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타겟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는 이제 ‘수정된 계획’에 따라, 주요 타겟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수정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하던 2년 전(1976년)만 하더라도, ‘하비스트 문 우주 전투[the Space Battle of the Harvest Moon]’(1977년)는 아직 미래에나 다가올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만간 달에서, 그 작동을 개시하게 될, ‘비밀 빔무기 기지[secret beam-weapons base]’를 잃게 된다는 건,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 든든한 달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이걸 잃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중 미사일 위기를 통한 배신을 겪으면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의 군사 무기들을 철거시키길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 ‘제휴 핵전쟁’을 계획하던 때에 가졌던 복안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러시아를 파괴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작전[Operation Guyana]’의 입안자들에겐 해결해야 할 아주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가이아나에서, 파나마 운하와 미국 남부 지역의 도시들을 겨누고 있던, 이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것은 ‘(핵)전쟁 이전[pre-war]’, 비밀스럽고도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할 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미국도, 러시아도, 그곳에 미사일 기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아예 알려지길 원치 않는 데다가, 또 알려지면 이를 감당할 길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아주 예기치 못한 방식이면서도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경고가 주어진다손 치더라도, 가이아나 기지는 쿠바 병력에 의해, 재강화되고, 탄탄하게 방어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 일은 ‘코만도 스타일의 급습 공격[a commando-style raid]’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76년 7월, 우간다, 엔테베 공항[Entebbe Airport in Uganda]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급습 공격(1976년 6월 27일, 텔아비브에서 아테네를 거쳐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139기는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2명의 독일인들에 의해 납치됨. 그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던 4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서독, 프랑스 등지에 갇혀 있던 13명의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친-팔레스타인 국가인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기착하여 장기 대치하였으나, 7월 4일 이스라엘 방어군[Israel Defense Forces]에 의한 엔테베 작전으로 종결?역주)과 유사한 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독자들에게, 그 유사성과 함축적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들의 ‘리더들’은 다른 스타일의 공격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62년 케네디 암살 사건과 같은 일이 그러했습니다. : 이 일은 미국인들에게 진행 중인 것을 ‘널리 알리고’, ‘당신들의 지지’를 구하려 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이아나 건에 있어서,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어떠한 내용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충분히 큰 규모의 합동 공격 부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가이아나에 보내고, 또 얼마나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가이아나에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군사 기지를 파괴시키는 일 자체가 이미 전혀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건 경험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비밀 합동 군사 부대를 일시적으로 가이아나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는, 아주 갑작스러우면서도, 대규모로 행해지는, 거의 반강제적인 요구가 충분히 수용될 수 있을 만큼의, 그럴 듯한 구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 구실이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러시아가 가이아나에서 일궈 온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가이아나에 결코 함부로 보복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도록, 러시아의 손을 묶는 일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도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 구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군사적인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마치 비군사적인 일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나아가, 습격 이후, 미사일 기지 공격에 수반되는 모든 사상자들을 가이아나에서 깨끗하게 치울 수 있는 수완도 필요했는데, 만약 그러지 못하고, 가이아나에 시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경우, 이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고, 또 그렇게 된다면, 비밀 미사일 기지와는 무관한, 어떤 전혀 다른 이야기 전개로 포장될 가능성도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지령을 추종하는 가이아나 정부가, 공격 도중 죽게 된 합동 군사 부대원들의 시체를 공개하면서, 이들은 포브스 번햄 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사살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나게 커다란 문제였지만, 존스타운 키부츠는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이 가이아나에서 갑자기 죽게 되는 ‘설정’, 그것도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언론 공개를 담보해 주는 조건 아래, 벌어지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비극은 군사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수준의 문제여야 했고, 존스타운의 위치 역시 사전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위치여야 했습니다. 헬리콥터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와 존스타운 사이를 왔다갔다 할 때, 자연스럽게, 미사일 단지[the missile complex](이 곳은 전문적인 위장술로 감춰져 있었지만, 그 상세한 내역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위를 날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래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경우, 합동 특별 군사 부대가 미사일 기지 인근에 착륙하기도 쉽고, 또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손쉬운 방식으로, 사상자들과 함께 동승한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은 헬리콥터들이 북서 방향으로 갔다가 또 똑같은 방향에서 되돌아 오는 걸 지켜보게 되겠지만, 그들은 그저 모든 헬리콥터들이 150마일 떨어진 존스타운과 공항 사이만을 분주히 왕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중 많은 헬리콥터들은 같은 방향으로 거리가 절반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러시아 미사일 기지와 공항 사이를 왕래하게 되겠지만, 리포터들이 이를 알아낼 방법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의 시초


미사일 기지 공격에 대한 위장으로,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이라는 시나리오가 결정되었을 때, 존스타운은 단순히 인민 사원이 보유한 변경의 체류지[outpost] 정도로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엔 의도된 목적에 부합할 정도로, 충분히 큰 사건을 만들어 내기에 적절한 수의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결국, 직간접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짐 존스 자신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대동하고, 직접 가이아나 키부츠로 갈 수 있도록 그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인민 사원 교도들 가운데, 25%에서 30%에 이르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게 되었는데, 자연히 이 사람들은 존스에게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심신의 피로, 협박, 외부 도움으로부터의 단절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대단히 취약해진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철저히 세뇌당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세뇌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되어 있음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정신력이 강한 미군들조차도 놀라우리만치 많은 숫자가 세뇌에 희생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자신들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은 단련된 군인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취약한 자들이었습니다.

1977년 8월 짐 존스는 거대한 한 무리의 희생자들을 데리고 가이아나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달, 유엔주재 미국대사였던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가이아나의 포브스 번햄 수상에서 메시지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몇가지 조건 아래, 미국과 세계 은행[the World Bank]은 가이아나에 대한 원조를 더 늘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 말은, 경우에 따라, 번햄의 호주머니를 이전보다 열 배 이상 더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존스타운의 재앙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만한 조치가 취해졌던 건, ‘하비스트 문 전투’가 있기 딱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불쌍한 레오 라이언[Leo Ryan]


전체의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또 요란한 언론 공개를 보장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인이 된 레오 J. 라이언[Leo J. Ryan] 하원의원의 ‘이권’이 이 사건에 개입되고, 또 사건과 함께 펼쳐질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이언 의원은, 오늘날 미국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사실상 거의 찾아보기 힘든 용기를 갖고서, 또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가이아나로 갔습니다. 그런데, 물론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그는 향하게 된 그 곳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사전에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라이언 하원 의원과, 또 포트 카이투마 공항[Port Kaituma Airport]에서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실상 제 1차 핵전쟁으로 나아가는 ‘비밀 전쟁’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소위 말하는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의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죽은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이 가이아나로 떠나기로 되어 있던, 예정된 여행 날짜가 가까워져 옴에 따라, 외교적, 군사적 수준에서의 다른 움직임들도 준비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가, 러시아가 미사일 기지를 보호할만한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어질 순간이 될 때까지, 러시아의 시선이 가이아나를 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서반구에 있어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 거점은 쿠바[Cuba]였습니다. 따라서, 1978년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가이아나 전투[Battle of Guyana]’가 일어나기 전, 마지막 몇 일 동안, 의도적인 ‘MIG-23기 위기’를 만들어서 변죽을 울렸던 것입니다.?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사건은 러시아의 시선을 쿠바로 돌리는 데 그 원래의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줄만한, 정말 너무나도 많은 비밀들을 알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크렘린에서 진짜 표적은 쿠바가 아니라 가이아나였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1978년 추수감사절 전투


고 레오 라이언 하원 의원의 최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밝혀 온 바에 따르면, 그가 가이아나로 가야겠다는 불운한 결정을 내렸던 이유는, 그에게 전달된 국무부 보고서 때문이었는데, 내용이 워낙 부실해서,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직접 가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라이언 의원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정확히 예견된 것이었고, 의도적으로 계산된 일이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올 무렵, 라이언 의원은, 선거 후 맞게 되는 휴회 기간 동안, 이 곳을 한 번 방문하기로 벌써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으며, ‘무대’ 뒤에서 ‘계획을 짜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정치인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유세 활동의 기회를 잃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여행을 떠날 시점이 다가올 무렵, 쿠바 MIG-23기 위기라는 ‘가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사실 카터 행정부[the Carter Administration]는 거의 1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이 미그 23 전투기들을 쿠바로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 타이밍에, 가짜 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완벽한 구실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그 23기는 몇가지 형태의 핵무기들을 탑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지상 병력 혹은 해상 병력을 지원하는데 적합한 수준의 전술 핵무기 정도를 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미그 23 전투기 자체가 미국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던 것입니다. : 따라서, 미국 측이 미그 23 전투기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시작할 때, 크렘린은 이것이 쿠바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중적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의도적인 제스츄어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미국이 정작 노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카터 행정부가 당장에 쿠바를 침공하려 들만큼 미치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한 행위는 분명히 비이성적인 태도로 비춰졌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러시아쪽에서 이런 의구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자체도, 부분적으로, 계산된 것으로서, 크렘린의 ‘체스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얼마간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부분적으로, 악마주의적인 정신분열증 환자들인, 볼셰비키들[Satanic schizophrenics, the Bolsheviks]이 미국에서 갖게 된 통제력의 정도가 상당히 증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 1차 핵전쟁 이후, 자신들이 세계를 통치하게 되길 바라던 러시아에게 있어서, 쿠바는 대단히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 쿠바는 서반구에서 러시아의 주요 교두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나중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장에 쿠바는 러시아의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Russia’s Caribbean Submarine Fleet]의 비공인 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함대는 앞선 두 해 동안 멕시코 만에서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양상을 띠어 왔었고, 또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왔었던 것입니다.

마치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줄만큼, 쿠바 안에서 핵무기가 집중적으로 배치된 곳만해도 최소한 4군데가 넘었습니다. 하나는 거의 북쪽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카르데나스[Cardenas]의 남동쪽에 있는 것으로, 내륙으로 대략 10마일 정도 들어와 있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 곳은 플로리다주 케이프 세이블[Cape Sable, Florida]에서 정남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위치였습니다. 두번째 지점은 첫번째 지점에서 동-남동방향으로 15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북쪽 해안으로부터 10마일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집중 배치된 세번째 지점은 거기서 남동쪽으로 125마일정도 더 떨어진 곳으로, 마르티[Marti’]의 북동쪽에 있는 것으로, 역시 내륙으로 15마일쯤 들어와 있었습니다. 네번째 핵무기 집중 배치 구역은 거의 쿠바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미국의 해군 기지인 관타나모만[Guantanamo Bay]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28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런 도처에 깔려 있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미그 23기 문제를 지나치게 공론화시키자, 크렘린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습니다. 11월 초, 미국이 마침내 쿠바 상공으로 SR-71 정찰기들을 띄워 보내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962년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11월 6일, 이에 대한 반응으로, 러시아의 대서양, 태평양, 그리고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들은 미국의 동, 서해안과 멕시코 만 지역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공격 형태의 함대 배치를 취하진 않았지만, 엄청난 숫자를 대동하여 워싱턴에 분명한 경고 사인을 주고자 했습니다. 대부분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많은 잠수함들은 중성자 무기들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그 23기를 빌미삼아 만든 이 가짜 위기가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 한 주 동안, 가이아나에서의 비극적 사건이 즉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11월 14일, 화요일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 해군이 결합된 거대한 테스크 포스[Task Force] 팀이 쿠바로 향했습니다. 그 주의 중반에 쿠바 방어군[Cuban defense forces]은 완전 경계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11월 16일, 목요일에는 12명으로 구성된 미국 상원의원들이 (SALT 회담을 갖는다는 구실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코시긴[Kosygin] 수상(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Alexey Nikolayevich Kosygin](1904-1980) : 소련의 정치인. 1964-1980 소련 수상?역주)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쿠바 미그 23기와 관련된 위기 상황은 “가짜 이슈”라고 말했습니다. 전직 시험 비행기 조종사이자, 미국의 첫번째 우주인이기도 한, 글렌 상원의원[Senator Glenn]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코시긴 수상은 미그 23기와 관련된 언급들에 대해서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반응 자체가, 미국의 정보공동체에게는, 쿠바를 상대로 취한 제스츄어가 제대로 된 미끼로써 먹혀 들어갔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인, 11월 17일, 러시아는 쿠바에 미그 23기들을 보낸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이 비행기들은 엄격히 방어용 무기들이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지[the Washington Post]는 사설을 통해, 쿠바 미그 23기에 대한 언론의 주목을 한 번 더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새로운 쿠바 미사일 위기?”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 토요일,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기자들, 그리고 한 명의 여성은, 존스타운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으려 애쓰다가, 포트 카이투마 공항[the Port Kaituma Airport]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최소 열 두 명에 이르는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기겁을 한 채, 존스타운을 도망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비행기를, 계속해서 따라가 격추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수의 목격자들이 목숨을 건졌고, 이들은 그 작은 비행기를 타고, 살육 현장이 되어버린 공항을 무사히 빠져 나와, 수도인 조지타운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가해졌던 공격에 대해서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전 세계의 이목이 가이아나로 집중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mass murder]’(이것은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잘못 알려졌습니다.)은 계속 진행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간, 쿠바를 향해 던졌던 의도적인 미끼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국방성[the Pentagon]은 일상적인 해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쿠바에서 50마일 떨어진 곳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쿠바 방어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정한 작전’은 이제 막 가이아나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저명한 기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일은, 존스타운이 이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일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담보되고 나자, 짐 존스는 마침내, 존스타운 키부츠에서 대량 학살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학살의 구체적인 내역


존스타운 재앙의 완전한 내역은 결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들에게 확언컨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말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임수에 당했고, ‘죽음의 의식[the death rites]’이 실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항했지만, 그들은 쇠약했고,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받을 수 없었으며, 그저 무장한 살해단[armed execution squads]과 직면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몇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로 독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탈출하려고 애쓰며, 보다 효과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은 떼를 지어 정글 속으로 달아났지만, 어떠한 관용도 없이 저격되었습니다.

결국 대량 살육이 완료되었을 때, 살해자들은 이 처참한 죽음의 현장 속의 시체들을 적절한 곳에다 배치하는 ‘무대 설정 작업’을 했습니다. 러시아 미사일 기지 공격에 필요한 깜짝쇼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존스타운 사건을 처음 알리게 될 기자들이, 그 장면을 보고, 대량 자살이라고 보도하게 되는 일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만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던, 사실상 군사적인 작전의 실체를 은폐하여, 러시아인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총격을 받지 않은 시체들만 모두 따로 모아, 주의깊게 열을 이뤄 배치하거나, 혹은 그룹을 지어 배치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보더라도, 첫 눈에,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죽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바로 이튿날인,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늦게, 가이아나 군병력이 처음 목격한 장면이었습니다. 키부츠의 희생자들이 죽은 지는 이미 24시간도 넘은 때였고, 짐 존스를 포함한 살해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나는 존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것입니다. 나는 앞서 그가 이스라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당신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위험을 무릅쓴 숫자 파악


가이아나 군병력은 질병을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우선 정확한 숫자부터 세어야겠다고 판단하여, 가까이 가서 만지거나, 시체를 옮기지는 않은 채, 모두 몇 구인지를 파악했습니다. 일요일 밤, 그들이 확인한 총 시체 수는 409구였습니다. 통제된 미국의 주요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는, 이 사건이 집단 자살로 보인다는 첫 평가가 보도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조사를 기다려 볼 것도 없이, 언론 매체들은, 마치 이미 입증된 사실인 양, 존스타운의 현장을 ‘집단 자살’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며칠 후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땐 이미, 처음 보도된 장면들을 통해, 가이아나 정부가, 이 사건의 조치를 위한 미국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이 완수된 후였습니다.

예를 들어, 11월 21일 목요일, 짐 존스의 생존한 아들인 스티븐[Steven]은 조지타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집단 자살이었을 리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한 가이아나 정보원을 인용하여, 존스타운 키부츠의 죽음의 현장은 심각한 의학적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알렸습니다. 그 가이아나 정보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청산가리[cyanide]로 죽은 것 같은데,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를 복용하게 된다면, 당신의 신체는 경련을 일으키게 되고, 온몸이 뒤틀린 채로 죽게 된다. 그런데 존스타운의 시체들은 모두가 편안한 상황에서 가지런히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가 생겨난 이유는, 가이아나 군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시체들은 재배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얼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고통의 순간, 일그러진 모습을 띠었던 희생자들의 얼굴이, 뉴스 매체의 사진들을 통해 공개될 경우, ‘차분한’ 죽음을 맞은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던 최초의 의도가 흐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