880년 이후로 점점 그 세를 빠르게 불려가는 제 3의 그룹도 있었는데, 이들은 동유럽계 출신들과 기타 “자유주의자들[liberals]”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대표적인 예는 루이스 뎀비츠 브랜다이스[Louis Dembitz Brandeis](1856-1941, 1916-1939년간 미 대법관 역임, 대법관 시절 ‘철도 독점 반대’, ‘노동법 사수’ 등의 입장 표명. 시오니스트 운동을 지지했으며,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 창설에도 기여--역주)가 될 것인데, 그는 프라하 혈통이자, 명문 하버드대 출신의 유태인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브랜다이스가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참신성을 띤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법관에 지명하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 자신의 법적 성향과 기타 가치관들에 따라 1916년의 미국을 이내 좌편향으로 몰고 갔다. 이를 통해 그는 민주당의 미래, 그리고 민주당을 통해 본 미국의 미래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유태 백과 사전[the Universal Jewish Encyclopedia]에 따르자면, 상원에서는 “브랜다이스의 ‘급진주의’”와 “그의 법적 소양 부족”에 대한 “역사적 투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특징들’에 대한 반감으로, 엘리후 루트[Elihu Root](1845-1937, 1905-1909년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 전 국무장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 1909-1913년간 제 27대 미 대통령 역임--역주) 전 대통령, 그리고 7명의 전직 미 변호사 협회[the American Bar Association] 회장들이 그의 대법관 지명에 반대했다.[하톤: 되돌아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변호사 협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법관 지명 안은 1916년 6월 5일 상원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되었다. 이 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날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최고위급 공직자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한 이익 기반이 미국 바깥에 있는 자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은 19세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나아가 그는 법을 ‘선행된 사건들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물로 형성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법을 해석하는 자가 의도하는 일련의 결과들’에 맞춰서 법을 해석했다.

    유태 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브랜다이스 대법관에 관한 글(Vol. II, pp.495-499)은 가능하다면 전체를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

    세계 전쟁 동안, 브랜다이스는 각 나라의 유태 관련 사건들의 정치적 국면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때 이후로 그는 유태인 관련 사건들에 관한 한 시오니즘을 자신이 추구하는 이익의 근저로 삼았다. 1919년 그는 정치적 이유로, 그리고 몸 담고 있던 기관상의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회, 경제적 활동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법관으로서 브랜다이스는 :

    ‘미국중심주의’와 ‘소수 문화 또는 유태인들의 고향, 팔레스타인’과 같은 문제들 간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때면, 학문적 당혹감에 대해 결코 걱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적 ‘교리문답서[catechisms]’의 틀을 과감히 깨고, 주어진 모든 사건들의 ‘경제적인 의미들’을 철저히 그리고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가 가진 확신에 따르자면, 우리의 개별적인 철학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현대적 경제 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적절한 해결의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 작용적인 질서를 고찰했다. 브랜다이스는 헌법은 ‘자유로운 구조[liberal construction]’를 가져야만 한다고 느꼈다.

    이것이 어쩌면 미국 법원들이, 재판을 통해 마치 입법 기관의 역할을 함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윌슨은 미국의 제 1차 세계 대전 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어지는 결과로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뒤따랐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계 혈통의 아들, 딸들의 희생이 컸는데, 그러한 결정에는 브랜다이스의 윌슨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으며, 이는 이집트 최고 집정관이던 헨리 맥마흔 경[Sir Henry Macmahon](1862-1949, 1915-1917년간 이집트 집정관 역임--역주), 그리고 이 지역 영국군 최고 사령관이던 알렌비 경[Field Marshal Lord Allenby](1861-1936, 1차 세계대전 동안 이집트 원정대를 이끌었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1917년과 1918년 각각 점령--역주)과 다른 여러 명의 공식적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지만, 윌슨 대통령은, 나중에 영국 정부의 다른 밀실에서 고안된 계획에, 이미 경도되어 있었다. 이 계획이 바로 ‘시오니즘’으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1863-1945, 1916-1922년간 영국 전시 내각 수반--역주) 영국 수상도 이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역시 윌슨과 마찬가지로, 몇몇 저명한 유태인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제 19권 p.4)에 ‘제 1대 리딩 후작’(과거에는 루푸스 다니엘 이삭스 경[Sir Rufus Daniel Isaacs](1860-1935, 유태인, 영국 정치인. 영국 하원의원, 법무장관, 대법원장 등 역임--역주)으로 표기)으로 설명되어 있는 인물이다. S. 랜드먼[S. Landman]의 논문, ‘벨푸어 선언의 비밀 역사[Secret History of the Balfour Declaration]’에 따르자면(벨푸어 선언 : 1차 세계 대전중인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한 것--역주), “마크 사이커스 경[Mark Sykes](1879-1919, 영국 보수당 정치인, 외교참모--역주), 와이즈먼[Weizmann](체임 와이즈먼[Chaim Weizmann]1874-1952, 벨라루스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운동 지도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역임--역주), 그리고 소코로프[Sokolow](나훔 소코로프[Nahum Sokolow] 1859-1936,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지도자, 세계 시온의회 의장 역임--역주)간의 합의가 성립된 후, 영국 내각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는 일을 돕겠다는 내용의 비밀 메시지를 브랜다이스 대법관에게 보내기로 했다. 미국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동정과 지원 움직임이 활발하여 그 결과로, 미국이 급격히 친-연합국적 태도를 갖게 된 것에 따른 보답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벨푸어 선언의 기원”(1936년 2월 7일자, 유태 연대기[The Jewish Chronicle])이라는 기사 내용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 정부 대표들”은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 개입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최고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약속해 줌으로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합국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막강한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의 힘을 미국에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동원하고 뿌리내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윌슨 대통령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조언을 가장 중요하고 여기고 있었기에”, 시오니스트들은 그를 통해 미국의 전쟁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톤: 독자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오늘날 당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숙고 없이 그저 이 글을 단순히 읽고만 있다면, 당신들은 대단히 부주의한 자들일 것입니다. 누가 대통령이었으며, 어떻게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이 만들어 졌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퍼즐의 모든 조각들을 다 제시하고 있지만, 만약 당신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그저 “흩어진 조각들”만을 갖게 될 뿐이며, 전체 그림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헷갈린다구요? 물론 헷갈리겠지요.--그렇지만, 행위자들과 그들의 행동들에 관하여, 당신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수준까지 헷갈리게 만드는 건 이미 의도된 일입니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윌슨 대통령에게 미쳤던 이 이상한 힘은 스테펜 와이즈[Stephen Wise](1874-194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유아시절 미국으로 이민. 랍비, 시오니스트 지도자--역주)의 자서전인 ‘도전의 세월들[Challenging Years]’( ‘G.P. 풋넴의 아들들[G.P. Putnam’s Sons](출판사명--역주), 뉴욕, 1949년판)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랍비 와이즈는 “윌슨이 한 선택들에 대해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만큼, 그의 이 과도한 브랜다이스 의존 경향은...”이라고 썼다. 그리고 독립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의 대통령’이 한 놀랄만한 언급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랍비 와이즈가 시오니즘과 미국 유태 의회[American Jewish Congress]의 제 1차 회의 소집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게 언제가 되든, 당신과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내가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오면, 내게 말해 주시오. 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소.”

    이러한 진술들의 진위 여부는, 인용을 따온 정보 소스가 기록으로 잘 남아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윌슨 대통령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제 1차 세계 대전에 관한 비밀 문서들이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될 때까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윌슨 대통령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내밀한 의도’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처럼 ‘유럽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방식의 전쟁 수행은 끝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유혈이 낭자한 승리와 평화 정착의 실패는,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미 제 26대 대통령(1901-1909)--역주) 시절, 드라마틱하고 성공적인 러일 전쟁(1904-1905) 종결(개입보다는)(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양국 사이를 중재, 포츠머스 조약(1905년)을 이끌어 내었으며, 19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역주)’과 더 큰 대조를 이루었다.

    윌슨 대통령의 8년간의 통치 이후, 민주당은 1920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어지는 12년(1921년 3월 4일-1933년 3월 4일)동안 민주당내 3가지 다른 그룹들--남부 프로테스탄트, 북부 카톨릭, 그리고 브랜다이스 스타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다음 번의 승리와 이에 수반하는 권력을 기약하며, 서로 협조적이었던 지도자들을 매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아직은 주로 남부 프로테스탄트와 북부 카톨릭계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아주 약삭빠르게도, 당내에서 동유럽계 이민자들의 구성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서로 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20세기 들어 동유럽계 이민자들은 발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민주당에 가입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모두는 ‘이 낯선 동료들’에게 익숙해져 갔으며, 대부분 비-기독교계였던 이 제 3의 세력은 그러한 가운데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잠깐만 한가지 살펴보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플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제 1기 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민주당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은 아마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었던 바이어드[Byrd](해리 F. 바이어드[Harry F. Byrd], 1887-1966, 언론인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 1933-1965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역임--역주)의 언급이 될 것이다. 1951년 11월 1일 알라바마주 셀마[Selma Alabama]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민주당을 “트루만주의를 추종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군집[heterogeneous crowd of Trumanites]”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더해, 그는 “모호한 기원과 무책임한 방향성, 그리고 약탈적 목적성을 띤 민주당이 과연 정당이라 불릴 수 있을 지 의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사실상 소수 정당의 대표였던 우드로우 윌슨은 공화당의 심각한 분열로 인해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주로 해외로부터의 지속적인 보강을 통해 구성된 동유럽계 “제3 세력”,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은, 민주당을 소수당에서 다수당의 지위로 끌어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몇 외국인 출신의 지도자들, 또는 외국인과도 같은 성향을 가진 자들은, 민주당의 승리에 대한 그들의 기여에 대해, 특별한 방식의 보상을 받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들이 그 대가로 얻어 낸 것은, 미국 국민들로부터 주의 깊게 숨겨졌고, 심지어 같은 동유럽계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비중이 낮은 다수의 인물들은 배제되었던 것으로, 바로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러한 목적 달성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쉬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선거 방식 아래에서는 한 주 전체를 대표하는 투표수가 해당 주에서 다수 표를 얻은 후보자에게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미국에서는 메인주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 48개주에서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선출--역주) 오랜 전통의 주에서는 대체로 공화당 지지 주민과 민주당 지지 주민이 반반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지만, 잘 조직화된 소수가 역량을 발휘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유태인 비율이 아주 높은 주로는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뉴저지,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미시건이 있다. 물론 이들 주들이 바로 다수의 선거인단을 보유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주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프랭클린 들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당선되어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 때, 오랜 전통의 민주당원들은, 그들이 남부 프로테스탄트계이건 북부 카톨릭계이건 간에, 댐, 다리, 정부 청사 등의 건설 그리고 기타 각지에서 정부 재정 지원하의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길 원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 또는 그들의 동료들과의 계약을 원했다. 그들은 또한 연방 판사 등 안정적 임기를 보장하는 직위들의 일부를 할당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전통의 민주당원들 가운데, 그 어느 그룹도 “외교”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잘 아는 지도자나 또는 어학에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보유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 어떤 그룹도, 그저 원만한 수준의 이익 기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당내 동유럽 출신자들에게, 워싱턴 정가에서 준-각료에 이르는 직위를 할당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의 민주당원들이 만들어 낸 첫 번째 가장 놀랄만한 승리는, 루즈벨트 취임 이후 채 9개월이 지나지 않아 찾아 온 것으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한 일이었다. 윌리엄 라 바레[William La Varre]는 미 재향군인회보[the American Legion Magazine](1951년 8월호)에 “미국 역사에 있어서 모스크바의 붉은 편지의 날[Moscow’s RED LETTER DAY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사실에 입각한 장문의 글을 썼는데, 이 글에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설명들이 들어 있다. 라 바레에 따르자면 당시 미국 외교는 “음흉한 미소의 리트비노프[Litvinov](Maxim M. Litvionv, 1876-1951, 러시아 혁명에 참여, 소련 외무장관(1930-39), 주미 소련 대사(1941-43) 역임--역주)”와 “모두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1882-1965, 비엔나 태생으로 12세 때 뉴욕으로 이주, 미 대법관(1939-1962) 역임--역주)의 수하들인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1891-1967, 미 재무장관(1934-1945) 역임--역주) 그리고 딘 애치슨[Dean Acheson](1893-1971, 미 국무장관(1949-1953) 역임, 1950년 1월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6.25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애치슨 선언’으로 유명--역주)”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도, 리트비노프의 태명은 월렉[Wallach]이었고, 그는 또한 핀켈슈타인[Finkelstein]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라 바레가 거명한 4명 가운데 3명이 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로 모두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네 번째 인물인 딘 애치슨은 “프랑크푸르터의 부하[Frankfurter boy]”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루이스 D.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 대법관의 법률 서기로 근무”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터 부하들” 가운데 주요 인물이었던 애치슨은 아메리칸 머큐리[American Mercury]지(뉴욕주, 뉴욕 16, 이스트 36번가 11번지[11 East 36th Street, New York 16, N.Y.]) 1952년 4월호[하톤: 이 잡지는 오래된 잡지로 이 주소는 맞을 수도 있고,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당신이 도서관에서 정확한 “판본”을 찾거나 하는 일에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에 실린 메인 기사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이 글의 저자인 펠릭스 위트너[Felix Wittner]는 기사 일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자유라는 대의’에 해를 끼친 애치슨의 기록은 최소 19년 전, 그러니까 그가 스탈린으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미국 변호사로 활동할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애치슨은 심지어 소련이 미국에 의해 승인되기 전부터도 스탈린의 급료 지불 명부에 들어 있었다.[하톤: 멈추십시오!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부탁합니다.]

    라 바레가 쓴 기사는 다른 어떤 글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글에서 F.D. 루즈벨트가 어떻게 라틴 아메리카를 배신하여, 공산주의가 이 곳에 뚫고 들어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련 정부 승인’이라는 기본적인 사항을 염두에 둔 채, 다음 중요한 인용 글을 보기로 하자. :

    [인용 : La Varre]

    바로 모스크바의 특수 요원이자, 붉은 광장의 악명 높은 국제 조직[Red Square’s nefarious international machinations]의 정치 위원[Commissar]이며, 미 대륙 공산화라는 크렘린 계획의 총 책임자였던 루즈벨트는, 한 밤 중, 백악관 미국 대통령 좌석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지난 기만의 14년 동안, 붉게 물든 크렘린은, 미국 내에, 외교 면책 특권으로 보호받는 공산당 전진기지를 만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4명의 대통령들--윌슨[Wilson], 하딩[Harding], 쿨리지[Coolidge](1872-1933, 미 제 30대 대통령(1923-29)--역주), 그리고 후버[Hoover]--이 모스크바의 무신론적 사상 또는 그 매개물을 수용하는 일을 거부했다. 그러나 여기 마침내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나타났던 것이다.

    유서 깊은 국무부, 미 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 그리고 미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등에 소속된 많은 애국자들과 저명 인사들은 미국을 새로이 이끌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사악하고, 위험하며, 무신론에 기반한 ‘손님’을 받아들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주지 말 것을 탄원했다.--소련에서 오는 ‘손님’과는 악수도 하지 말고, 자국민들의 피로 붉게 물든, 모스크바로 되돌려 보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자신의 새로운 권위에 대한 도전에 분개했으며, 지식인들이자 자유주의자들인 양 행동하나 실상 막시즘과 파비언 사회주의(혁명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운동--역주)를 신봉하는 자들--그리고 과격 노조, 대학, 아첨하는 관료들--의 주장에 보다 경도되어, 크렘린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안에 결국 서명했다. 의회 승인도 없이, 그는 미국내 공산주의 대사관과 영사관들의 설립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소련과 체결하여, 완전한 외교적 환대과 특권을 ‘스탈린의 요원들[Stalin’s agents]’과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들에게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1933년 11월 16일(미소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역주)--한 밤 중! 이 날이야말로 미국 역사상, 우리 후손들이 오랫동안 겪게 될 비극의 원인이 제공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 날은 바로 에스토니아의 약탈자이자 영국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크렘린이 파견한 첫번째 요원이기도 했던, 소련 외교부 정치 위원, 막심 리트비노프[Maxim Litvinov]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함께 미 국민과 우리의 광대한 자원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적 재앙이자 전 세계적 재앙의 가장자리로 몰고 가게 될 계약, 사회,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게 될 계약, 바로 딘 애치슨과 헨리 모겐소가 이미 철저한 예비작업을 해 두기도 했던 계약을 맺게 된 날이었다...

    크렘린과 거래할 경우 미국이 갖게 될 불리한 점들에 대해, 가장 잘 요약된 사실 자료들, 폭넓은 분석들, 경찰 기록들, 그리고 군사 정보들이 워싱턴에 자발적으로 몰려 들었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헨리 모겐소와 딘 애치슨, 둘 다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이기도 했던, 이들에게 소련과 미국간의 교역 기회에 대한 “연구”를 맡겼으며, 소련과의 “우의”로부터 미국 국민들이 얻게 될 이득에 대해 설명한 그들의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이에 대해 칭송해 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자면, 소련의 지속적인 표리부동적 태도를 폭로하는 문서들을 수령했던 코델 헐[Cordell Hull](1871-1955, 1933-44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은 모스크바에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맺은 외교관계를 철회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루즈벨트는 미 국무부의 “재조직”을 시작했으며, 반-공산주의 이력을 가진 관료들을 --멀리 떨어진 고립된 직위로-- 좌천시켰다.

    1933년 11월 루즈벨트-스탈린 계약은, 비단 국가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 전반에 걸쳐 보더라도 너무나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갖게 된 손실과 부채들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향후 수 세대에 걸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크렘린이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갖게 된 이득과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는 1951년인 이제 와서야--우리의 수도에 소련 대사관이 설치되고, 그들의 비밀 요원들이 전 미국을 돌아다니게 된 지 18년이 지난 이제 와서야-- 겨우 국민들이 인식하게 되었다.[하톤: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아직도, 당신들 사랑스러운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소련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글은 이미 40년도 넘은 글입니다!]

    악마를 칭송해 온 미스터리한 우호관계를 통해, 그리고 기만과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미국적 타협[un-American compromises]을 통해, 우리는 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시대를 보내 왔다. 당시의 지도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죽었으며, 그들 무덤의 기념비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 위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을 잇는 다른 이들이, 다시금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죽은 자들이 누렸던 전략적 직위에 올라서는 일이 계속 허용되어 왔다.

    [인용의 끝 : La Varre]

    라 바레가 미재향군인회보에 실은 기사에서 묘사된 형태의 정부 아래, 다수의 새로 도착한 이민자들, 최근에 귀화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동료들이, 지명에 의해, 혹은 임용 시험을 통해, 국무부에, 대통령 보좌직에, 그리고 기타 여러 정부내 민감 직위에 침투해 들어 왔다. 이 기간 워싱턴에 둥지를 튼 자들 가운데는 단지 동유럽 출신의 좌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원래의 미국인들 가운데 사실상 공산주의로 전향한 자들, 또는 아예 공산당에 가입한 “변절자들”도 있었다.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항상 근심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이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늘 확고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전 하원의원이자, 원내 비-미국적 행위 조사 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1969년 국내 안보 위원회로 개명되었다가 1975년 폐지되면서 기능이 법제사법위원회로 이관--역주) 위원장이었던 마틴 다이스[Martin Dies](1900-1972, 텍사스 출신 민주당 소속 하원 의원(1931-45)--역주)는 여러 차례 연설(그 중 한 번은 저자인 내가 직접 듣기도 했다. 1950년)을 통해 다음 사실을 증언했다. :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소환되어 몇 번이나 백악관에 불려 갔으며--루즈벨트는 큰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 때마다 ‘공산주의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다이스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루즈벨트가 제시한 최고의 논거는 “우리는 그들의 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유사한 주제에 대한 다이스의 연설(1951년 5월 17일)은 미국 유산(헤리티지) 보호 위원회[the American Heritage Protective Committee]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다.[하톤: 이건 헤리티지 재단[The Heritage Foundation]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위원회는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 601 베델 빌딩[601 Bedell Building., San Antonio, Texas]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백악관이 정부내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한다’는 제목의 다이스의 또 다른 연설은,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헤롤드 H. 벨드[Harold H. Velde]가 작성한 의회 기록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 정부는 앞서 서술한 동유럽계 이민자 그룹과 공산주의에 물든 자생적 미국인들로 구성된 “위험인물들”에 의해 침투당했지만, 이들이 다는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소위 말하는 “망명자들”이 즉시 미국에 도착했고, 이들은 ‘행정 명령’에 의해 정부내 민감 직위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시민권 취득이라는 공식 절차 없이, 그리고 그들이 유럽을 떠난 이유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침투는 ‘행정 명령’을 통해 원활히 이루어 졌는데, 특히, ‘인종, 신념 또는 출신 국적’에 따라 고용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러한 행정 명령의 주된 근거로 사용되었다.

    먼 유럽의 적대적 지역에서 온 망명자들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미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 가운데는 소련에 동정적인 정서를 가진 자들도 많았기에, 이들의 공직 고용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은, 잠재적으로, 그리고 여러 측면에 걸쳐 보았을 때, 너무나도 역력한, 국가 안보에 대한 치명타가 될 일이었다.

    거의 ‘보안에 반하는 더블 체크’의 일환으로, 새로운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대한 보안 유지 임무는 F.B.I의 전문가들 손에 맡겨진 게 아니라, 원자력 담당 관료, 자신들에게 맡겨졌다. 이 문제에 관한 그들의 상대적인 경험 부재와, 또 외국인들의 관료 고용에 대단히 관대했던, 놀라운 ‘행정 명령’에 비추어 봤을 때, 비밀 원자 폭탄 기술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원자력 담당 관료들 보다가는 차라리 이들을 그 자리에 임명한 “중도좌파” 행정부가 비난을 받아야 할 문제였다. 원자폭탄 비밀을 알아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가운데는 유명한 외국인인, 영국 출신의 클라우스 푸흐스[Klaus Fuchs](1911-1988, 이론물리학자, 미, 영, 캐나다 공동, 원자폭탄 연구(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비밀을 빼돌려 소련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스파이--역주)--그러나 그는 영국 태생이 아니었다--가 있었다. 다른 원자력 스파이들도 모두다 외국인이거나 혹은 외국인들과 연계된 인물들로 모두 이미 예전부터 거명되던 인물들이었다.

    원자력 에너지 연구에 고용된 자들 다음으로, 어쩌면 ‘미국 공공 건설 근로자 연맹[the United Public Workers of America]’에도 미국 국방에 치명적인 비밀을 훔쳐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맹에는 다수의 동유럽 출신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의 책임 관리자였던 레오나르드 골드스미스[Leonard Goldsmith]와 로버트 바인슈타인[Robert Weinstein]도 있었는데, 둘 다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된 인물들이었다. 이 연맹--주요 조직이 워싱턴에 있었다--은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지배적이라는 이유로 C.I.O.(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역주)에서 쫓겨 났다(1950년 3월 1일). 그렇지만 만약, C.I.O가 소속 회원들을 보호해 주듯이, 미국 정부가 이 단체를 보호해 주었더라면, 이 사실은 본 저자의 주목을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유럽 이민자들의 미국 정부 내 침투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급류를 형성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으며, 또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목표에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라고 언급하거나 암시하지도 않아 왔다. 저자의 목적은, 동유럽 출신의 사람들 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근간을 형성하던 시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최근에 와서, 그들은, 루즈벨트-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 내에서 가장 전략적인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 정책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종종 결정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W.M. 키플링[W.M. Kiplinger]이 자신의 책, ‘워싱턴은 저것과 같다[Washington is like that]’(하퍼 & 브라더스[Harper & Brothers]사, 1942년--역주)에서 처음 끄집어 낸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는 ‘워싱턴에 있는 유태인들에 관한 사실들[The facts about Jews in Washington]’이라는 글에서, 이 내용을 요약해 두었는데, 이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은 1942년경, 재무, 인사 그리고 법무와 관련된 정부 각 부처와 기관에서 그 수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내 비-유태계 관료들이 대통령의 명령 아래에서” “다양한 정부 기관에 더 많은 유태인들을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그 기원와 이데올로기에 있어 동유럽계 인물들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활동하던 때에 정점에 달했다.(그 이후로도 죽 계속되었다.) : (1951년 중반까지)미국의 대유럽 정책을 주도했던 밀턴 카츠[Mr. Milton Katz](1907-1995, 하버드대 법학 교수(1940-78), 1933년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시행 당시 참모 역할을 했으며, 진주만 사건 이후에는 ‘전시 물자 생산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 1950년에는 유럽 재건 문제에 깊이 관여--역주) ; 미국 육, 해, 공군의 인력 수급을 책임졌던 안나 로젠버그[Anna Rosenberg](1902-1983, 전시 인력수급 위원회 위원장(1942-1945), 미 국방 차관보(1950-1953) 등 역임--역주) ; 군수물자 관리 책임자였던 맨리 플레이셔먼[Manly Fleischman](1908-1987,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전시 물자 관리 책임관으로 임명, 1952년 주 인도네시아 대사 역임, 1969년에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가 ‘공공교육 주립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역주) ; 그리고 임금 안정화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나탄 P. 파인싱어[Nathan P. Feinsinger](1951년 8월 30일자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1902-1983, 위스콘신대 법학교수, 국가중재위원회 위원장(1943-44), 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1945-47), 임금안정화위원회 위원장(1951-53) 등 역임--역주). 마찬가지로, 1948년 10월, 트루먼 대통령은 뉴욕 출신의 변호사이자 ‘국가 유태인 복지 위원회[the National Jewish Welfare Board]’ 의장이었던, 프랭크 L. 웨일[Frank L. Weil]을 “군대 내 종교, 도덕 관련, 복지 정책 지도 위원회[committee on religious and moral welfare and character guidance in the armed forces]” 위원장에 임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하자르계[Khazar] 또는 유사한 배경이나 연관성을 가진 인물들이 영국 사회주의 소수파 정부 내에서도, 레옹 블룅[Leon Blum](1872-1950, 중도좌파 정치인, 3차(1936-1937, 1938.3-1938.4, 1946-1947)에 걸쳐 프랑스 국무총리 역임--역주)을 필두로 한 프랑스 정계에서도 눈에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엠마누엘 신벨[Rt. Hon. Emanuel Shinwell](1884-1986, 애틀리[Attlee] 노동당 정부하 국방장관(1950-51) 역임--역주)과 쥘 모끄[Jules Moch](1893-1985, 프랑스 제4공화국(1946-58) 당시 8차례에 걸쳐 장관 역임, 공공 건설 및 교통장관(1945-47), 내무부장관(1947-1950), 국방장관(1950-1951) 등--역주)--패탱 장군[Marchal Petain](1856-1951, 프랑스 비시[Vichy] 정부(2차 대전 당시 독일과 협력) 당시 국가 수반(1940-44)--역주)의 적--가 그들로, 이들은 최근 각각 영국과 프랑스 내각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미국에서 비-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자들이 민주당에 가입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벨은 영국에서 좌파 노동당에 가입했다. 1951년 여름, 영국 하원에서 노동당 의원들 가운데만 21명의 유태인들이 있었으며, 보수당 의원들 가운데는 없었다.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 영국 노동당 당수(1935-55), 총리--역주)는, 그의 인종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오랜 기간 영국 “노동”당[“Labor” Party] 당수이자 사회주의 총리(1945-1951)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인물[a Communist sympathizer]로 여러 해 동안 국제적인 악명을 날렸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대[the international Communist force] 병력의 일부로 참전한 “영국 부대[English company]”를 방문하고, 그들을 칭송했다.

    높은 직위나 전략적 직위 또는 양쪽 모두에 걸친, 동유럽 출신 또는 배경을 가진(또는 그러한 배경의 인물들과 관련된) 몇몇 인물들은, 그들이 가진 유명세로 인해, 저자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거론되었으며,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도 다시 거론될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한가지--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없으며, 또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일부러 의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하톤: 아직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국회의원들와 여러 참모진들, 기타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그 의도에 있어서 하자르계 시오니스트들[Khazarian Zionist]이며,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까? 미국 국회는 통제되고[CONTROLLED] 있습니다. 독자들이여--당신이 선한 자이건, 악한 자이건, 혹은 다른 그 무엇이건 간에. 나아가, 미국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적 가치 아래 탄생한 국가이지만, 당신들의 국회는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Christian” stance]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미국이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퇴폐 국가가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도덕은 “남부”로 내려 갔습니다. 어제 내가 “아메리카[America]”는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나라는 ‘타락의 국가[state of degradation]’가 되었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명 미국인들 목록 가운데, 어떤 목록에서든 처음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비엔나 태생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여야 할 것인데, [하톤: 잘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이 글은 1951년에 쓰여졌으며,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고위직에서의 조작과 대체는 끝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는 20세기 중반, “청교도주의 혈통”이 유지되던 자리를 ‘빛나는 하버드 대학의 광채와 상징’으로 대체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버드 법대 교수직을 그만둔 후, 프랑크푸르터 박사는 대법관이 되었으며, 법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걸쳐서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이 나라의 국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전 분야 걸쳐서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카톨릭 월드지[The Catholic World] 편집장인 존 P. 시어린 목사[Rev. John P. Sheerin]는, “나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가 다른 누구보다도 워싱턴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썼으며, 시카고 트리뷴[The Chicago Tribune]지를 소유한, 장로교파의 로버트 R. 맥코믹 대령[Robert R. McCormick] 역시 유사한 견해를 표명했다. 사실상,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미국의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언급된다. “당신은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사진을 보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이후, 프랑크푸르터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유머”이기도 하다.[하톤: 일종의 빌러리[Billaries] 같은 것인가요?(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영향력을 의미--역주)]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참모로서만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전략적 지위에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들을 지명하는 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위 말하는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Frankfurter’s boys]”에는, 날씨가 좋으면 항상 같이 산책을 하곤 했던 애치슨[Mr. Acheson]을 포함하여 ; 앨저 히스[Alger Hiss](1904-1996, 변호사, 1933-1946년간 미 법무부, 국무부 등에서 근무, 1948년 소련 스파이로 판명--역주) ; 리 프레스먼[Lee Pressman](1906-1969, 노동 변호사, 1933-1936년간 미 농무부, 공공산업진흥국, 중재위원회 등에서 근무--역주) ; 장기간 트루먼 대통령의 고위 참모로 일했던 데이비드 닐스[David Niles](1988-1952, 1942-1951년간 루즈벨트 정부와 트루먼 정부에서 연달아 정치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국무부 참모로 일했던 벤자민 V. 코헨[Benjamin V. Cohen](1894-1983, 1933년 뉴딜정책 시행 시기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정부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데이비드 릴리엔탈[David Lilienthal](1899-1981, 테네시 개발 기구[Tennessee Valley Authority](1941-46)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1946-50) 위원장--역주) ;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1895-1989, 국방차관보(1941-45), 세계은행 총재(1947-49) 등 역임--역주) ; 조 라우[Joe Rauh](1911-1992, 미국 인권변호사--역주) ; 나탄 마르골드[Nathan Margold](연대미상, 변호사, 루즈벨트 정부 시절 내무부 법무 참모--역주) ; 앨저 히스의 동생이자 “현재 애치슨 법률 회사 간부[now a member of the Acheson law firm]”로 있는 도날드 히스[Donald Hiss](1906-1999, 1936-1945년간 국무부에서 근무--역주) ; 밀턴 카츠[Milton Katz](1907-1995, 1940-78년간 하버드 법대 교수--역주) ; 그리고 전직 국방장관이자 “100% 프랑크푸르터의 사람”인 로버트 패터슨[Robert Patterson](1891-1952, 1945-1947년간 미 국방장관 역임--역주) 등이 있었다.(이 단락에서 인용된 모든 인물들은 드루 피어슨[Drew Pearson](1897-1969, 미국 저널리스트--역주)의 칼럼(1950년 2월 1일자)에서 따온 것이다.)

    막강한 힘을 누렸던 정부 관료 중에는 러시아 태생의 이사도르 루빈[Isador Lubin](1896-1978, 경제학자, 대통령 경제정책 보좌관--역주)도 있었는데,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계 수치 해석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종종 그를 부르곤 했다.(“루브에게 보내[Send for Lube]”에서 인용) ; 이어서 그는 UN에서 미국을 대표하기도 했다. 또 한 명의 러시아 태생 관료였던 레오 파스볼스키[Leo Pasvolsky](1893-1953, 경제학자, 국무부 근무, 전후 계획 입안, UN 헌장 초안 작성 등에 중요 역할 담당--역주)는 국무부에서 장기간 요직을 두루 맡았는데, 1944년에는 “전후 프로그램 위원회, 집행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5-46년간에는 “국제 기구와 안보 문제”를 담당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던 다른 인물들 가운데는 사무엘 로젠먼[Samuel Rosenman](1896-73, 변호사, 판사, 민주당 정치인--역주)도 있었는데, 그는 “특별 참모”로 여러 차례에 걸쳐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는 재무장관으로서 악명높은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독일 산업의 잠재력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이었으나 미실현--역주)의 입안자였다. 허버트 레만[Herbert Lehman](1878-1963, 민주당 정치인, 뉴욕주지사(1933-1942)--역주)은 1943년에서 1946년간 UN 구제부흥국(UNRRA)[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사무총장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조달되었던 기금(주로 미국으로부터 조달되었다.)의 대부분은,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결과에 따라 이내 소련 위성국이 되고 말 국가들을 돕는데 전용되었다.

    최근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내 전략적 직위들은 동유럽 출신 인물들, 또는 이들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조하는 인물들이 차지해 왔는데, 대개 각 부처 차관보급[Assistant Secretaryships] 인사들이 그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국방성, 법무부(관세청과 법무차관 사무실), 노동부의 민감 직위들에는 현재 이들이 재직 중에 있다. 주지사급 직위도 이들의 중요한 전진기지인데, 특히 알래스카(러시아로부터 3마일 떨어져 있다.)와 버진 제도[virgin Islands](파나마 운하가 근접해 있다.)(총독 관할--역주)가 그러하다. 기타 미 대통령 행정부[the 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주요 직위들 ; 국제 무역 및 지원 기구내 직위들 ;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직 ; 그리고 UN내 미 대표단 전체를 망라한 직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의 수는, 미국내 그들의 전체적인 인구 구성비에 비교해 봤을 때, 우리 정부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임명직 직위’에 있어서, 그 비율이 깜짝 놀랄 만큼 높다. 반면, ‘선출직 직위’에 있어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 구성비에 비추어 봤을 때, 깜짝 놀랄 만큼 낮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미국내 전략적 직위에 있어서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이 높은 비율로 ‘임명’되어 있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통제력이, 어떤 통제적 의지[controlling WILL]가 여기 반영되어 있는 것인가?

    [인용의 끝: John Beaty]

    하톤: 그렇습니다. 이 글은 깁니다. 그러나 국민들이여. 당신들 전체의 생존이, 지금껏 당신들의 정부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정부는 지금, 새로운 미국 헌법[New States Constitution](피닉스 저널 제 15권 참조--역주)을 통해, 그리고 UN 단일 세계 질서[the United Nations One World Order]를 통해, 당신들을 완전히 통제하려 드는 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생존”을 위해 남겨져 있는 유일한 것은, 이제 당신들의 ‘결정’일 뿐입니다.--헛간의 문은 이미 잠겼습니다. 가축들은 달아났고 당신들만 남았으며, 이제 헛간은 불타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옳은 길을 가십시오. 그리고 준비되어 있기 바랍니다!

    Salu.


    피닉스 저널 제 78권, “The Iron Trap Around America” 제 2장, pp.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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