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6권, 환생, 창조의 작용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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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036권, 환생, 창조의 작용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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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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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생[Reincarnation]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환생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에 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감각의 범위 너머에 있는 자연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이 가진 개념들이 아직 너무나도 원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 진화[man’s unfolding]의 초기 단계에서 겪게 되는 이 극단적으로 한정된 감각 범위는, 지금의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핸디캡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당신은 환생을 믿습니까? 저한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우리로서는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개념, 그리고 육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들이 현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국한되어 있는 한,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환생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남긴 많은 설명들은 ‘자연의 작용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하기 위함이었고, 이러한 개념들을 통하게 될 때, 자연의 가장 명백한 사실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앞선 설명들 속에서, 우리는 모든 ‘육체’들, 그것이 생각체[thought-bodies]이든, 물질체[material bodies]이든, 말하자면, 그것이 소리이든, 동물이든, 태양이든, 은하이든, 모든 것들은 오직 ‘빛-파동들[light-waves]’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앞선 모든 설명들은, 새로운 개념들, 예를 들면, ‘육체의 이원성[duality of bodies]’과 같은 개념을 정립하는 데에 할애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환생에 대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응축시키고 분산시키며, 또 시각화시키고 비시각화시키는 ‘육체의 극화[the polarization of bodies]’는, 반복되는 주기 속에서 영원히 그 극성을 교환하는 일이자, 늘 쌍을 이루어 펼쳐지는 것으로,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은, ‘육체’를 만드는 일이 행해지는 ‘하나님의 작업실[God’s workshop]’을 뒤에서 몰래 엿보는 첫번째 단계인 셈입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길고 낮은 잠재력을 가진 파동들을 짧고 높은 파동들로 바꾸어서 눈에 보이는 육체들을 만들어 내시는 지, 또 어떻게 이 과정을 역으로 되돌려, 그렇게 눈에 보이던 것들을 다시금 보이지 않게 만드시는 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은 이러한 ‘파동 압축법[method of compressing waves]’을 실제로 사용해 왔지만, ‘자신’이 그래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단순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물질은 공간으로부터 생겨났다가, 다시 공간 속으로 삼켜지는 것 같아 보인다. 아마,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물질의 창조 과정[creative process of matter]’이라는, 커다란 미스터리를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과정에 대한 복잡한 설명들을 천천히 짜맞추어 나갈까 합니다. 부디 우리의 설명을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 우리의 저작들(피닉스 저널과 관련 출판물들?역주)을 비난하고, 또 이 책자들을 읽는다는 이유로 당신들의 가족 구성원들이나 친구들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당신들은 여기 이 내용들을 반박해주는 글들을 그들이 읽기를 기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부탁하는데, 부디 당신들이 주의깊게 읽고, 또 공개적으로 읽는 책들(공인된 책들)에 대해서 갖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경의를 갖고서, 이 글들을 읽어봐 주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코 당신들 역시, 누군가가 당신들을 대할 때, 당신들이 상대를 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예의와 존중감을 갖고서 대해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소멸과 재현의 환상


    1. 다음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햇볕이 내려 쬐는 어느 날 아침, 당신의 정원 담장 위에 물을 한 잔 올려 놓아 보십시오. 당신이 오후에 이를 확인하러 가 봤을 때, 물은 거기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물이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물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물이 사라졌는지도, 또 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이 가진 ‘잠재력’이, 응축된 보이는 상태에서, 확장된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변화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6평방 인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보이는 물의 ‘육체’가, 이제 6천평방 인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증기라는 더 큰 ‘육체’로 증발해버린 것입니다. 비록 물이 사라졌을지언정, 물이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 것입니다. 물은 여전히 ‘육체’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압니다.?비록 같은 종류는 아닐지라도. 당신이 마시거나 그 속에 손을 씻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도, 물은 여전히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은 심지어 구름과 같은 모습을 띠고서, 다시 보이게 될 수도 있고, 또다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편, 당신 또한, 숨을 쉴 때, 물이 그 일부가 되어 섞여 있는 공기를 통해 그 물을 마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그 존재 상태를 멈춰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이 아는 이유는, 차가운 공기가 다시금, 물을 응축적이고 집약적인 ‘극화 상태[polar condition]’로 수축시킬 때, 이것은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려 그 빈 컵을 채우게 될 때, 당신은 물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다시 증기가 되었을 때, 당신은 역시 물이 증기 상태로 되돌아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극화와 비극화(탈극화)[polarization and depolarization]’ 혹은 ‘응축과 분산[concentration and decentration]’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두 가지 반대되는 상태의 반복이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경시한다면, 즉, 물이 갖는 ‘육체’가 당신의 시각 범위 안에 나타났다가, 이내 시각 범위 밖으로 사라진 후, 얼마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서, 다시금 시각 범위 안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 이 ‘영원한 계속성[the eternal continuity]’이라는 개념 밖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면, 당신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그 반대의 육체 간의 ‘연속적인 상호 교환[sequential interchange]’에 대한 이해로 향하는 첫걸음을 뗄 수가 없습니다.우리가 당신들에게 반드시 주지시켜야 할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야만, 어느 한 육체의 소멸과 재현 사이의 시간 간격(이 간격은 당신들의 감각상으로는 거의 “정전[blackout]”과 같은 상태입니다.)이 그 육체의 불연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들이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당신들의 시각 범위에서 혹은 청각 범위에서 사라졌을 때, 이들은 존재 상태를 멈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죽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당신들의 시각 범위 혹은 청각 범위 안에 다시 나타났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들이 새로 생명을 얻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들의 시각과 청각 범위 안으로 다시 돌아 왔을 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에 기반을 두고서, 당신들의 의식[your Consciousness] 속에 반드시 정정해야 할 개념이 있다면, ‘사라진 육체[disappeared body]’에 깃들어 있던 ‘영혼[the Soul]’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바고 그 영혼은, 사라져 버린 육체를 창조하고자 했던 욕구와 동일한 ‘욕구[desire]’를 갖습니다. 하나의 ‘생각[idea]’을, 형태를 띤 어떤 것으로 전개시키고자 하는, 영혼의 욕구[desire of the Soul]는, 그것이 다시 나타나게 하고, 또 다시 나타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으로, 이는 영원히, 영원히 반복되며, 이 같은 연속성은 끝없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결코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체[Sound Bodies]의 변화


    2. 당신들이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한가지로 우리는 다음 개념을 예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말을 할 때 나는 소리‘체’[a body of sound]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리가 멈추었을 때, 이것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계곡의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서, 충분히 큰 소리로 말을 하게 되면, 당신의 목소리는 다시 들릴 것입니다. 소리는 절벽에 부딪혀서 작은 파동으로 응축되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계속 공간의 반대편에 부딪혀서 들리게 되는 것으로, 당신의 목소리와 동일한 소리들인 것입니다. 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소리 자체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발성의 욕구 지점(당신)’으로부터 ‘소리라는 육체의 형태[its body-form]’를 띤 채 창조되어, 확장되는 ‘소리’는, 처음과 동일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를 두고 메아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실상 소리 파동도 ‘빛’으로서, 빛을 반사시키는 것을 두고 거울이라고 부르듯이, 이를 두고 거울이라고 불러도 사실은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의 환상


    3. 이 똑 같은 소리가 3천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재현되는 상황, 예를 들어, 당신이 말을 할 때 생성되었던 소리 파동은 이후 점차 길어지게 되지만, 이 파동을 다시 짧게 만들어, 처음 소리가 만들어질 때의 차원으로 응축시켜주는 라디오의 콘덴서를 통해, 당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 전달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떤 소리가 그 생성지로부터 3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소리는 단지 이를 인지할 수 있는 당신의 감각 범위로부터 사라졌을 뿐인 것입니다. 당신이 지구 상의 어디에 위치해 있든, ‘소리체들[sound-bodies]’이 갖는 파동의 길이와 주파수를 응축시켜 원래 상태의 차원으로 복구시켜 줄 수 있는 콘덴서를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 똑같은 소리를 원래의 패턴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시나 레이건이 어떤 상황에서 말을 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부시나 레이건이라는 이 특정의 인물을 이루고 있던 ‘실체’가 “환생을 해서”?“혹은 다시 태어나서”?“혹은 다시 반복되어서”, 어디가 되었건 간에 다른 어딘가에 새로 나타났다고 해 봅시다. 그렇지만, 이 새로 태어난 자가 내는 목소리는, 재현을 통해 다시 응축된 것으로, 모든 측면에 있어서 같은 목소리, 즉, 같은 패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소리인 것입니다.


    연속성


    이러한 사실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진리이지만, 당신들이 죽음?탄생?소멸?반복?재현?혹은 환생이라는 표현들을 사용할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옳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육체들(육체의 표현들)’ 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이제 안다고 할 것 같으면(그들 사이에 변화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차원[dimensions]과 극성[polarity]만이 바뀔 뿐인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러한 표현들을 옳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육체들’로 표현되는 ‘인식 개체와 패턴’이 대중 앞에 서서 연설하던 처칠[Churchill]의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피아노를 연주하던 파데레프스키[Paderewski](1860-1941, Ignacy Jan Paderewski, 폴란드의 음악가이자 정치가?역주)의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성악가 카루소[Caruso](1873-1921, Enrico Caruso, 이탈리아 테너 가수?역주)의 것이라고 한다면, 왜 당신들은 ‘죽었을 때’, 당신들의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해야 할까요? 존 도[John Doe](‘보통 사람’을 의미하는 가상적인 이름?역주)라는 사람이 자신의 원래 ‘씨앗’으로 되감겨 들어가는[refolds into its seed] 것처럼, 실상 모든 육체들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물이든, 야채이든, 동물이든, 다 마찬가지인 것으로,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광물들의 삶의 씨앗[the seed of mineral life]’은 ‘불활성 기체[the inert gases]’라고 알려진 영점 원소들[zero element]입니다.(‘물질의 구성’ 참조?역주)

    모든 육체들은 그러한 육체들을 창조하려고 하는 ‘마음의 욕구[desire of Mind]’의 결과물들입니다. ‘마음의 욕구’는 영구적입니다.?따라서 모든 육체들은 저마다의 연속성을 띤 채로, 역시 영구적인 것입니다.사실 우리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표현을 써서도 곤란합니다.?왜냐하면 “반복”이라는 말은 각각의 반복되는 것들 사이에 불연속적인 간격[discontinuous intervals]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당신들은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식별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신들의 시각 범위가 어둠을 뚫고서 먼 곳까지 내다 보는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었을 때, 산은 당신들의 시각 범위 안으로 다시 나타납니다.?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은 새로운 산이 ‘재탄생’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이를 두고 산이 ‘반복’되었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산이 연속적으로 있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산은 결코 존재하기를 멈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밤 사이 지진이 일어나서 산의 모습이 좀 변화되었을지언정, 그것이 “다른 산”은 아닌 것입니다. 당신들은 꽃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됨을 알아 봐야만 합니다. 꽃이 져도 그것은 ‘불활성 기체인 씨앗[its inert gas seed]’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 씨앗으로부터 소생하여 다시 그 모습을 펼쳐 내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연속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를 두고, 삶이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오직 ‘쉼[RESTING]’을 통해 ‘삶이 표현되는 것[manifesting life]’이 멈추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역동적인 육체들은 ‘행위(작용)[action]’를 통해 삶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이(심지어 당신들이 시각적으로 볼 수 없는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쉼의 상태[resting]’에 있는 동안 삶을 표현해 내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당신들이 나를 볼 수 없기에 내가 나의 삶을 표현해 내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육체의 죽음 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알길 원한다면, 그리고 ‘환생이라는 환상[the illusion of reincarnation]’을 정말로 당신이 철저히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선 우리가 쓰는 “잠재력의 반전[reversal of potential]”이라는 표현의 의미부터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주기[cycles]”라는 표현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꼭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잠재력의 반전[Reversal of Potential]과 주기[Cycles]에 대한 설명


    가정 1 : 모든 ‘육체들’은 연속적입니다.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거의 어떠한 육체들도 각각의 주기 안에서 잠재력을 두 번 반전시키지는 않습니다. 이 때의 주기란 ‘육체들’이 영원한 여행을 함에 있어서, 응축을 통한 시각화로 나타나는 감각의 범위 안쪽과, 감각의 범위 너머 바깥쪽으로 이어지는 주기입니다. 응축된 시각화의 상태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씨앗-기록[seed-recordings]’ 속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정 2 : 모든 육체들은 주기들 속에서 표현됩니다. 하나의 주기는 연속적인 두 방향의 나선형 여행으로, 육체는 확장된 상태로부터 그 반대의 응축된 상태로 나아가고, 그런 다음엔 다시 확장된 상태로 되돌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기의 가장 친숙한 예를 들자면, 낮과 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은 그 상대방의 반대쪽 절편인 것으로, ‘하나의 대상이 갖는 호흡[one’s breathing]’처럼 표현됩니다.

    당신들은 여러가지 예를 통해서 이러한 가정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이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가는, 다시 물로서 되돌아 오는 것이 한가지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것만으로 환생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다른 예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어쩌면 이를 통해 당신들은 환생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 원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잔 속에 든 물 대신에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나무가 사라지는 데에 있어서 ‘증발’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나무는 열에 의해 ‘부식[decay]’하게 되지만, 부식’은 정확히 같은 의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다른 함축성을 띱니다. 증발이든 부식이든, 양쪽 모두 ‘확장을 통한 사라짐[disappearing of expanding]’이라는 ‘자연의 방식[Nature’s manner]’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요소 또한 양쪽이 갖는 효과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에 어려움을 더해 줍니다. 물은 훨씬 빨리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비는 바로 다음 순간에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사라진 떡갈나무가, 다시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게 되기까지는 5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물이 사라졌을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떡갈나무가 사라졌을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아주 오래된 의문이자, 겉보기에 그 대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의문, 즉 “내가 죽었을 때 어디로 가는 것인가?”와도 마찬가지의 의문입니다. 그런데, 씨앗(도토리)을 다시 땅에 갖다 묻고 그것이 자랐을 때, 이것은 장미덤불이 되지도 않고, 개구리가 되지도 않으며, 개가 되거나 바위가 되지도 않습니다.?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당신의 씨앗이 인간의 씨앗인 이상, 당신은 당신의 ‘차원상의 성장 단계[level of dimensional growth]’가 어떤 것이든, 그에 맞춰서, 같은 형태를 지닌 채 ‘재탄생[reborn]’되는 것입니다. 만약 도토리가 화성에 옮겨다 심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성장에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그 원형이 되었던 나무와 똑같은 DNA구조를 가진 떡갈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 위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우리가 “하늘[heave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또 ‘하늘 위로 올라 간다’는 표현을 썼을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뜻하는 바는, ‘낮은 잠재력을 가진 기체들[the low potential gases]’이 ‘전적으로 높은 잠재력을 띠는 육체들[all high potential bodies]’로 구성되어 있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은 결코 ‘절대적인 제로 상태[absolute zero]’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은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자신의 잠재력을 낮춘 상태에서, ‘제로 잠재력’을 향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낮아진 잠재력의 균형점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다이어그램을 우리는 최근에 기록한 글 속에 이미 남겼습니다. 그럼 이제 떡갈나무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떡갈나무는 ‘영점 우주[zero universe]’ 속에 있는 ‘자신의 개체-기록[its own identity-record]’ 속으로, 바로 그 ‘영혼의 씨앗[its Soul-seed]’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개체-기록[identity-record]’ 속으로 완전히 확장되어 들어간 것입니다. 당신들은 떡갈나무가 ‘육체 형성[body building]’이라는 자신의 오랜 시간에 걸친 ‘행위[action]’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단지 ‘영점 기록[zero record]’ 속으로 되감겨 들어갔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당신들은 그 ‘재탄생[rebirth]’으로서의 ‘재현[reappearance]’이 단지 똑같은 떡갈나무의 ‘재-출현[re-emergence]’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죽은 떡갈나무로부터 나온 도토리를 당신의 정원에 갖다 심는다면, 당신은 똑같은 떡갈나무가 거기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떡갈나무는 죽었던 것입니까? 떡갈나무는 죽은 다음에 “어디론가 갔던” 것입니까? 당신들은 매일 밤마다 쉬기 위해서 ‘죽었을 때’,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까? 혹은 마찬가지로 당신들이 삶의 주기를 끝내고 ‘쉬게’ 되었을 때, 당신들은 “어디론가 갑니까?” 당신들은 떡갈나무가 한시라도 불연속적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당신이 정원에 심었던 ‘도토리가 전개되어 나온 것[the folded up seed]’이, 실은 똑같은 떡갈나무라는 사실을 압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웃집 정원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실은 당신의 할머니라거나, 혹은 (과거 한 때) 당신 자신의 딸이었던 아이가 아니라고 감히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인류의 하나됨[the oneness of man]’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당신들은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될 가능성을 보다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더 생각해 볼 것들


    ‘낮에 비치는 빛[daylight]’은 오직 응축된 빛일 뿐입니다. 그럼, 당신들은 논리적으로 ‘밤에 비치는 보이지 않는 빛[invisible night-light]’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정말로 당신들의 감각 범위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것들만이 오직 살아 있고, 그 이외의 당신들의 감각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들은 다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환생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의문을 갖는 것입니까? ‘한 명의 인간[a human being]’은 ‘소멸될 수 없는, 영구적인 ‘생각’의 한 단위[one unit of an imperishable, eternal idea]’입니다. 그의 육체는 그 ‘생각[idea]’을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사라졌을 때, 그것은 자신의 감각 범위 밖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지만, ‘자신의 개성(개체)[his identity]’은 혹은 그 ‘생각[IDEA]’은, 마치 ‘영원’이 연속적인 것처럼, 역시나 연속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면, 현재의 차원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당신의 육체)는, 이미 예전에도 ‘당신의 차원’에서 ‘당신’에게는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 혹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혹은, ‘그 원천[its source]’의 ‘시각’과 ‘생각’ 속에서),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8월 달에 당신이 어떤 나무에서 사과를 딸 수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10월 달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8월이 돌아 오면, 당신은 다시 이 특별히 일찍 열매 맺는 나무로부터 사과를 딸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한 번 전개되었던 모든 것들은 다시금 그 ‘씨앗’으로 되감아 들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이를 또 다시 펼쳐 내며, 영구적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합니다. 한 행성 위에서 그렇게 했다가, 이어 또 다른 행성 위에서도 그렇게 하며, 영원히, 영원히 계속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과 재탄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이들은 그저 동일한 여정 상의 두가지 지점이 아닐까요?

    당신들은 삶이 탄생에서 시작되고, 죽음에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이를 하나의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마치 확장-수축[expansion-contraction] 운동을 반복하는, 엔진 안의 피스톤 운동처럼 주기를 갖고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그렇지만 한가지는 다른 한가지 만큼이나 연속적입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게 되면, 당신들의 활동력은 반전됩니다. 그 때부터 당신들은 “죽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난 40년간 당신들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전환점[reversal point]’에서부터 당신들의 보이는 육체는 그 보이지 않는 절반을 표현해 내기 ‘시작’합니다. 그렇더라도, 육체들은 당신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시각 범위 밖으로 벗어나 버리기 전까지는, 30년 혹은 40년 정도 동안 여전히 계속해서 보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들은 그 정도의 세월에 걸쳐서 ‘기계적인 도구들’로서 여전히 계속 작동하기도 합니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즉 당신들이 지구와 공간으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어야 하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응축된 형태로서 당신들의 보이는 육체를 구현해 내는 동력은 점차 약해지겠지만, 여전히 계속 작동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의문점은 누군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사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전쟁터에 나가 사망하거나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의 삶의 주기를 완수하는 자들이 갖게 되는 장점들이 박탈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분리된 주기 속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 균형을 취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20세에 죽어서, 자신의 보이는 육체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전체 삶의 주기가 짧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당 육체의 보이지 않는 절반은 그 “작동” 시기[“work” period]가 짧아진 것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휴식 시기[rest period]’ 역시 짧게 만듭니다. 즉, 젊은 나이에 살해된 젊은이는 그가 온전한 삶을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빨리 “환생”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창조 전체에 걸친[throughout all Creation] 모든 종류의 주기에 있어서 항상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 반대되는 절반들 사이에서 동등하게 나누어집니다. 두 개의 반전 지점[the two reversal points]도 동등합니다. 육체들의 각 절반을 형성하는 응축과 확장이라는, 작용과 반작용도 동등한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쉬는 시간과 내쉬는 시간도 동등합니다. 한 인간이, 10년, 20년, 30년 혹은 4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삶”의 방향으로 자신의 육체를 응축시켜, “작용(움직임)[work]”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manifest God]’해 내게 되면, 그는 자신의 육체의 나머지 절반을 동일한 시간 동안 확장시켜, ‘쉼[rest]’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모든 주기에 있어서 응축의 시기는, 동등한 길이의 확장의 시기에 의해 뒤따라져야만 합니다. 이 법칙에 있어서 예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가지 절반의 파괴에 의해 삶의 주기가 짧아지게 되면, 그 나머지 절반에 있어서도 균형이 맞춰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반대되는 표현들의 연속적인 전개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어서 설명하게 될 몇 가지 내용들은, 당신들에게 이 원칙을 보다 분명히 제시해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러한 표현들을 “삶”과 “죽음”이라고 잘못 명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가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 둘은 하나입니다.

    나는 만연하는 기아와 낙태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방식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들이 횡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허용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악한 적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앗들”[the Godly “seeds”]은 자신들의 성장이라는 목적 속에서 봉사를 행하기 위하여, 물리적인 차원 속으로 재탄생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주위를 살펴보면 이내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에 반하는 엘리트 세력들[the Elite anti-God factions]은 이러한 ‘진입[entrance]’을 차단하기 위하여, 다수의 아이들을 죽여 나가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행성은 최소 55억명에 달할 만큼 인구 과잉 상태에 있는데, 그 중 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물리적으로 악한 의도를 지닌, 이러한 (유아 살해의) 에너지 속에 “갇혀”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헤롯[Herod]왕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기 위하여 모든 아기들을 죽였던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이 ‘우주적 형제단[the cosmic brotherhood]’을 통하여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생존을 막아내는 일이 목적인 것입니다!


    놀랍고도 새로워 보일 개념들


    당신 육체의 양쪽 절반들은 영원히 삽니다. 그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느 것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주는 살아있는 우주입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똑같은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둘 다입니다. 영혼(정신)[the spirit] 혹은 ‘재전개되는 씨앗[refolded seed]’은 절대적으로 똑같습니다.?그렇지만 그 표현 양상은, 말하자면,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육체 그 자체는, 여러가지 변화와 관련된 역학이 물질적인 수준에서 미치는 영향력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수국을 산성 토양에 심게 되면, 분홍빛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알칼리성 토양에 심으면, 파란색 꽃이 피어 납니다. 그렇지만, 그 씨앗은 똑같은 식물의 씨앗인 것이며, 또 어쩌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수국이 장미나 양귀비로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얼마 동안’ “작용(일)”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다시 ‘일’하기에 앞서 쉼과 휴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휴식이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이 살아 있는 우주의 주기적인 ‘심장 박동’은 고동치는 절반을 위해 ‘작용(일)’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주는 나머지 절반 동안 휴식을 갖는 것입니다.?그렇지만, 각각은 삶의 연속성을 표현해 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그 육체가 갖는 주기의 ‘양성적인 절반[the positive half]’의 시기 동안 ‘하나님을 현현[manifesting God]’해 내기 위해 “작용(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육체의 ‘음성적인 절반[the negative half]’의 시기 동안 휴식을 취하고(확장되고), 이 휴식으로, 다음 번에 새롭게 ‘작용(일)’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해 내는 일을 수행해 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역량을 쇄신시키는[RENEW THEIR POWER] 것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생각-파동 기록체[thought-wave recording]’로서, ‘당신들의 생각[your thinking]’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God’s thinking]’을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연속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의 기록도 연속적입니다.

    부디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피닉스 저널 제 30~37권?역주)로 불리는 책들을 첫 권부터 다시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국면들 혹은 주기들과 관련한 상세한 사항들을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의 텅 빈 지점[one voidance point]’, 바로 ‘모든 것들이 쉼의 상태에 있는[ALL IS AT REST] 지점’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기 안의 어떤 지점에도, ‘움직임의 효과[effect of motion]’로부터 ‘그 반대되는 효과[its opposite effect]’로 이어지는 이 ‘절대적인 연속성[the absolute continuity]’을 방해할만한, ‘간격이나 공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효과들[all EFFECT]’‘원인[the CAUSE]’은 영구적입니다. 만약 그 ‘효과’에 있어서, 어떤 간격이나 공백, 혹은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면, ‘원인[CAUSE]’은 영구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 당신들이 갖고 있는 한정된 인식 범위가, 당신들에게 불연속성이라는 개념을 낳은 것입니다. 당신들이 갖고 있는 “죽음”이라는 개념은 바로 당신들의 인식 범위 상에 존재하는 ‘간격’의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이를 재고려해봐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의 다음 차원[the next dimension of experience]’으로 옮겨 가려면, 그 이전에, 이 주기에 대한 이해에 반드시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연적인 사실들


    ‘영혼[the Soul]’은 ‘지렛대의 받침점[the fulcrum]’과 같은 것으로, ‘극화된 움직임의 지렛대[the polarized lever of motion]’는 ‘극화된 육체[polarized body]’를 표현해 내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극화된 육체’란 겉보기에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 것 같아 보이는 육체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반대되는 상태가 이 인식상의 분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체 우주체[the whole universal body]’도 짝을 이루는 쌍들을 이루도록 극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우주체는 당신들이 볼 수 있는 ‘물질의 압축된 빛-파동들[compressed light-waves of matter]’과 또 당신들이 볼 수 없는 ‘확장된 파동들[expanded waves]’을 다양하게 만들어 냅니다.

    극화된 육체의 좋은 예는 충전용 배터리가 될 것입니다. 배터리가 빛의 흐름(전류)으로 충전될 때, 이것은 응축되는 것입니다. 배터리가 방전될 때, 이것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응축되는 것이 극화되는 것입니다. 확장되는 것이 비(탈)극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충전 배터리’도 비극화될 수 있습니다. 혹은 쉼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깨어났을 때에는, 다시 역동적인 에너지로 완전히 충전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충전 배터리’도 비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의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배터리들이 바로 ‘육체들’입니다. 마치 당신이 자동적으로 숨을 쉬듯이, ‘육체들’은 자동적으로 재충전됩니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들은 영구적으로 살아있는 충전용 배터리들인 것입니다. 모든 ‘육체들’은 중력 중심점을 둘러싸는 밀집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력 중심점은 그 밀집 상태를 제어하는 것입니다.모든 육체들은 주기적으로 ‘공간 속 제로 상태[the zero of space]’로 사라졌다가, ‘물질을 갖춘 시각화 상태[the visibility of matter]’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삶입니다[God is LIFE]. 그 분 안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체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존재성’을 현현해 내는 것입니다. 육체들은, 그들이 표현해 내는 ‘생각들[the ideas]’이 영구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구적입니다. 모든 육체들을 동기화시키는[motivate], ‘지렛대의 받침점과도 같은, 욕구의 정지 지점[the still point fulcrum of desire]’은 모든 육체들 속에 영구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들’, 거대한 별부터 시작해서, 나비 날개에 붙어 있는 먼지 한 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육체들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영혼[the Soul]’입니다.

    생각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욕구[DESIRE TO MANIFEST IDEA]’가 바로 ‘이 우주라는 지렛대의 받침점[THE FULCRUM OF THE UNIVERSE]’인 것입니다!
    pp. 29-38.
    ……
    ……
    Last edited by wave; 2009-07-31 at 23:58. Reason: 분류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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