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8권, 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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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028권, 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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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언어의 한계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언뜻 그 제목이 주는 첫인상보다, 훨씬 더 “이 저널 본연의 주제로 되돌아 가는” 내용이 되리라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의미있는 이해 속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각자각자가 저마다의 의도를 가진 단일 개체들로서 원활히 기능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상호간의 이해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 머무는 것은, 명백히 우리의 적들이 의도하는 공격 양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를 곧잘 속이며, 성스러운 영혼[Holy Spirit]의 신성한 하나님[Divine God]의 뜻에 반하는 것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입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이에 대해, 완벽하게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릴 필요성에 관한 좋은 예가 한가지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명백하게[EXPLICITLY]’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한은, 그 용어 자체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뜻에 대한 용어인지, 하는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의 영혼에 반하는 자들[the anti-Lighted Spirit]의 공격 양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하나의 주어진 용어에 대해서, “그들 간의” 사용에 있어서만, 단일의 명백한 정의를 갖는 것입니다.?반면 모든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쉽사리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종종 정반대되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상태를 방치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위대한 영혼(정령)[the Great Spirit]’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God]’, ‘빛의 하나님[Lighted God]’, ‘신성한 하나님[Holy God]’, ‘진실[Truth]’, ‘와칸 탕카[Wakan Tanka]’, ‘위대한 백색 (빛의) 영혼(정령)[Great White (lighted) Spirit]’, 기타 등등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난다[Sananda]”라고 말할 때, 이는 ‘그리스도적인 경험[Christed experience]’을 통해, ‘하나님 속에서의 경험, 혹은 하나님으로서의 경험[experiences as/whthin God]’을 체험하며, ‘성취되는 완벽함[achieved perfection]’에 대해 붙이는 ‘명칭[label]’으로서, ‘창백한 예언자[Pale Prophet]’, ‘이.수.[Esu]’, ‘이사[Isa]’, ‘이이사[Iisa]’, ‘서있는 곰[Standing Bear]’, ‘예수[Jesus]’, ‘나사렛 사람[The Nazarean]’,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의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특정 용어’에 대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굳이 더 들지 않더라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호한[IMPLICIT]” 상태에서 작업하기를 반드시 멈춰야만 하며, 항상 “명백함[EXPILCITNESS]”을 갖고서 처신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호한[IMPLICIT] : 암시적인; 추정적인; 표현되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가는 관련된 어떤 것, 혹은 추론을 수반하거나, 이를 유도하는.

    명백한[EXPlCIT] : 모호함과 불분명함이 없는; 완전히 개진되거나 형성된; 표현에 있어서 유보적이거나 애매하지 않은; ‘모호한’에 반대되는.

    정확한 의사소통은 정확하고 명백한 표현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간의 이해


    의사소통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가진, 이 우주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들에 의해 명백히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각 개인들이 보유한 ‘타고난 가치판단[Inborn value judgments]’은, 이 ‘유형의 실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선별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유형의 실체들’과 ‘타고난 가치판단’이 결합될 때, ‘자연의 우주적 언어[the universal language of Nature]’가 형성됩니다. 그리고/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력을 가진 창조적 지성체[comprehensive creative intelligence]’는 자연과 공존할 수 있게 되며, 또는,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말로 된 언어들[word languages]’을 창조합니다. 서구 세계에 있어서, 이 ‘말로 된 언어들’은 종종 육체와 영혼 사이를 구별 짓고, 또 사람들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을 구별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다른 한편,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을 공히 아울러, 이들 모두에게는, 범신론[pantheism]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널리 퍼져있는 사고 패턴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을 하나로 보는 관점입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을 구별하는 사고 패턴과 구별하지 않는 사고 패턴, 이 두 패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 또, 이 두가지 사고 패턴들 간의 차이점에만 너무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통상적인 사고패턴들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속임수와 오도를 야기하는 이러한 사고패턴들을 통해서 ‘조작된 것들’을 식별해 낼 수 있을만한 역량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창조되어 온, 혹은 창조될 수 있는, 모든 ‘말로 된 언어들’은 조악한[crude] 것들로, ‘자연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s God]’를 대체함에 있어서 혼동을 야기합니다. 만약 누군가, ‘자연의 신[Nature’s God]’도, 의사소통 상에 혼동을 야기하는, 이 조악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단언한다면, 그 자는 다른 사람들을 세뇌시키려고 애쓰는 자이거나, 혹은 이미 세뇌된 자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말로만 이루어지는 의사소통[communication in words]’이, 완전하고 종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합니다. 지각력을 가진 어떠한 인간도, 경우에 따라, 말(글)로 하는 의사소통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떠한 ‘사회적 동의[social agreement]’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이란, ‘자연의 언어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가치 판단과 힘(의도), 의지를 수반하는 것)가 취해져야만 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변경시킬 때, 그리고 ‘문화들[cultures]’을 창조해 낼 때, ‘자연의 언어와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오도된 다양성들[misled multitudes]’, 그 중 예를 들자면 하자르[the Khazar]라 이름 붙여진 특정 문화적 양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해당 문화의 구체화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광범위한 측면에 걸친 “문화들[cultures]”에 반드시 초점을 맞춰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들”은 ‘유기적 개체들’이 살아남도록 고무하거나, 혹은 살아남는 것을 허락하는 데에 있어서, 선택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의지적 행위들[will-actions]’입니다. ‘옥수수의 문화[the culture of corn]’는 옥수수의 생장에 알맞은 조건들을 만드는 일을 수반하며, 그들의 생장을 방해하는 다른 유기적 개체들을 파괴시킵니다. (‘옥수수의 문화’라는 표현에 있어서, ‘문화[culture]’의 의미는 ‘재배, 양식, 사육’의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화’라는 단어와 여기서의 ‘재배, 양식, 사육’이라는 뜻의 ‘문화’가 궁극적으로 ‘의지적 행위들’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공통의 맥락을 형성함?역주) ‘인간 의지[Human will]’는 옥수수의 문화, 콩의 문화, 튤립의 문화, 돼지의 문화, 염소의 문화, 양의 문화, 젖소의 문화, 식용 육우의 문화, 노동력 제공용 말들의 문화, 경주마들의 문화, 기타 등등의 것들을 창조해 왔습니다. ‘문화들’은 인간 역사의 주요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대개, 똑바로 지적하거나,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두 가지 문화들이 존재하는데, ‘이해 부족’으로 인해 그러기도 하고, 혹은 한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목적들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루기를 회피’하기에 그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문화들 모두는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human cultures of humans]’(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들의 ‘인간 재배, 사육 방식들’?역주)입니다. 이 두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이 이 글의 기본 주제입니다.


    원시 문화


    최초의, 혹은 가장 원시적인 ‘인간들의 인간 문화’는 사람들이 사냥과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구해 살아나가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원시 문화는 여전히, 활발히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화는 당신들에게 심각한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문화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이 제시하는, 명백한 ‘장범위 방향성[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은, 단일 세포들에서부터 인간들에 이르기까지 다 적용되는 것으로, 생존에 가장 인지적(자각적)이고[perceptive], 가장 적격인 방식을 선택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시 문화는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잘못 사용되는(오류를 수반하는) 인간의 말들(언어들)[falsely used human words]’이 그 도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이 첫번째 인간 문화는, 지도자들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자들이, 상징적인 지도자를 만들어 내고, 또 자신들이 이 상징적인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여,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을 띠는 것은 모두 ‘하나의 단일 문화’이지만, 그 상징적인 지도자는 여러가지의 모습들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널리 존경받던 죽은 지도자의 “귀신”이 그러한 상징적인 지도자에 부합하는 첫번째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된 역사가 처음으로 남겨지던 무렵, 하나의 돌 “신”[a stone “god”], 혹은 보이지 않는 “신”[an invisible “god”]이, 서구 사회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그와 같은 대상이었습니다. 대변인들은, ‘인간의 말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대상을 일컫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제기하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manipulating the people]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한 명의 “대변인”이, 혼동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로 구성된,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조작된 무리[the manipulated group]’를 이용하여, 자신의 말들(언변들)[words]을 통해 꾸며온 ‘허위’를 알아차리게 되거나 혹은 이에 반대하는 ‘개인들’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무리를 조작하는 힘[manipulating group force]’을 이용하여, 그는 자신보다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정직하고, 더 역량있는 개개인들을 철저히 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제들[priests]”이라고 불렸던 ‘조수들’은 말들로 꾸며진, 이 허위를 잘 떠받들던 자들로서, 이들은 이러한 문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는 업무를 맡도록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작에 취약한 더 많은 대중을 양산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상상의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던 이 사제들은, 그들이 말로 만들어 낸 허위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종속적이고, 어리석은 자들을 상대로, ‘성관계’에 대해서도 “권위적인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조작된 무리’를 이용하여, 대중 조작꾼들인 자신들이 만들어 낸 표현 가운데, “권위”라고 불리는 것에 복종하길 거부할 만큼, 충분히 강하고, 자부심이 높은 개인들, 말하자면, 역량있고, 분별력이 있는 개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권위”를 거부하는 자들이, 함부로 “공인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막아 나섰던 것입니다.

    언어로 된 기록물을 남긴 역사가들[word historians]’이 처음으로 당시의 사건들을 전하게 되었을 무렵, 그 같은 기록사에 등장하는 인간 종들의 상당 부분은 명백히 이처럼 자연에 반하는 문화 속에서 길러진 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미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퇴보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 사가들은 대개 “사람들이 ‘조작된 대중’의 모습으로 퇴보되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은, “인류가 문명을 창조했다”는 다분히 찬양적인 문구를 사용합니다. 사제들이나 마찬가지로, 많은 “역사가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에 대한 인식’을 흐리는 말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역사는, 그 기록들이 ‘유형적인 실체들’로 남아 있는 역사입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고, 뚜렷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즉 명백한[EXPLICIT] 기록들입니다. 인간들이 계속해서,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 속을 살아 나아가는 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기록사에서 늘, 자연에 의해 설정된 진화 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조직체들[living organisms]’에 관한 언급들만을 발견하게 될 따름입니다.

    이러한 지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당신들은 레밍쥐나 양이나 기타 다른 포유류들도 분명히 그룹을 지향해 나아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포유류들 가운데에서도 인간들만큼이나 이렇게 ‘대중 조직체[mass organisms]’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멀리까지 진화해 온 동물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대중과 유리된 채, 개개인들이 생존해 나가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조작된 대중은, 지구 위의 생존 공간 상에 존재하는 모든 평방 피트들을 다 구획짓고, 그 각각의 구획된 영역들이, 이 조작된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할당된 공간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어떤 다른 포유류들 가운데서도 인간들만큼 이렇게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멀리 나아간 동물들은 없지만, 몇몇 곤충들 가운데서는 인간들과 같은 방향을 따라 진화해 온 예들이 있습니다.?개미들, 흰개미들, 그리고 벌들 가운데 몇몇 종류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기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곤충들은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자율적인 성적 개체들[autonomous sexual entities]’의 상태에서 ‘무성의 그룹 조직체[asexual group organism] 안에서 마치 단일 세포와도 같은 기능만은 지닌 개체들’의 상태로 퇴보해[regressed] 온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 ‘군집을 이룬 조직체[the group organism]’만이 ‘의지를 가진 하나의 실체[an entity having will]’로서의 기능을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곤충들은, 처음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말들[words]’을 이용하여 행한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관계 정립을, ‘성적 유인을 이끄는 냄새들[sex odors]’을 이용하여 행했습니다. 모든 인간 종들은 대중 조작자들에 의해 활발히 고무되는 퇴보적 진화를 거듭해 왔으며, 오늘날, 대단히 위험하게도 그 “완성 단계”에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
    Last edited by wave; 2009-07-31 at 23:37. Reason: 분류 추가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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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문화[The corrective culture]


    처음으로 역사가 기록될 당시 남겨진 기록들 가운데 어떤 기록들에 대해서는, 이를 없애버리기 위한 노력이 무수히도 많았지만,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것들(심각하게 훼손되고 짜집기 된 상태이긴 하지만)이 있는데, 이에 따르자면, 당시, 어떤 사람들은 인간 종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알아 차렸었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강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인식 역량을 의도적으로 낮은 수준에 묶어 둔 채, 이들을 계속적으로 ‘재교육’시켜, 구속적인 양상 속으로 몰아가려는 정황들을 깨닫게 된 몇몇 분별력을 갖춘 인간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 자들은 바로 북유럽인들[the Northern Europeans]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혹은 누구의 땅도 아닌 땅)[a no-man’s land]’이 될 수 있도록 유지시키는 일을 통해, 자신들의 격리상태를 보호해 왔으며, 또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원시 문화’와 정반대의 대척점을 이루는 문화를 일구어 왔던 것입니다.

    이들 분별력을 가졌던 자들이 이해하게 되었던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하나의 문화는 단순히 ‘말들’을 가지고서 이에 대응하여 다투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의 문화는 또 다른 문화를 통해서만 맞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하! 이제야말로 우리는 먼 옛날 있었던 일들 가운데 반짝거리는 빛을 냈던 무언가를 보기 시작하게 되는군요. 이제야말로 우리는, 현재 당신들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당신들을 이끌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또 누구에 의해 당신들이 조작되어 온 것인지를 알아 보기 시작하게 되는군요.

    자연의 신[Nature’s God]’은 조악한 인간의 언어들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연의 신의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그 언어’ 속에서 행해진 ‘진술[a statement]’과 같은 것입니다. 문화는 ‘탄생과 죽음[birth and death]’의 문제를 개별적인 잣대를 가지고서 다룹니다. 비양심적인 조작자들이, 그들의 ‘인간들의 인간 문화’[their human culture of humans]를 만들어 낼 때, 그들은 자연의 언어 속에서, 자연의 신에 의해 설정된 방향에, 반대되는 쪽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교정 문화[the corrective culture]’는 의도적이면서도 분명하게, 그리고 능동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원시 반-자연 문화[the primitive anti-Nature culture]’에 명백히 반대되는 방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문화들은 영구적으로 상호간에 양립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교정적인 ‘인간들의 인간 문화’[the corrective human culture of humans]는 분별력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그룹에서, 그들간의 동의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양성해 내는 일을 막아내고, 또 이러한 행위을 일삼는 조작자들을 축출하는 문화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 문화는 충분히 훌륭한 문화였던 것입니다.

    격리된 북유럽인들이 만들어 낸 이 새로운 문화 역시, 효과적인 문화를 만드는 두가지 요소, 즉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교정 문화의 기본적인 개념과 행위 원칙들은, 두 가지 아주 단순한 내용들이었습니다.

    1. 자녀를 갖는 것은 개인의 결정 사항이었습니다.분별력을 갖춘 여자는, 분별력을 지닌 자신의 성관계 상대방을 고를 수 있었고, 역시 분별력을 갖춘 자녀들을 낳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대중 조작자들이 주창하는 생식 방식들(대중 조작자들은 자신들이 성관계를 “통제”할 권한을 가졌다고 부당하게 주장하며, 그들의 “권위” 아래 허용되지 않는 성관계를 금지시켰던 것입니다.)에 반대하여, 북유럽인들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는 점에 동의하였고, 그녀가 누구의 아이를 가질 것인지는 오직 그녀만의 배타적인 권리로 보았던 것입니다.—한 개인으로서의 권리. 어느 누구도 무력이나 강요로 그녀와 성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의 아버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있어서 사회적 동의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진 자들은, ‘자연’의 ‘무형의 부분[the intangible portion]’에 대해, 그리고 각 개인에게 내재해 있는 ‘자연의 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무형의 부분’에 대해, 말로 만들어진 “권위”[any word-invented “authority”]를 행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가치적 판단들은, 그 자 안에 있는 신(하나님)[the God within]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여자들에게 있어서, 누가 자신의 자녀들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 대단히 중요한 가치 판단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간섭도 허용될 수 없다고 하는 사회적 동의는, 결국 사람들이 각각의 여자들을 저마다 한 명의 ‘여신[goddess]’과도 같은 존재로서 우러러 보는 풍토를 효과적으로 조성해 냈습니다.

    2. 죽음을 다루는 문제 역시 개인적인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조작된 대중을 이용하여 개인들을 유린하는 일’을 막아내는 것이, 이들에겐 중요한 문화적인 양식이었습니다. 각 개인들은 저마다의 특권의 하나로서, 마찰을 빚는 상대방과, 공식적이고도 사회적으로 인정된, 일대일의 “공정한 결투[fair fight]”를 펼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무분별한 선동가들은 축출될 수 있었습니다. 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결투에 대해서는 ‘완전한 사회적 동의[full social approval]’가 형성되었던 반면, 어떠한 단체라고 할지라도, 특정 단체가 “단체의 의지[group will]”를 개인들 위에 강요하는 일은 ‘완전한 사회적 배척[full social rejection]’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인들을 상대로 단체가 조직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오직 개개인들이 동의했을 경우라고 하는,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이 엄격하게 제한적인 범위 바깥의 사안에 있어서는, 각 개인들이 일대일의 개별적인 결투를 요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는, 이를 지지해 주는 완전한 사회적 동의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에 대하여, ‘자연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 문화는, 분별력이 떨어지는 ‘좀비와 같은 인간들[zombie-like humans]’을 양산해 내고, 또 말로서(화술로서) 좀비들을 조작하는 비양심적인 선동가들을 양산해 해는, ‘원시 문화’를 효과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었습니다. (저런, 당신들은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새로운 문화는, 모든 개개인들이 동등한 주권을 가졌다는 주장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펼쳐 왔으며, 원시 문화의 존재 이전에, 자연이 항상 설정해 두었던 바 그대로, ‘자연의 선택 방향[the direction fo Nature’s selection]’을 향해 실질적인 가속 페달을 밟아 나왔던 것입니다.

    기록된 역사가 남겨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 새로운 문화는, 벌써 그 이전서부터, 이 격리된 북유럽인들을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종류의 사람들로 양성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을 더욱 북돋아 나갔습니다. 어떠한 ‘조작된 대중’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북유럽인들만의 보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no-man’s land]’ 안으로 침범해 들어와, 북유럽인들을 그들의 세력 안에 흡수하려고 들면, 이들은 ‘잠재적인 대중 조직체[a potential mass organism]’로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변모해 나가는 단체로서의 객체[the evolving group entity]’는 “용[dragon]”이라고 불렸습니다. 용을 베어 쓰러뜨린 위대한 영웅들에 대한 무용담은, 이 문화권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노래 속에서 늘 기억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용[dragon]”, 그리고 “용과 같은 괴물[dragon beast]”이라는 표현들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바로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


    이 두가지 반대되는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을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표현들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 조작된 대중 문화[The culture of manipulated masses]와 개인 주권 문화[The culture of individual sovereignty].

    양쪽 모두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 단순히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각자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 볼 것 같으면, 이에 대한 선택은, 두가지 문화의 산물들인 각 ‘개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 1) 조작된 대중 문화는 분별력이 결여된 인간형 그리고/또는 ‘의도적인 거짓’에 친화적인 인간형을 낳습니다. 또 이 문화는 한 명의 똑똑한 조작자[manipulator]가 만들어 내는 속임수와 같은 것들에, 강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한편, 2) 개인 주권 문화는 지각(분별)력[perception]과 통합성[integrity]을 지닌 자들을 낳고, 조작자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 두가지 문화들은 ‘30억년도 넘은 자연의 오래된 판단 기준[Nature’s three billion year old criteria]’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이것은 바로, “자연과 자연의 신(빛의 위대한 영혼[Great Spirit of Light], 신성한 하나님[Holy God], 그리고 창조[the Creation])의 도덕성[the morality of Nature and Nature’s God]”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작된 대중들이, 개인들을 상대로 역전불가능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러한 대중들은 점차적으로 유일한 ‘조직체들’이 되어갈 뿐이며, 이 조직체들만이 ‘유효한 의지[effective will]’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들은 ‘무성의 조직체들[asexual organisms]’로서 기능합니다. ; 반면, 개인들은 해당 조직체의 구성 세포들로서 기능합니다. ; 그렇게 될 때, 진화는 역방향으로 6억년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선택적 생존[Nature’s selective survival]’ 대상이,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에게서, 이 ‘새로운 대중 조직체들’에게로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이 ‘새로운 조직체들’ 간의 전면적인 전쟁 상태가 영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개인들이 주권을 보유한 채로 남아 있게 될 때, 자연의 초점[Nature’s focus]도 개인들에게 맞춰집니다. ‘자연의 선택적 생존’은 계속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적용되며, 이 경우 퇴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장은 보다 나은 발전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명백한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에 비추어 볼 때, 인간 종들은, 최초의 원시 인간 문화보다 훨씬 더 퇴보한 형태라 할 수 있는, 완전한 ‘조직체적 진화[organic evolution]’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 주권’에 대한 ‘사회적 승인[social approval]’은, ‘자연의 도덕성[nature’s morality]’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판단 기준을 통해 볼 때, 선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간들은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배척할 것인가?나는 당신들이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이 글에서 제기되는 관점, 그리고 당신들로부터 여태 감춰져 온 “비밀들”의 공개 내역을 되짚어 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숙고해 보십시오.


    문화 충돌의 장[The field for Cultural Conflict]


    이제 일반화된 설명을 벗어나, 이러한 두 문화들의 주창자들 간의 실제적인 충돌 양상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대중 조작자들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정부들과 언론매체들, 그리고 교육 시스템들에 대한 통제력을 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혼동스러운 역사 버전[their confusing version of history]’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압도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이리저리 난도질당하고 파편화된 것이긴 해도, 중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재구성해 볼 수 있을 만큼의 (내 조사원들의 도움을 굳이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역사의 조각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두 문화권 사람들 간의 주요 전투들은, 유럽에서, 지중해 연안에서, 그리고 서반구의 각지에서, 발생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발생하고 있습니다.—이 지역들은, 조작된 대중 문화의 완전한 침투와 그로 인한 ‘조직체들’ 형성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동양인들은, 오늘날 서구 세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조작된 대중 문화’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에서만 살아 왔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험해 온 것과 같은, 두 문화들 간의 충돌에 개입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경우, 이들 사이에서도 이 두 문화간 충돌 양상이 점차 뚜렷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동양인들은, 비록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조금씩 더 드러나 보이긴 해도, 현재 그러한 충돌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과거에 그러한 충돌 양상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분명코 그들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 존재하는 조작된 대중 문화 이외의 다른 형태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거의 발견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 충돌 양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러시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몇몇 예민한 자들이 고개를 내밀어 ‘이 커피 타는 냄새’를 맡기 시작하긴 했지만, 대체로 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존재하며, 생물학적으로 양쪽이 혼합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하자르, 언어 왜곡자들의 수완[the Khazarian shroud of word twisters]’ 아래, 커다란 영향을 받아 온 곳입니다. 하나의 정부로서 소련 정부 역시, 너무나도 뚜렷한, ‘조작된 대중 문화’를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현 러시아 문화의 정확한 양상 역시 동일한 기원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즉, 인간 종들에게 치명적으로 위험한 그 동일한 문화, 바로 현재 서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충돌의 한 쪽 축을 형성하고 있는, ‘조작된 대중 문화’인 것입니다. 이 대단히 치명적인 문화 양상이 러시아인들에게 몰려 들어 온 것은, 두 번의 ‘물결’을 통해서였습니다. ‘첫번째 물결’은 10세기 무렵 시작되었으며, ‘두번째 물결’은 12세기 초에 밀려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개인 주권 문화’도 존재했던 적이 없었기에, 두 번의 ‘물결’ 모두 효과적인 토착민들의 저항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양인들과 러시아인들 양쪽 모두는, 자기자신들 내부에서, 개인 주권을 향하고자 하는 충동을 계속적으로 느끼고 있으나, 그들은, 하나의 문화로서, 개인 주권의 경험에 관한 어떠한 의식상의 기억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구의 미국인들은 개인 주권을 경험해 왔기에, 더 이상 그들이 개인 주권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언어 조작자들[word manipulators]이 몇몇 사악한 속임수들을 써서 당신들을 끌어들였기에, 오늘날 당신들은 “그들의” 기만과 환영의 덮개에 가려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가지 문화의 주창자들 간의 전투는 서구 세계[the Western World]에서만 있어 왔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가 형성된 곳이 바로 서구 세계였습니다. 오늘날, 이 문화에 대한 의식적인 주창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도 이 곳입니다. 현재, 이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 역시, 서구 세계입니다.

    서구 세계에는 아직도, 높은 비율의,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양성된 사람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문화를 양성해 내는 의식적인 주창자들은, ‘겨우 꺼지지 않은 희망[the only visible hope]’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가 퇴보적인 곤충들의 길로 나아가는 일을 막아낼 수 있는 가냘픈 희망의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희망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the only visible hope]’에 불과해서,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양성된 많은 자들도, ‘말들[words]’로 인한 혼동 속에 빠진 채로,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충돌을 잘 파악해 내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결심을 하기 이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일단 한 번 지켜보기로 하자”고 말한다면, 그들은 실상, 그들이 “단지 자연의 흐름 속에 사태들의 전개를 맡겨 둔 것”이 아닌 셈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들은 ‘자연의 선택[natural selection]’ 속에 맡겨져 왔습니다. 충돌은 ‘인간 의지[human will]’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 사실상, ‘모든 것들’을 ‘그들의 (반대쪽) 인간의 적들[their human enemies]’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말들로 된 장막[a veil of human words]’은, 분별력을 갖도록 길러진 많은 자들의, 분별력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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