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언어의 한계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언뜻 그 제목이 주는 첫인상보다, 훨씬 더 “이 저널 본연의 주제로 되돌아 가는” 내용이 되리라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의미있는 이해 속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각자각자가 저마다의 의도를 가진 단일 개체들로서 원활히 기능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상호간의 이해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 머무는 것은, 명백히 우리의 적들이 의도하는 공격 양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를 곧잘 속이며, 성스러운 영혼[Holy Spirit]의 신성한 하나님[Divine God]의 뜻에 반하는 것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입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이에 대해, 완벽하게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릴 필요성에 관한 좋은 예가 한가지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명백하게[EXPLICITLY]’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한은, 그 용어 자체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뜻에 대한 용어인지, 하는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의 영혼에 반하는 자들[the anti-Lighted Spirit]의 공격 양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하나의 주어진 용어에 대해서, “그들 간의” 사용에 있어서만, 단일의 명백한 정의를 갖는 것입니다.?반면 모든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쉽사리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종종 정반대되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상태를 방치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위대한 영혼(정령)[the Great Spirit]’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God]’, ‘빛의 하나님[Lighted God]’, ‘신성한 하나님[Holy God]’, ‘진실[Truth]’, ‘와칸 탕카[Wakan Tanka]’, ‘위대한 백색 (빛의) 영혼(정령)[Great White (lighted) Spirit]’, 기타 등등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난다[Sananda]”라고 말할 때, 이는 ‘그리스도적인 경험[Christed experience]’을 통해, ‘하나님 속에서의 경험, 혹은 하나님으로서의 경험[experiences as/whthin God]’을 체험하며, ‘성취되는 완벽함[achieved perfection]’에 대해 붙이는 ‘명칭[label]’으로서, ‘창백한 예언자[Pale Prophet]’, ‘이.수.[Esu]’, ‘이사[Isa]’, ‘이이사[Iisa]’, ‘서있는 곰[Standing Bear]’, ‘예수[Jesus]’, ‘나사렛 사람[The Nazarean]’,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의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특정 용어’에 대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굳이 더 들지 않더라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호한[IMPLICIT]” 상태에서 작업하기를 반드시 멈춰야만 하며, 항상 “명백함[EXPILCITNESS]”을 갖고서 처신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호한[IMPLICIT] : 암시적인; 추정적인; 표현되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가는 관련된 어떤 것, 혹은 추론을 수반하거나, 이를 유도하는.
명백한[EXPlCIT] : 모호함과 불분명함이 없는; 완전히 개진되거나 형성된; 표현에 있어서 유보적이거나 애매하지 않은; ‘모호한’에 반대되는.
정확한 의사소통은 정확하고 명백한 표현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간의 이해
의사소통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가진, 이 우주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들에 의해 명백히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각 개인들이 보유한 ‘타고난 가치판단[Inborn value judgments]’은, 이 ‘유형의 실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선별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유형의 실체들’과 ‘타고난 가치판단’이 결합될 때, ‘자연의 우주적 언어[the universal language of Nature]’가 형성됩니다. 그리고/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력을 가진 창조적 지성체[comprehensive creative intelligence]’는 자연과 공존할 수 있게 되며, 또는,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말로 된 언어들[word languages]’을 창조합니다. 서구 세계에 있어서, 이 ‘말로 된 언어들’은 종종 육체와 영혼 사이를 구별 짓고, 또 사람들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을 구별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다른 한편,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을 공히 아울러, 이들 모두에게는, 범신론[pantheism]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널리 퍼져있는 사고 패턴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을 하나로 보는 관점입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을 구별하는 사고 패턴과 구별하지 않는 사고 패턴, 이 두 패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 또, 이 두가지 사고 패턴들 간의 차이점에만 너무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통상적인 사고패턴들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속임수와 오도를 야기하는 이러한 사고패턴들을 통해서 ‘조작된 것들’을 식별해 낼 수 있을만한 역량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창조되어 온, 혹은 창조될 수 있는, 모든 ‘말로 된 언어들’은 조악한[crude] 것들로, ‘자연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s God]’를 대체함에 있어서 혼동을 야기합니다. 만약 누군가, ‘자연의 신[Nature’s God]’도, 의사소통 상에 혼동을 야기하는, 이 조악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단언한다면, 그 자는 다른 사람들을 세뇌시키려고 애쓰는 자이거나, 혹은 이미 세뇌된 자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말로만 이루어지는 의사소통[communication in words]’이, 완전하고 종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합니다. 지각력을 가진 어떠한 인간도, 경우에 따라, 말(글)로 하는 의사소통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떠한 ‘사회적 동의[social agreement]’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이란, ‘자연의 언어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가치 판단과 힘(의도), 의지를 수반하는 것)가 취해져야만 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변경시킬 때, 그리고 ‘문화들[cultures]’을 창조해 낼 때, ‘자연의 언어와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오도된 다양성들[misled multitudes]’, 그 중 예를 들자면 하자르[the Khazar]라 이름 붙여진 특정 문화적 양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해당 문화의 구체화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광범위한 측면에 걸친 “문화들[cultures]”에 반드시 초점을 맞춰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들”은 ‘유기적 개체들’이 살아남도록 고무하거나, 혹은 살아남는 것을 허락하는 데에 있어서, 선택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의지적 행위들[will-actions]’입니다. ‘옥수수의 문화[the culture of corn]’는 옥수수의 생장에 알맞은 조건들을 만드는 일을 수반하며, 그들의 생장을 방해하는 다른 유기적 개체들을 파괴시킵니다. (‘옥수수의 문화’라는 표현에 있어서, ‘문화[culture]’의 의미는 ‘재배, 양식, 사육’의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화’라는 단어와 여기서의 ‘재배, 양식, 사육’이라는 뜻의 ‘문화’가 궁극적으로 ‘의지적 행위들’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공통의 맥락을 형성함?역주) ‘인간 의지[Human will]’는 옥수수의 문화, 콩의 문화, 튤립의 문화, 돼지의 문화, 염소의 문화, 양의 문화, 젖소의 문화, 식용 육우의 문화, 노동력 제공용 말들의 문화, 경주마들의 문화, 기타 등등의 것들을 창조해 왔습니다. ‘문화들’은 인간 역사의 주요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대개, 똑바로 지적하거나,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두 가지 문화들이 존재하는데, ‘이해 부족’으로 인해 그러기도 하고, 혹은 한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목적들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루기를 회피’하기에 그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문화들 모두는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human cultures of humans]’(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들의 ‘인간 재배, 사육 방식들’?역주)입니다. 이 두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이 이 글의 기본 주제입니다.
원시 문화
최초의, 혹은 가장 원시적인 ‘인간들의 인간 문화’는 사람들이 사냥과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구해 살아나가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원시 문화는 여전히, 활발히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화는 당신들에게 심각한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문화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이 제시하는, 명백한 ‘장범위 방향성[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은, 단일 세포들에서부터 인간들에 이르기까지 다 적용되는 것으로, 생존에 가장 인지적(자각적)이고[perceptive], 가장 적격인 방식을 선택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시 문화는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잘못 사용되는(오류를 수반하는) 인간의 말들(언어들)[falsely used human words]’이 그 도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이 첫번째 인간 문화는, 지도자들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자들이, 상징적인 지도자를 만들어 내고, 또 자신들이 이 상징적인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여,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을 띠는 것은 모두 ‘하나의 단일 문화’이지만, 그 상징적인 지도자는 여러가지의 모습들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널리 존경받던 죽은 지도자의 “귀신”이 그러한 상징적인 지도자에 부합하는 첫번째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된 역사가 처음으로 남겨지던 무렵, 하나의 돌 “신”[a stone “god”], 혹은 보이지 않는 “신”[an invisible “god”]이, 서구 사회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그와 같은 대상이었습니다. 대변인들은, ‘인간의 말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대상을 일컫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제기하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manipulating the people]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한 명의 “대변인”이, 혼동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로 구성된,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조작된 무리[the manipulated group]’를 이용하여, 자신의 말들(언변들)[words]을 통해 꾸며온 ‘허위’를 알아차리게 되거나 혹은 이에 반대하는 ‘개인들’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무리를 조작하는 힘[manipulating group force]’을 이용하여, 그는 자신보다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정직하고, 더 역량있는 개개인들을 철저히 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제들[priests]”이라고 불렸던 ‘조수들’은 말들로 꾸며진, 이 허위를 잘 떠받들던 자들로서, 이들은 이러한 문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는 업무를 맡도록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작에 취약한 더 많은 대중을 양산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상상의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던 이 사제들은, 그들이 말로 만들어 낸 허위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종속적이고, 어리석은 자들을 상대로, ‘성관계’에 대해서도 “권위적인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조작된 무리’를 이용하여, 대중 조작꾼들인 자신들이 만들어 낸 표현 가운데, “권위”라고 불리는 것에 복종하길 거부할 만큼, 충분히 강하고, 자부심이 높은 개인들, 말하자면, 역량있고, 분별력이 있는 개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권위”를 거부하는 자들이, 함부로 “공인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막아 나섰던 것입니다.
‘언어로 된 기록물을 남긴 역사가들[word historians]’이 처음으로 당시의 사건들을 전하게 되었을 무렵, 그 같은 기록사에 등장하는 인간 종들의 상당 부분은 명백히 이처럼 자연에 반하는 문화 속에서 길러진 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미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퇴보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 사가들은 대개 “사람들이 ‘조작된 대중’의 모습으로 퇴보되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은, “인류가 문명을 창조했다”는 다분히 찬양적인 문구를 사용합니다. 사제들이나 마찬가지로, 많은 “역사가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에 대한 인식’을 흐리는 말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역사는, 그 기록들이 ‘유형적인 실체들’로 남아 있는 역사입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고, 뚜렷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즉 명백한[EXPLICIT] 기록들입니다. 인간들이 계속해서,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 속을 살아 나아가는 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기록사에서 늘, 자연에 의해 설정된 진화 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조직체들[living organisms]’에 관한 언급들만을 발견하게 될 따름입니다.
이러한 지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당신들은 레밍쥐나 양이나 기타 다른 포유류들도 분명히 그룹을 지향해 나아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포유류들 가운데에서도 인간들만큼이나 이렇게 ‘대중 조직체[mass organisms]’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멀리까지 진화해 온 동물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대중과 유리된 채, 개개인들이 생존해 나가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조작된 대중은, 지구 위의 생존 공간 상에 존재하는 모든 평방 피트들을 다 구획짓고, 그 각각의 구획된 영역들이, 이 조작된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할당된 공간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어떤 다른 포유류들 가운데서도 인간들만큼 이렇게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멀리 나아간 동물들은 없지만, 몇몇 곤충들 가운데서는 인간들과 같은 방향을 따라 진화해 온 예들이 있습니다.?개미들, 흰개미들, 그리고 벌들 가운데 몇몇 종류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기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곤충들은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자율적인 성적 개체들[autonomous sexual entities]’의 상태에서 ‘무성의 그룹 조직체[asexual group organism] 안에서 마치 단일 세포와도 같은 기능만은 지닌 개체들’의 상태로 퇴보해[regressed] 온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 ‘군집을 이룬 조직체[the group organism]’만이 ‘의지를 가진 하나의 실체[an entity having will]’로서의 기능을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곤충들은, 처음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말들[words]’을 이용하여 행한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관계 정립을, ‘성적 유인을 이끄는 냄새들[sex odors]’을 이용하여 행했습니다. 모든 인간 종들은 대중 조작자들에 의해 활발히 고무되는 퇴보적 진화를 거듭해 왔으며, 오늘날, 대단히 위험하게도 그 “완성 단계”에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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