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악몽


악몽과 같은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러시아인들을 다시금 속일 목적으로, 먼저 공개적으로 가이아나 정부에 수백 구의 시체들을 수습해서 묻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가이아나 정부는 사전에 준비된 대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이아나 측은, 이건 미국의 문제이니, 미국이 시체들을 미국땅으로 되가져 가야 될 것이라는, 유효 적절한 대답을 했습니다.?단지 계획된 대로 했던 것입니다. 이 거대하고도 끔찍한 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하여, 가이아나 정부는, 통상 가이아나의 법에 따라 어떤 시체라도 본국 밖으로 보내질 경우, 우선적으로 부검을 거쳐야 한다는 조항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에, ‘강제적으로’ 동의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설정’과 함께 미국은, 정작 그들이 원했던 것, 즉,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에 군사적 목적의 접근을 행하는 일에 대한 공수표를 발급받은 셈이었습니다.

러시아 정보 당국에서 이제 곧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된 건, 11월 20일, 이른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이를 멈추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러시아로서는 감히 세계 언론에다 대고, “우리는 가이아나에 비밀 핵 미사일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이를 곧 파괴시키려고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경우, 오히려 세계 여론은 모두 미국 편에 서게 될 것이었습니다. 비록 러시아의 코스모스페어들[Russian Cosmospheres](러시아 보유 UFO형태의 비행체들?역주)은 재빨리 가이아나 상공으로 날아들었지만, 비밀스런 상태로 진행되는 전투에는 그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코스모스페어의 충전 입자 빔 무기[Charged Particle Beam Weapons]로, 코만도 스타일로 행해지는 군부대의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오히려 러시아 미사일 기지 자체를 날려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한 해 전, 하비스트 문 전투 이후로, 러시아 군사력에 있어서, 이 가이아나의 미사일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보다 더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그들의 상대방에게 공개적인 선전 포고를 한다고 가정할 경우, 이 미사일들의 보유 여부가, 그 선전 포고의 여부를 결정할 만큼의 가치를 갖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조건들 때문에, 러시아는 존스타운의 비극이 무대 위에 올려진 이 후, 그저 무기력한 상태로 물러서 있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옴에 따라, 미국의 수송기들, 헬리콥터들, 군부대, 그리고 언론매체 팀들까지 포함하여, 한 떼의 거대한 무리가 가이아나로 날아들었습니다. 광활한 테메리 에어필드, 한 쪽 끝 코너에 지휘통제소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서 존스타운과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대상으로 한, 두가지 작전을 한꺼번에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군병력 가운데 일부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청소하는 메스꺼운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합동 공격대[joint attack forces]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미사일 기지를 둘러싸는 지역에 정위치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존스타운의 사망자 수는 변함없이 409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확히 추수감사절날, 가이아나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정글을 비롯한 각종 전투 현장에서 기습작전을 펼친 경험이 많은 급습 공격대원들은, 러시아 미사일 단지 쪽으로 이동하여, 산재한 모든 미사일 시설들을 향한 동시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엔테베 작전에서처럼, 전투 그 자체는 오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빨리 끝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선, 각각의 미사일 설치 장소에 있던 소규모 인원들은 급작스런 공격에 당황했고,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미사일들은 재빨리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공격대원들은 미사일 기지의 명령 통제 센터로 모여들었는데, 이 곳에서 마침내 피가 튀는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러시아 지휘관들을 포함한, 미사일 기지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살해되었습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테메리 에어필드에서 온 미국 헬리콥터들은 폐허가 된 미사일 단지 안에 착륙했고,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남아 있는 공격 부대원들은 그 곳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두가지 해야 할 일들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공격대원들의 시체는 단 한 구도 가이아나 땅에 남겨 놓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원을 꼼꼼히 확인해 가며, 그 광활한 지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들의 시체는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타입의 시체 담는 가방에 넣어 봉해진 다음, 빈 공터에 모아졌습니다. 쌓여 있는 시체들은 헬리콥터가 수송해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연합 공격 대원들에게 주어졌던 명령은 모든 미사일들의 핵탄두를 제거한 다음, 이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핵탄두들은 조지타운으로 옮겨진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공수될 예정이었습니다.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특별히 훈련된 요원들은 미사일 관리 병력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공격 이후, 즉시 이 작업에 들어갔던 터였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모든 핵탄두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탄두들도 시체 담는 가방에, 가방당 하나씩 봉해졌습니다. 정글에서 그러모은 나뭇잎들을 함께 집어 넣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가방이 그럴듯한 외관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볼 순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미국의 지휘 통제소에 접근하는 일이 엄격히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가이아나 전투가 있었던 추수감사절 오후,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부상을 입은 자들은 공항으로 후송되었는데, 리포터들이 이를 보지 못하도록 엄격히 차단되었습니다. 때때로 리포터들은 시체 담은 가방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는 장면들을 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그 안에는 모두 존스타운의 희생자들만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어떤 가방에는 사망한 코만도 대원들이 들어 있고, 또 어떤 가방에는 핵탄두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존스타운 키부츠로부터 시체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 계속되는 동안, 가이아나 전투에 따른 여파들은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시체들을 어디로 가져갔던 것인가?


가이아나의 수송기들이 델라웨어[Delaware]에 있는 도버 공군 기지[dover Air Force Base]를 향했을 때, 많은 리포터들은 완전히 어리둥절했습니다. 존스타운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출신들이었고, 도버 기지에 있는 것과 유사한 규모의 시체 안치소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공군 기지[Oakland Air Force Base in California]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버가 선택되었던 이유는, 러시아 핵 탄두들을 인근의 아버덴 성능 시험장[Aberdeen Proving Ground]과 무기고[Arsenal]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도버에서 필립스 공군 기지[Phillips Air Force Base] 간을 잇는 근거리 비행을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최초의 사망자 수 409명은 가이아나에 나와 있던 미국 관리들에 의해 확정적인 숫자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몇 가지 의문점을 남겼는데, 우선, 존스타운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천 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는 그럼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한창 시체 수거 작업이 진행 중이던, 추수감사절, 한 군사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아 본 바에 따르자면, 자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존스타운에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언급을 하는 도중에도, 러시아 미사일 기지에서 펼쳐지던 가이아나 전투는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 오후가 될 때까지, 이미 485구의 시체든 가방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도착하게 될 러시아 핵탄두 ‘시체들’은, 처음 키부츠에서 가이아나인들이 세었던 사망자수, 409명을 훨씬 초과하여, 그 수치를 더 올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실수였고, 이러한 실수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무언가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추수감사절 다음날이었던 금요일,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있던 국방성 대변인은, 숨을 채 가눌 겨를도 없이, 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CBS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 “존스타운에서 발견된 원래 사망자들의 숫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그 대략적인 시신 수는 전체 780구가 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시체들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시체 더미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성인들의 시체더미 아래에, 상대적으로 왜소한 성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시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기자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채, 정부측 대변인은 이 놀라운 새로운 발견에 관한 이야기의 살을 나중에 덧붙였습니다.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그 동일한 대변인이 금요일 저녁에 언급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 “시체 더미 한 가운데 부근, 그리고 집회장 인근 몇몇 군데에는, 시체들이 세 겹으로 쌓여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 층들 사이에는 담요가 깔려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서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죽어 있는 자리 위에, 포개져서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게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설명이라서, 결국 이틀 뒤, 미국 정부는 원래의 이야기를 철회하고, 담요 운운했던 것은 “루머”였노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시체들 위에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는 주장은 계속 관철되었고, 결국 11월 25일 토요일, 또 다른 미공군측 대변인은 모든 설명들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다음 설명을 건넸습니다. :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 몇 군데로 나눠진 작은 원들을 그린 모습으로 빙 둘러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쪽에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죽으면서 원의 안쪽 방향으로 쓰러졌고, 자연스럽게 시체들은 원의 중심을 향해 겹겹이 포개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정말로 이 터무니 없는 설명을 믿는다면, 스스로가 참으로 놀라운 장님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진짜 마치 물고기들마냥, 이 기가 막힐 노릇의 미끼들을 물었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은폐 스토리는 이런 허술한 설명력을 안은 채,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그럴 수 밖엔 없었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오후, 가이아나 부수상[Deputy Prime Minister]이었던 레이드[Reid]는 국회에서, 가이아나 국민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첫번째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채, 또 “이건 수치요, 수치”, “이건 조작이요”라고 외쳐대는 국회의원들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총총히 국회의사당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 FBI 국장이던, 윌리엄 웹스터[William Webster]가 다음 사항을 알렸습니다. : “FBI 재난 처리반[FBI Disaster Squad]은 제임스 워렌 존스[James Warren Jones](짐 존스)의 시체를, 지문 기록 대조 작업 끝에 확정적으로 식별해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 순간, 짐 존스는 이미 사전에 잘 계획된 대로, 가이아나를 빠져 나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짐 존스는 빠져나갈 수 있었던가?


존스의 탈출 계획은 사전에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대양 항해용 보트 한 대가, 조지타운에서 남서 방향으로 35마일 떨어진 강변 마을인, 바르티카[Bartica]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스타운에서 바르티카까지 무사히 가기 위하여, 존스는 안전보장 증명서[Safe Conduct Pass]를 소지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날 이른 아침, 가이아나 전투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 존스는 조지타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 시간으로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그의 보트는 에세키보 강[Essequibo River] 어귀를 떠나 대서양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존스는 복잡한 여정을 따라 갔는데, 이는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짜여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적되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를 떠난 존스는 정동 방향으로 330마일을 간 후, 남쪽으로 꺾어서, 11월 27일 현지 시각 오전 5시 30분경에, 프랑스령 기아나, 라메르[La Mere, French Guiana]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육로로 수도 카옌[Cayenne]까지 갔고, 다시 비행기를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서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Freetown, Sierra Leone]으로 갔습니다. 프리타운에서 그는 다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비행하여, 기니-비소 공항[Guinea-Bissau Airport]에 도착하였는데, 도착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11월 28일 오후 7시경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DC-3기로 갈아탄 후, 이륙했습니다. 동쪽으로 날아가 세네갈, 탐바쿤다[Tambacounda, Senegal]로 갔고, 다시 그곳에서 말리[Mali]쪽으로 갔는데, 도중에 세구[Segou], 몹티[Mopti], 그리고 가오[Gao]를 경유했습니다. 그런 다음, 니제르, 아가데즈[Agadez, Niger]로 향했고, 이어, 차드, 라르고[Largeau, Chad]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그의 비행기는 수단, 앗바라[Atbara, Sudan]로 날아갔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행하여, 포트수단[Port Sudan]에 도착하였는데, 이 때가 현지 시각으로 11월 30일 오전 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포트수단에 도착했을 때, 존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공무 수행용 터보프롭 장착 교통편[Turboprop Executive Transport]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서 보유, 운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20분 뒤, 이 비행기는 존스를 태운 채, 이륙하여, 홍해[the Red Sea]의 한 복판으로 날아갔고, 다시 아카바만[the Gulf of Aqaba]을 향해 갔습니다. 현지 시각, 11월 30일, 오전 6시 30분, 존스를 태운 비행기는 이스라엘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엘라트[Elath]에 잠시 머물렀고, 이어서,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예루살렘[Jerusalem] 외곽의 한 사립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인근의 다른 장소로 이동했고, 이 곳에서 그는 비밀 결과보고[intelligence debriefing]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복음전도사에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전 6년간에 걸쳐, 의식적으로 서서히 비밀 정보 공통체의 요원으로 변모해 갔던 존스는, 가이아나에서 펼쳐졌던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 간의 공동 작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세우고, 또 이것이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이 일의 수행과 관련된 중요한 전문지식들을 존스에게 건네 주었고, 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부관들까지 붙여 줬습니다.

존스타운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길 원한다면, 사실상, 그저 백과사전에서 ‘키부츠[kibbutz]’를 찾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월드 북 백과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 “키부츠라 불리는 집단 공동체에서, 농부들은 모든 자산을 공유하고, 자신들의 노동력도 이에 더하게 된다. 마을 행정관리소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다. 성인들은 큰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하지만, 결혼한 부부들과 독신자들은 저마다 사적인 숙소를 갖는다. 모든 아이들은 별도로 마련된 집에서 함께 길러진다. 부모들은 저녁 식사 전, 한시간 혹은 두시간 동안 아이들을 방문한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에 따라 “코뮌[commune]”이라는 단어를 한 번 검토해 봅시다. 이는 한 자치 공동체(코뮌)[commune]에서 함께 생활함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키부츠 가운데, 아주 순수한 형태의 ‘자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자치 공동체’가, 짐 존스와 같이, 악마주의적이고, 정신분열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운영될 경우,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것처럼,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행위들이 강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한 나라 전체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된다고 할 때, 우리는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국가’와 같은 예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현재 당신들은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이라는 파멸적 상황을 향해 직접 끌려 가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 드는 끔찍한 비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사건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실질적인 전쟁은 바로 그 추수감사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하비스트 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미 전쟁에 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모든 일들이 계산했던 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또 그 일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다룰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때를 기점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의 규칙들’은 영원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 후, 러시아는 SALT II를 통한, ‘무장해제 협박’으로 미국에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항복을 선택하는 대신, 미국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는, ‘자살적인 핵 전쟁’을 준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사건은 전체적인 전쟁에 대한 ‘미리보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획했던 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이아나 전투는 눈부신 성공이었습니다.?하지만,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렀습니까!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이 고의적으로 희생되어 왔고, 그 희생자들의 수는 실제 전투에서 적들의 손에 의해 희생되는 수보다 많았습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의 계획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이에 따라 일이 진행될 경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의 수는 간단히 제압되어 버릴 것입니다.

실상 가이아나 전투는 무익했던 일로, 그저 러시아의 팔을 살짝 할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 일은 하비스트 문 전투 이전에 계획된 것이었지만, 하비스트 문 전투가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가이아나 전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쓸모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짐 존스는 존스타운에 있는 자신의 왕좌 위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해 진다.”

이제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가이아나의 비극이 실질적으로 종교와 어떤 측면에서, 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더 논문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 실로 불쌍한 사람들이여! 하지만, 아직도 늘 속기만 하는 당신들은, 거짓의 향연들을 여전히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하세요.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4권, “R. R. P. P. : Rape, Ravage, Pillage And Plunder of The Phoenix Vol. I.” 제 14-15장, pp.131-147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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