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장미...?


이제 나는, 지금껏 내가 계속해서 ‘하자르[Khazar]’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당신들이 주목해 봐 주었으면 합니다.—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상 이 글 안에서는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이.수.가 왔던 시기에, ‘하자르인들(정확히 이 명칭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유럽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당신들이 짚고 넘어가야 될 사항이 있다면, “하(카)자르[KHAZAR]”는 그 의미상, “가즈[gaz]” 혹은 “돌아다니다[to wander]”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자면, “유목민들[nomads]”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두고, ‘하자르인들’이라고 지칭하는, 그 첫번째의 실제적인 언급은 “제카리아 렉터[Zacharia Rhector]”의 ‘시리아 연대기[Syrian chronicle]’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6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꾸만 ‘하자르’라고 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나는 바로, 이 하자르인들의 “문화[culture]”가 이미 그들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이 “그리스도[Christ]”라고 부르거나 받아들이는 자가 오기 이전부터도, 그들의 이 “문화”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이 이야기 속의 ‘그들’이 뭐라고 불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Canaaites]—저주받은 카인의 후예들[descendents of Cai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르면,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혼선만이 생기기에, 다른 주제로 빗나가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당신들의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바리새인들[Pharisees]’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다만, 당신들이 명확히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하자르인들[Khazars]’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이 소위 “유태인들[Jews]”이라고 ‘자처하는[self-styled]’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수.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바울)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그의 ‘정신(영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crucifying the spirit]’이었습니다. 니체[Nietzsche]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니체의 저서, 1888년작.—역주)에서 바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유태인 사제로서의 본능은, 역사를 향해, ‘그 동일한 전문가다운 범죄’를 한 번 더 수행하게 만들었다.—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어제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유산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기독교사’의 출발점을 만들어 냈다. 이 복음 전도사(바울, 타르소의 사울[Paul, Saul of Tarsus])가 증오 앞에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실상, 구세주의 모습 너머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십자가’ 위에 못박았던 셈이다.” (이.수.가 남긴) ‘정신’이라는 측면에 있어서[In spirit], 이.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제리 팔웰[Jerry Falwell](그는, “나는 내가 시오니스트[Zionist]임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자르/엘리트[KHAZAR/ELITIST]입니다.)과 같은 저명 인사들은, 오늘날의 조작된 대중들로 하여금, 그 위에 더 많은 못을 박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종한” 바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 이야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 각지에 교회 ‘분점들’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수.가 남긴 ‘진술’이 갖는, 분명하고도 위엄있는 웅변의 가치를 알아 봤고, 또 이를 잘 이해했습니다.그들은 이것이 소크라테스[Socrates]가 남긴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극적인 영향력[dramatic impact]’에 있어서도, ‘의미의 명확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더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 일구어 왔던 ‘개인 주권 문화’를 새롭게 중흥시키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문화의 씨앗을 새롭게 파종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두가지 다른 이야기(해석)들 간에는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논의들, 반대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들, 화해할 수 없는 자와 화해하려는 시도들, 이런 모든 양상들은 엄청난 수준의 언어 폭력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백 년이 지났을 때, 이미 백 개도 넘는 기독교 교파들이 생겨났고, 저마다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언어 폭력들은 교리의 명분을 얻어 내기 위한 준비 작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수용한다는 건, 대중 조작 문화를 수용하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Roman Emperor Constantine](274-337, 콘스탄티누스 1세—역주)은 “예수”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 ‘충돌의 쓰레기장’ 속에서, ‘대중 조작의 잠재력[the potential for mass manipulation]’을 알아 봤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깐만 내 역사담당 (자료검색) 업무를 맡고 있는 노라[Nora]에게 묻고 싶습니다.—내 설명들이 괜찮은 것 같습니까? 내가 사건들의 선후 관계를 나열함에 있어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보조해 주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나 하톤은 큰 빚을 지고 있군요. 나는 당신들의 역사가 지루하고, 또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만, 어쨌거나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A.D. 314년, 황제는, 저마다의 가르침들을 검토해 보기 위해서, 다양한 “기독교” 분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A.D. 325년, 이어지는 회의에서, 그는 ‘공인용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몇몇 교리들의 추종자들을 선발했습니다.—이는, 그들이 나머지 교파들을 흡수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통과권


기본적으로 “공인 기독교[official Christianity]”라는 것은, 한 로마 황제가, 유순하면서도, 교리를 이용하여 통제하기 쉬운 백성들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적그리스도 도살자[the anti-Christ butcher]’에 의해 꾸며지고, 완전히 거꾸로 왜곡된 예수 이야기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 사이에 펼쳐지는, ‘생사가 걸린 대립’에 관한, ‘가장 웅변적인 진술’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수.의 ‘뜻깊고도 웅변적인 진술’은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했던 것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던 그 진술’에 대해서 잘 아는, “공인 기독교”의 사제들은, 이를 ‘여권’ 삼아, 북유럽, 개인 주권 문화가 지켜지는 땅에 진출 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 ‘극적인 진술’은, 자기 자신들의 문화를 지탱해 주는 것이자,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한 영웅적인 개인이, 자신들의 땅에서도 아닌 외국의 땅에서 이뤄낸 것이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는 ‘진술’이었습니다. 이 진술이 갖는 웅변성은 ‘개인적 영웅주의[individual heroism]’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개인적 영웅주의’는, 그것이 어느 땅에서 펼쳐지는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사제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감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용’(혹은, 이.수.가 공명정대하지 못한 하자르인들을 부를 때 쓴 표현인 ‘뱀’도 될 것입니다.)에 맞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뱀 혹은 용에 치명적인 대치를 이루는 ‘개인 주권’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러한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가공되지 않은 진솔한 예수의 이야기는 ‘여권’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통과권을 얻어 낸 다음, 이 사제들은 서서히, 이.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에 입각한 기독주의를, 바울의 적그리스도적 “기독주의”라는 혼동스러운 오물로 슬그머니 바꿔치기 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후엔, ‘원시 대중 조작 문화’ 전파를 위한 하자르의 공식화된 교리를 조금씩 조금씩 더 주입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북유럽인들은, 비록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의도적으로 길러졌고, 또 그 문화를 위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들 자신들의 손으로, 수백만에 수백만을 더한 자신들의 동포들에 대한 학살행위들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은 소위 말하는,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가 “동전의 앞면”에 등장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혼동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조작된 전투’는 너무나 많은 단면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 내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똑같은 전투는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서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로 하여금 그 동일한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을 파멸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는 요인은, 지금도 여전히 그 똑같은 ‘양면 동전’인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혼돈과 파괴를 조장하여,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혼동스러운 오물’이 건네진 후, 억지로 떠먹여지는 상황을 두고, 로마의 우두머리 조작자들에 대항했습니다. 교묘히 북유럽인들에게 주입되었던 이것, 이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외부적 요소’를 도처에서 토해 내려고 하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루터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칭 유태인들, 바로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자들의 ‘공식화된 원시적 교리[the formalized primitive dogma]’일 뿐만 아니라, 그 동일한 ‘기독교 동전’의 다른 한 쪽 면은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 자신들에게 ‘훌륭한 여권’으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환멸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었던, ‘이 새롭고도 영리한 속임수’에 대해,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부러운 눈으로 감탄해마지 않았었는데, 교회가 반대되는 문화권에 속한 자들을 제거할 때 썼던 이 방식은, 바로 유태인들 자신들의 대중 조작 방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형상’대로 만들어 내었던 이 반자연의 “신”[the anti-Nature “god”]을 다시금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은 가톨릭 교회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톨릭 교회가, 자부심 높고, 역량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는 북유럽인들을 상대로 얻어낸 권력을 빼앗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이 “하자르의 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듦으로써 그렇게 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사자의 먹이’ 주위로 몰려들어 배를 채우는 재칼들[jackals]과도 같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였고, 또 이렇게 뚜렷이 식별되는 행태를 가진 유태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개인과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길 원하는 ‘개인(주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조작자들은 끊임없이 힘을 그러 모으고, 패거리를 만들어 당신들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하지만 당신들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은 최고의 ‘우두머리 조작자[head manipulator]’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당신들로 하여금, 행동과 변화를 취할 시간을 벌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인간[MAN]’이 자신의 “이성[REASON]”을 되찾는 한, ‘그’는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던 건, 바로 ‘그 인간 개인[THAT INDIVIDUAL MAN]’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28권, “OPERATION SHANSTORM : Counter Attack From Behind The Feathered Curtain”, 제 12-14장, pp. 1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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