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장을 가리는 구름들


인류의 진보[human progress]라고 불리는 이 혼동스러운 주제는,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이 의미심장한 충돌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제작된 기계 장치들’에 초점을 두게 만들어, 인간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조작된 대중 문화의 대변인들은 이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기계 장치들’을 갖다 놓고, 문명의 수준의 척도인 양 자랑하고, 미국의 학생들에게, 2천년 전 북유럽에는 “야만인들[barbarians]”만이 살고 있었노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 고고학적 발굴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세련된 수준의 제작품들이 개발되었던 것은 유럽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단지 논리적인 역사적 추론을 통해, 북유럽인들은 인공품들[man-made things]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가치 기준을 따라,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 이야기의 초점을 딴 곳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이에 대한 설명에 더 매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전된 역사[the verbal history], 혹은 “신화[mythology]”는 당신들이 사는 곳이 지금껏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왔으며, 완전히 뒤틀려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직, B.C. 60년경,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북유럽인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나, 그의 글에 묘사된 ‘개인 주권 문화’는, 그 보다 앞서, 언급되지 않은 무수한 세기들에 걸쳐 존재해 왔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개인 주권 의식을 가진 자들만을 선별적으로 양성해 내던 이 문화의 정수는, 시저의 침입 시도에서 불구하고, 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the no-man’s land]’ 속에서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일방적인 통행만이 허용되었습니다. 북유럽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땅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격리된 문화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개인 주권을 지지하는 개개인들로서[as individuals], 그들은, ‘잠재적인 대중 조직체들[potential mass organisms]’, 즉 그들이 ‘용들[dragons]’이라고 부르던 대상들과 맞서 싸워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러한 충돌도 그저 통상적인 집단과 집단간의 전쟁, 즉 외부인들인 자신들의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타입의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이, ‘충돌의 본질’을 이루었던 것으로, 당신들이 찾아 볼 수 있는 기록 상에 등장하는 가장 최초의 사례는, 초기 바빌로니아인들[the early Babylonians]과 이란 고원[Iranian plateau]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기록 속에는 오직 그들 간의 충돌의 “외양[color]”에 대한 묘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서, 문화를 축으로 한 사람들 간의 분열 양상이, 북유럽 문화의 중핵을 이루던 개인 주권 문화인들이 다른 곳으로도 퍼져나가서 그렇게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란 대 바빌로니아 간의 투쟁이 그러한 분열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날의 당신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하자르인들[the Khazars]’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을 통해서, 우리는 이 탐구에 있어서 보다 나는 토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가지 문화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당신들은 이 반대되는 문화를 주창하는 자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찾아보고 이를 식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들은 그저 ‘문화의 쓰레기통’을 이리저리 뒤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각이 대척 지점에 있다고 할 만큼 정반대되는 이 두가지 문화들은 결코, 단일의 사람들[one people] 속에서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인간 문화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자연의 포괄적인 (진화) 방향[Nature’s overall direction] 혹은 그 반대 방향.

동시에 두가지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진술이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들’에 관한 한, 오늘날 그러한 진술은 점점 더 분명히 요구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두가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강요된 혼재 상태를 두고, “문화 융합을 통해 달성된 풍요[the richness achieved by mixing cultures]”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언어 도단은 혼동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작의 일환인 것입니다.—자, 그럼 누가 혼동을 야기시키는 달인들일 것 같습니까? ‘문명’의 조각들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혼재로 인해 파괴되어 왔으며, 마치 렌즈가 깨진 만화경[kaleidoscope]을 통해 조각난 상들을 바라다 보는 것처럼, 시야를 흐리게 하는 조각난 단면들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를 ‘문화’라는 잣대만으로 보게 될 때, 문화란 ‘자연 선택에 대한 인간 의지의 투입(반영)[an injection of human will into natural selection]’인 것입니다. 자연 선택은 오직 탄생과 죽음의 문제만을 다룹니다. 인간 의지에 의해 형성된 문화들 역시,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갖게 되는 ‘살과 피’는, 생존을 위해 ‘인간 의지’가 선택한 방식에 따라 얻게 되는 것으로서, ‘자연 선택 상에 투입된(반영된) 문화[injecting cultures into natural selection]’로 인해, “성취되는 풍요(혹은 오염)[richness (or pollution) achieved]”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대중 조작자들[mass manipulators]은 고의로 혼동을 야기시켜,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야를 가리는 구름들’을 꿰뚫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 걸쳐,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과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이 혼재되어 살던 지역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향하는 문화 방향이 반대였기에 이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충돌에 대해서,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 속에서의 통찰력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해 왔습니다. 잘 알려진 역사 학자들 가운데, 슈펭글러[Spengler](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 1880-1936, 독일의 사학자, 철학자. ‘인간과 기술’, ‘서구의 몰락’ 저술—역주) 정도가 가장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긴 했지만, 그 조차도, 이 ‘혼재된 상태[the mixings]’를 두고, 단순히 “문화”라고 지칭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에서의 생을 살아 나가면서, 빈약한 역사 자료들을 근거로, 상당한 지적 추론과 이해를 펼쳐 보였던 이러한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일군의 사람들이 인도로 이동해 갔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도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원시 문화(대중 조작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권 사람들은 이 엄청난 숫자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속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세워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그들의 이상을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는 없었고, 대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기록된 역사가 남겨지기 이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두 문화들 간의 충돌은 말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권의 사람들이 혼재되었던 또 다른 예는 그리스에서 있었는데, 개인 주권 문화의 정수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반대 문화에 젖어 있던 그리스로 흘러 들어 갔을 때,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들 간의 의도적인 분리는, 임의로 사람들을 “시민”과 “노예”로 나누는 작업을 통해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접촉을 가지면서 철저히 섞여 있는 한, 이러한 의도적인 분리는 분명코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었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문화적 사고 패턴을 가진 자들을 “합리적으로” 결합시킨 “과학적인(이상적인) 상태[scientific state]”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결국 “그리스의 황금기[golden age of Greece]”로 불리는 시대가 무너지면서, 함께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조작 문화 속에 길들여진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에게 (그리스적 경험의) “통치술[the science of government]”을 전파해 줄 수 있을만한 제국을 건설해 보려는, 다소 무모한 시도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유형의 문명[a tangible civilization]’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두 가지 혼합 문화 속에서 탄생된 것으로, 잘 익은 과일만큼이나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보다 강건하고 통솔력을 갖췄던 정력적인 몇몇 사람들(교사들)은, 이러한 혼재적 메커니즘 속에, 이해와 지혜와 통찰력을 불어 넣으려고 계속해서 애를 써 왔습니다.—이 시대, 지금 이 순간, 당신들 가운데 몇몇은 계속된 좌절을 맛보면서도, 대중을 일깨우기 위해 반복적인 시도를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 조작 문화[the culture of mass manipulation]에 완전히 동화되어 왔던 로마인들은,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의 혼재 속에 혼동을 겪고 있던 사람들(그리스인들)을 집어 삼킬만큼, 충분히 강한 군사력까지도 보유한 상태에 있었고, 결국, 이들은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제국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하지만, 정작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 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조작된 대중 문화에 걸맞게 “교육받은” 자들이 기록한 역사 속에는, ‘전면 전쟁[mass warfare]’(하지만 이것은 인간들과 몇몇 퇴보해가는 곤충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하지 않는 행동입니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기술한 역사는 그저 대중 조작자들의 연구물들이자, 이들 대중 조작자들의 “권위”아래 행동해 온, 전장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기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인류 역사상 조작된 대중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리가 없을 것만 같은 암시를 줍니다. 그들은 ‘원시 문화’를 ‘인간 문화’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인간들에게 적용시켜 표현할 때, “문화”라는 단어가 갖는 참뜻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말의 뜻을 왜곡시켜, ‘문화’가 “교육을 통한 발전이나 진보, 혹은 그러한 발전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세련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문화들 간의 충돌에 따른 방향성’의 문제는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들’은 ‘인간 의지의 특화된 사용[a specialized use of human will]’으로서, 바람[wind]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바람과 같이 그 효과는 엄연히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당신들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그 효과들만을 서술합니다. ;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인근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존재했었던, 두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적해 내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런 게 있었던 것인지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의깊은 재검토를 통해, 당신들은 현재 진행 중인 문화 충돌의 시발점이 어디였는지를 식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전체 인간 종들의 운명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띨 것입니다.—인간들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문화 가운데 어떤 문화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 대척점을 이루는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은 거의 간파되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3자적 관점을 가지고 살펴 본다면, 큰 그림이 눈에 들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거국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 당황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두가지 다른 방향성을 띤 문화들의 만남은 두 개의 바람들의 만남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띤 바람들이 만날 때, 파괴적인 폭풍이 형성됩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두 바람들이 만난 바로 그 때, 한 명의 그리스도적인 존재[a Christed being](당시의 시대 흐름 상으로 보자면, 그는 당신들이 ‘예수[Jesus]’라고 부르는 자였습니다.)가 왔고, 그는 이 “폭풍의 눈[eye of the storm]”에 의미심장하게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거대한 폭풍은, 전체 인간 종들로서 당신들 모두의 사활이 걸려 있는 폭풍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충돌


지금 현재 인간 종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알려진 역사[known history]’로부터, 의미있는 사건들을 잘 ‘걸러낸’ 다음, 이들을 의미있는 순서로 재배열해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 체계[the cultural storm system]는, 그 “폭풍의 눈[the eye of the storm]”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조망아래 관찰해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하여,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논리적인 설명이나 차이점들을 제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존재’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이와 수반된 것들에 대해서는, 주의의 끈을 놓지 않고 다룰 것입니다. 혼재된 문화들로 된, 오늘날 당신들의 삶의 영역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 “폭풍의 눈”에 대하여, 가장 공통된 관점들을 견지해 왔고, 또 그 특징을 잘 요약할 수 있었던 역사가들이 지금껏 늘 있어 왔습니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 “그것이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간에,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간에, 예수의 이야기는 인간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아마 엄청난 영향일 것입니다.)을 미쳐 왔다.” 미국에는 예수의 이야기에 관한 두 가지 뚜렷한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우선, 한가지는, 예수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견지하는 관점으로, 이에 따르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죄[sins]”를 갖고 있고, 예수는 사람들의 “원죄”에 대한 희생(대속)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앞선 관점의 사람들 모두를 싸잡아 “다시 태어난 바보들”로 폄하하는 자들이 갖는 관점으로, 이들은 예수와 관련된 전체 이야기는 결코 애당초 일어났던 적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내가 당신들에게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 유명한 “예수” 엠마누엘[Emmanuel of “Jesus”]은,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부인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인류에 대한 속임수나 미몽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당신들이 믿건 말건 간에.—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단순히 신화적인 이야기들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른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 혹은 분별력을 지닌 작가들은(그 중 몇몇은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 3의 관점을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관점이란, 예수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완전한 사실들만으로 구성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진술은 대부분의 당신들에게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예수의 “실제” 이야기 버전[one “straight” version]’을 담은,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을, 자신의 서평을 담아 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에릭 홀덴[Erik Holden]이라는 한 역사학자는, 존 할랜드[John Harland]로부터 시작된 작업을 이어 받아, ‘의미있는 사건의 조각들’을 걸러내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해 오기도 했습니다. 홀덴은 ‘실제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많은 제도권 종교 단체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의미와 대조해 나갔던 것입니다.

제퍼슨이 편집한 성경 내역에는, 사도 바울[Paul]의 글은 모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자리에서 당신들이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AND THEY CALLED HIS NAME IMMANUEL]”(피닉스 저널 제 2권—역주)라는 책을 다시 참조해 보고, 바울에 관한 사실들을 확인해 보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바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현재, 자신이 전파한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180도 왜곡된 이야기들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에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제퍼슨 성경[Jefferson Bible]은, 모두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그 보다 앞선 시점에 출간되었던 모든 성경 판본들에는, 하자르인들(유태인들)[Khazars(Jews)]과 유대-기독교인들[Judaeo-Christians]에 대한 변명에 가까운 언급들이 넌지시 들어 있었는데, 제퍼슨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자신의 판본에서는 배제했었던 것입니다. 홀덴이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제퍼슨의 시각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저자이자, 제도권 기독교[institutional Christianity]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a real Christian]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홀덴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을 골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이자, 이 문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개인 주권에 입각한 국가 주권을 지향하는 문화와, 조작된 대중 문화 간에 벌어지는 오늘날의 충돌 양상은 지난 2천년 간 지속되어 온 충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독주의[Christianity]’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북유럽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것이, 현 충돌의 근원적인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no-man’s land]’을 주의깊에 보존하며, 격리된 상태를 지켜오던 북유럽인들은, 외부에서 온 어떠한 ‘조작된 대중들’이 휘두르는 무력 앞에서도 결코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적들은, 교활한 방식으로, 조작된 대중 문화를 북유럽에 침투시켰고, 그런 다음, ‘이 문화에 휩쓸려 버린 북유럽인들’로 구성된 ‘조작된 대중’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파괴하도록 만드는 한 편, 다른 북유럽인들, 말하자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수백만명에 이르는 북유럽인들에게 ‘조작된 북유럽 대중’의 강권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 동일한 전술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은,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과 싸우도록 만든 전쟁이었습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문화 융합으로 구가되는 풍요”라고 부르는 것은 ‘합성 약물’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약물은 모든 분별력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부추겨, ‘제정신이 아닌 행위들’에 쉽사리 뛰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