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아데스인들과의 접촉의 중요성


플레이아데스인들과의 접촉의 중요성은 늘 마찬가지입니다.—당신들의 영적 지위와 성장을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이미 주어졌던 것을 재차 건네주려 하는데, 왜냐하면 지금은 이를 다시 제시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처음 이러한 사항들이 제시되었을 때, 분명코 의도적인 간과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당신들의 플레이아데스 형제들과, 그들과 당신들 간의 접촉 및 교신에 관한 것인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나는 그들과 당신들과의 유대관계가 아주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유대관계는 쉽사리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싶습니다. 인간은 저마다 ‘영혼[his own spirit]’을 가진 존재들로서, 결코 죽지 않으며,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상태에서도, 영혼 자체는 잠들지 않습니다. 영혼은 지속적으로 모든 생각과 행위들을 기록합니다. 영혼은 인간에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이 영혼은 ‘창조의 영역[the Creation’s domain]’ 상의 ‘전달체[carrier]’로서, 모든 ‘인간 존재들’이 다 보유하고 있습니다.—내가 “인간 존재들[human beings]”이라고 말했음에 주의하십시오.—나는 “인간형 로보토이드들[humanoid robotoids]”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완벽함[total perfection]에 대한 조망, 모든 것들에 관한 완전한 조화[total harmony]와 평화[peace]와 인정[recognition]과 이해[understanding]와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와 아름다움[beauty]과 사랑[love]과 진실[truth]에 대한 조망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합쳐져서, ‘영적 왕국[the spiritual kingdom]’을 만들게 되고, 이는 ‘창조[THE CREATION]’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꿈”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꿈 속에서 인간들은 놀라운 세상(혹은 끔찍한 세상)을 창조해 내는데, 이는 마치 ‘창조[The Creation]’가 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세상들을 창조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의식에서 자라는 것으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합니다.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바로, ‘천상의 왕국[the heavenly kingdom]’이자, ‘창조의 영역[the domain of Creation]’인 것입니다. 옛 철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거시 우주[macrocosm]’ 속에 존재하는 ‘미시 우주[microcosm]’로 표현했던 것을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이는 왜냐하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영혼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 존재가 갖는 차원들[the dimensions of the human being]’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창조에 관한 전체적인 개념[The entire concept of The Creation]’이라도 하더라도, 당신이 그걸 모방하려고 원하는 이상, 당신들 제각각의 영혼 속에 그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차원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행복을 느낄 때, 이는 자기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자기-창조[self-creation]’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은 ‘내부적인 존재[inner being]’로부터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한 인간은 나이가 들어 늙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직 그 존재의 변이된 상태일 뿐입니다. 영혼은 늘 젊은 채로 남아 있고, 나이든 외모에 결코 종속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이해’하게 될 때, 나이는 더 이상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삶에 있어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있어서 생겨나는 어떠한 변화들도 그를 낙심시키거나 슬프게 만들지 못합니다. 지혜가 곧 빛입니다[WISDOM IS LIGHT]. 따라서, 섬광이 비치고, 빛이 빛나는 한, 어둠과 무지는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의식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지 않는 한, 한 번 “알게 된 것[known]”은, 이를 인식한 자에게 있어서 결코 다시 “모르는 것[unknown]”이 되지는 않습니다.—심지어 그런 손상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이 이를 몰랐던 상태로 결코 다시 되돌려지지는 않습니다.

‘무지’는 오직 어둠일 뿐으로, 이것은 ‘지혜의 빛’으로 극복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영혼의 표시[the mark of spirit]’입니다. 지혜는 또한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인간의 표시[the mark of human being]’로서, ‘창조의 법칙[Creational Law]’과 조화를 이루어 활동합니다. 지혜와 영혼은 동일한 것의 두가지 측면들로, 태양빛과 태양의 관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창조된 존재들은, 그들이 갖는 역량의 귀결에 따라, ‘힘[forces]’을 만들어 내고, 이 때의 힘은 ‘창조의 법칙[Creational Law]’을 따라, 그리고 ‘주어진 원칙들[given principles]’을 따라, ‘진실’과 ‘지식’과 ‘지혜’를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창조


이 때, ‘이 존재하는 힘[the existing force]’이 바로 ‘창조[THE CREATION]’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존재하는 힘으로부터, 이 우주를 통제하는 오직 한가지 존재[only one existence], 오직 한가지 창조[only one Creation], 오직 한가지 진실[only one truth], 오직 한가지 지식[only one knowledge], 오직 한가지 지혜[only one wisdom], 모두 동등한 방향성을 가지면서, 전시대에 걸쳐 남게 되는, 바로 이 한가지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확장되어감에 따라, 인간은 ‘창조[The Creation]’를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에 관한 지식은 무한정의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지혜란 바로 ‘창조의 법칙을 인정하는 것[recognition of the laws of Creation]’을 말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움직이는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와 ‘창조의 법칙들’이 바로 사랑이자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곳에, ‘사랑’과 ‘인식[recognition]’이 있으며, 사랑과 인식이 있는 곳에 창조가 있습니다. 지혜와 사랑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자 하는 인간의 내재한 바램을 증대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영혼[spirit]’과 ‘창조[Creation]’가 바로 하나이자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인간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이라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들이 사랑인 줄로 믿고 있지만, 실상 그는 자기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존재의 상태[a state of being]’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불멸이며,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영혼의 여정은 진실과 지식과 지혜와 사랑을 인정하고 알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영혼이 갖는 의무[the mission of spirit]’가 바로 진실과, 지식과, 지혜와, 사랑을 퍼뜨리는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영혼의 왕국[the kingdom of spirit]’ 안에는 엄청난 다양성을 띤 경이가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신들이 거하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믿는 ‘눈에 보이는 우주[the visible universe]’는, 창조의 이 ‘놀랍고도 무한한 영적 존재’ 속에서, 오직 티끌만한 한 지점에 불과합니다. 우주란, 창조의 무한한 영적 존재 내의, 수백만 가지도 넘는 셀 수 없는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오직 ‘무한 속에 찍어둔 점 하나[only a dot in infinity]’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은, 감히 다 측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인간의 지능과 역량으로 파악하기에는 오직 혼동스러울 따름입니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우주 전체는 그저 많은 우주들 가운데 하나의 우주로, 실상 우주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우주들 안의 우주들[universes inside of universes]’, ‘우주들 위의 우주들[universes above universes]’, ‘우주들 아래의 우주들[universes below universes]’, ‘우주들 반대편의 우주들[universes opposite universes]’, ‘우주들 바깥쪽의 우주들[universes outside of universes]’이 존재하며, 그들 모두의 ‘첫번째 원인자[first Cause]’로서, ‘위대한 전능의 지능체[Mighty All-Powerful Intelligence]’인, ‘창조[The Creation]’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원초적인 힘[original forces of existence]’을 가진, 이 창조라는 ‘거대한 영혼[this immense spirit]’에, ‘인간의 영적 지능[the spiritual intelligence of the human]’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영적 지능체의 ‘조각[fraction]’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인간들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형태로 인간들 안에, 바로 ‘창조’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식의 곤란


수백만,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다 봅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바라다 볼 때, 완전히 새로운 세상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수많은 책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천문학자들이 보고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볼 수 없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관심을 갖지도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아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하늘을 바라다 볼 때조차 그러한 것입니다. 일반인들과, 영적으로 고양된 사람들 간의 관점의 차이도 이와 꽤나 유사합니다. 영적인 삶을 살고, ‘창조의 법칙[Creational Law]’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주위의 모든 것들’을 보고 인식합니다. 개개의 생명체 안에 내재한 것, 모든 대상들, 모든 생각과 행위들, 모든 창조물들에 내재해 있는 것, 모든 자연물들에 내재해 있는 것, 또한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상황들과 사건들,,, 말하자면 ‘창조[THE CREATION]’를 보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영적으로 위대하며, 건설적인[spiritually great and constructive]’ 존재입니다. ‘모든 무한한 창조적 구성체[all the infinite Creational build-up]’인, ‘영혼[The Spirit]’은, 인간 자신의 가장 내밀한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그저 각종 한계들로 가득찬 존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자신의 틀이자, 한계를 띤 물질적 육체로서, 물질적으로만 표현된 것입니다. 이는 노동과 고통의 원천이자, 인식과 의지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한 존재가, 물질적인 시각을 가지고서, 자신의 내면의 존재를 바라다 보려 할 때, 그는 오직 ‘형태와 모양’만을 관찰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영적인 인식의 눈[the spiritual eyes of cognition]’을 뜨고 바라다 볼 수 있다면, 그는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밝혀 보여주는 의식[all-revealing consciousness]’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고, 또 이러한 ‘의식’이 비단 자기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 속에도 내재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타인들이 이를 모르더라도, 그는 아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자는 자기 주위의 모든 생명체들과 창조물들을 대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때의 그는, 단순히 다른 남자나, 여자, 혹은 아이들을 바라다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존재들[carrier of Spirit]’로서, 그들 각각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들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는 이들 영혼들, 오직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스스로의 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여주기를 바라는 이들 영혼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물들을 다 박탈당한 채, 고국에서 추방되어 쫓겨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안에 내재해 있는 영혼을 그로부터 추방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이 창조의 조각[this portion of Creation]’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 그는 단 한 숨도 쉬지 못하며, 단 한가지의 생각도 품을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 그는 그 어떠한 것도 인식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전 시대에 걸친 위대한 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 온 것입니다. : “‘창조의 영혼[The Creation spirit]’은, 그 창조물에게 있어 자신의 숨결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있다.”

영혼은 눈 앞에 비춰지는 빛이 없이도, 귀나 팔이나 다리가 없이도 살 수 있으며, 심지어, ‘외부적인 인식[outer reason]’이나 ‘의식[consciousness]’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 너머에는 늘 ‘창조적 힘[the Creational force]’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영적 지각[spiritual intellect]’에 더 많은 빛이 비춰지면, 그의 ‘인격[personality]’은 더 많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를 형성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점차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자들은, ‘영적 지각 전체[the whole spiritual intellect]’를 볼 수 있게 되고, 모든 것에 들어 있는 ‘창조의 현존[The Creation present]’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공간”[“space”] 상에서는 저마다 분리되어 있지만, ‘창조[The Creation]의 영역’ 상에서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가 ‘창조’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잘못된 교리에 의해 오도되거나, 속임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창조[his Creation]’와 접촉을 갖는 인간은, 모든 공간과 시간 상에 있어서, 또 모든 물질적 상태 안에서, ‘자기자신을 깨달을 수[realizes himself]’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다른 모든 대상들 속에 있는 ‘창조성[The Creational]’을 일깨워 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는 인식과 경험을 통해, 다른 대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모든 것 속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서, 그 내재한 영혼에 의해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은 모두 안에서 하나[everything is one within all]’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존재는, 모든 물질들과,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과, 그리고 이 우주와 더불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진실’로부터 생겨났으며, ‘진실’로부터 번성하고 있고, 영원한 시간대에 걸쳐 ‘진실’로부터 번창해 나아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진실’로부터, 그는 모든 것들, 모두들, 그리고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존재들은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돈과, 자신의 소유물과, 자신의 재산과, 자신이 내뱉는 말과,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자신을 인식합니다. 반면, 모든 것들을 통해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자의 경우엔, 어떠한 증오도 욕심도 그 자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기심에 바탕한 어떠한 차별행위도 더는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오직 내재적 인식을 통해서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아무도 당신이 이러한 지식을 갖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어쩌면 아무도 ‘진실’을 알길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결코 이 같은 어두운 전망 속에 낙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지구 인간들의 영적 진화 과정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앞을 향해 전진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타인들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눈과 귀를 가진 자들은, 당신이 울리는 ‘종소리’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앞에 내던져진 거짓된 전망들이 당신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왔습니다. 인간들은 진실을 발견하고 진실을 기꺼이 알기 위해서 육체적인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탐구 과정이 지혜와 진실 속에 머무는 이상,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자녀들을 곤궁한 상태 속에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악마적인 에너지의 부정적인 영향력[the negative influence of the Satanic energies]’은, 존재의 물질적인 측면의 부족을 채우려 드는 자들이 갖는 불안감을 결코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어 없어질 구성물들은, 그 어느 것도 불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영혼[the soul]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물질적인 형태를 갖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영혼입니다.

이 글이 너무 길어지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장[Chapter]’이라고 부르는 생각의 그룹으로, 글의 내용들을 얼마간 묶어 제시하는 편이, 주어진 정보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이 글을 끝맺기 전에 다음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습니다. ; “당신들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정말로, 당신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지구에 찾아 온, 불쌍한 “작은 그레이 외계인들[little gray aliens]”로부터 제시되는 것들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축복과, 지혜 속의 평화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Salu and Saalome]. 부디 당신들의 눈과 귀를 통해 건네지는 이 ‘말씀[the WORD]’이, ‘이해’ 속에 받아들여지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창조’와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하셨던 놀라운 약속의 현현에 당신들의 영혼이 깨어나길 기원합니다.

하톤은 물러갑니다. 진실을 듣고,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임무가 완전성과 명료함 속에서 완수 될 수 있도록, 부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AHO.
pp.1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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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아데스인들의 관점


항상 ‘논리적인 흐름 체계[logical chain of command]’가 존재합니다.—당신들이 “통과의례[right(rite) of passage]”라고 부르는 것처럼, 단순히 때가 되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참된 지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고력을 보유한 생명체들[thinking forms of life]’이 존재하는 곳은, 그 어디라도, 체계화된 법률이 존재합니다. 해당 종의 지도자들의 영적 성장 수준에 따라, ‘진정한 자연법[true natural law]’에 따른 법률을 채택해 나가게 되며,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입각한 이러한 법률[human-natural law]을 책임감있게 준수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법률들은 ‘자연적인 논리[natural logic]’에 따라 취해지는 것이지,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와 같이 비논리적이고 원시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각 나라들의 경우, 순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권력자들이 법률을 만듭니다.—대개 통치자들이 제시하는 이러한 법률들 앞에 저항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당신들은 그저 무력하게 이에 굴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도달하게 된 이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막론하고, 법은 존재합니다. 내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창조의 법칙[the Creational laws]’이 점차 자명해질 수 밖에 없는 곳에서, 다른 형태의 법률들은 소멸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고도의 영적 수준[very high spiritual levels]’에 도달한 사회에서만 발생하게 되는데, ‘순수하게 영적 환경[pure-spiritual spheres]’을 이루고 사는 사회에서, 물질주의는 오직 과거지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형태를 띤 생명체들은 그들의 존재 수준에 걸맞는 법률들을 초월한 채 살아가기란 힘든 일이고, 항상 무수히 많은 실수들을 저지르며, 또 그러한 실수들에 영향 받고, 그러한 실수들이 반영된 법률들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사회가 진보하여, 그들 자신들이 행해 온 행태들을 이젠 다른 종들에게 넘겨주게 될 때, 즉, 여전히 ‘악’과 ‘파괴’가 횡행하는 다른 행성들에게 자신들의 구태를 물려주게 될 때, ‘보다 높은 수준의 권위[a higher level of authority]’와 우주적 법칙[Cosmic law]의 큰 그림들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플레이아데스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성장[Growth]’이란, 거의 전적으로, 보다 높은 영적 수준으로의 성장을 의미하며, 결론적으로 ‘보다 인간적인[more humane]’ 성격을 띠는 것으로, 결코 이 시대의 당신들의 법률 체계에 따른, 당신들의 관점에는 부합되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어떠한 형태의 공평한 정의 체계[no form of equality of justice]’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죄[“heavy” crimes]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어떤 범죄에 대해서, 플레이아데스의 법률 체계에 따르자면, 당신들의 야만적인 관습에서와 같은, 사형이라든가, 혹은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형태의 처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또한 법률 체계 상에서, ‘정의를 사고 파는 것[buy/sell justice]’과 같은 거래행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높은 수준의 에너지체[The higher energy forms]’는 이처럼 ‘오류를 범하기 쉬운 대상들[fallible creatures]’을, 배타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로 이 목적에 따라 마련된 세상들로 보내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성[same sex]을 가진 자들은 동일한 공간으로 보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식이 차단되어, 그들의 후손들이 생겨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으로의 유배자들은 스스로의 수완으로 그 곳에서 살아가야 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은 자기가 알아서 충족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발달된 기계나 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일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조건이 지켜질 수 있도록, 유배지인 세상은 통제되며, 오랜 수감 기간 중, 비밀스럽게 만들어낸 것들도 박탈됩니다. 나아가, 다른 이들과의 접촉도 차단되며, 수감자들은 유배된 행성 시스템 안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플레이아데스 시스템 안의 어떤 행성들의 경우는, 이 오류를 범하기 쉬운 자들을 큰 섬들로 보내기도 하는데, 해당 사회 안에서 저지른 잘못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가벼울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벌 방식은 사회의 안전을 지켜주고, 동시에 범죄자들의 수감에 따른 사회적 부담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처벌은 인간적인 방식이자 적절한 방식도 되는 것이, 범죄자들의 ‘성장’ 과정 역시 방해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급들이 혹시 당신들의 기원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기 시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어쩌면, “감옥” 행성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개선과 개량과 재활을 위한 “반성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십니다. 이들의 재활 노력을 가이드하고 돕기 위해, 스승들과 안내자들, 간수들과 보호자들도 늘 함께 보내지는 것입니다.—그러다가, ‘졸업의 시기’를 맞게 되고, ‘진실’과 ‘옳은 행동’에 대한 각성과 재활이 성취되었을 때, 이 “수감자들[inmates]”은 자리를 옮기게 되고, 아직 배움에 이르지 못한 부적절한 수감자들은, 또 다른 적절한 시설로 보내져, 그 곳에서 그들이 ‘우주적 행동[Universal behavior]’에 대해서 완전히 깨우칠 때까지 수용되는 것입니다. 행성 지구 안에 있는 대부분은 범죄자들은 그들이 머물러 있는 감옥 안에서는 결코 ‘진짜 인류의 범죄자들[real criminals of humanity]’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짜 범죄자들은 거짓된 가르침들을 만들어 낸 자들이자, 이들이 바로, 불공정과 폭력과 영혼의 타락을 야기하는 해로운 법률들을 입안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먼 옛날에, 비단 우리 종족들의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우주의 다양한 세상들로부터 온, 여러가지 ‘과오를 범하기 쉬운 자들[fallible creatures]’이 당신들의 행성, 지구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당신들이 가진 것과 같은 “날짜”와 “달력”을 현재 우리는 갖고 있지 않는데, 단순히 “멀고 먼 옛날[a long time ago]”이라 언급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플레이아데스 시스템 안에서, 행성들간의 여행과 상호 교류가 생겨난 이래로, 우리 시스템 안에 있는 행성들 간의 법률 체계는 서로 많이 비슷해져 갔고, 오늘날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공통된 목적에 따른 서로간의 의견 교환도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족들은 일부일처제인데, 이 문제에 관한 철저한 정리 작업을 거친 이후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실수들을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플레이아데스의 생명체들도 당신들에 비해, 아주 특별히 더 진보된 존재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러한 실수들은 제거되어 나갈 것입니다. 후손들은 ‘최고 위원회[the highest council]’를 통해 규제되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 범위를 고려하여, 신생아들의 수를 한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 준수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여, 인구 과잉 없이 적절한 수의 종족이 유지, 보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책임있는 “행위들[ACTIONS]”를 통해서 통제하는 것이지, 인위적인 방식의 “통제”나, 특수한 장치들 혹은 “사고”로 인한 생명체들의 파괴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행위들의 완전한 준수가 행해지기에, 어떠한 “사고”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그들의 ‘삶-경험 주기[life-experience cycle]’가 지속되는 동안, 그 유대 관계를 유지합니다. 혼전에 당신들이 주의깊은 상호간의 이해와 우애관계를 돈독히 하게 되면,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한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할 행성 위에서, 완전한 책임감을 가지고서, 또 ‘균형과 조화의 법칙의 테두리[the boundaries of Law of balance and harmony]’ 안에서 서로간의 우애를 갖고 살아가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욕망이나 권력, 그리고 사회적 필요에 따라 생식 행위가 행해지게 되면, 그 사회는 ‘큰 틀’ 바깥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식은 진지한 의도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서 깊은 책임감 아래 행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플레이아데스인들의 수명은 수백년에 수백년을 더한 정도가 넘기 때문에, 이러한 규율을 수세기가 넘는 시간대에 걸쳐 준수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플레이아데스인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문명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하고 있기에, 균형잡힌 행성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사항들은 엄격히 지켜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를 들자면, 지구와 같은 장소로 거처를 옮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겁지 않은 범법행위를 저지른 자들도, 일단은 당신들이 “감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행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그 곳에 머무는 것이 더 이상 자신들의 일탈행위에 걸맞지 않게 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말하자면, 충실히 재활 과정을 마친 자들은 “졸업”의 날을 맞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성에서조차 불균형한 채로 머물러 있게 되는 자들에게는, ‘보다 더 어두운 형태의 경험들[the darker forms of experience]’이 요구되기에, 이 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예를 들면, 당신들의 행성과 같은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보다 높은 차원적 가치와 밀도[higher dimensional values and density]’로 나아가는 진화 과정이 있게 되며, 완전히 성장한 자들은 이 ‘고차원적 가치 / 밀도’와 더불어 ‘이동[transverse]’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부정적인 양상을 띠는 생명체들은 또 다시 격리되어, 적절한 “교실”에 배정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돌보는 ‘안내자들과 간수들[guides and wardens]’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나면, 자신들의 성장 정도에 따라 보다 높은 경험의 장으로 나아가는 일이 허락되기도 하고, 또는 단순히 ‘하나님-근원[God-Source]’으로 되돌아 가기도 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양질의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플레이아데스로 되돌아가서 살길 바라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많은 자들은 ‘션의 광채[Radiance of Shan]’ 속으로 들어가게 될 지구에 남아, 지구와 함께 살아가길 바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되돌아 가길 바라거나, 혹은 배움과 재창조를 위한 ‘치유 행성[healing planet]’으로 변모되어, ‘살아갈만한 공간[habitable placement]’이 될 이 곳에 남길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앞서 “일부일처제[monogamous]”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책임감 없는 성적 행위는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 명의 파트너들이란 결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간의 배려와 평생에 걸친 조력이 필요한 사람들은 저마다 적절히 돌봐지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욕망 충족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을 위해서, 혹은 탐욕이나 성적 일탈과 같은 목적으로 성적 행위가 ‘사용’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결혼과 창조는 가장 고결한 행위로, 모든 측면에 있어서 가장 주의깊게 다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사랑과 그에 따른 에너지의 교류가 아닌, 그저 일탈적인 “행위”만을 일삼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경우에 따라서는 배우자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가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신체적, 성적 행위가 이러한 관계에 개입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무책임한 행동에 따라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이러한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각종 질병들도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의 ‘이혼’은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직 최악의 경우, 말하자면, 부부 가운데 한 명이 유배지로 추방되는 경우와 같은 때에 한해서만 허용됩니다. 실로 가장 드문 일 가운데 한가지가 이혼입니다. 우리의 법률은 수년천도 넘는 시간에 걸쳐 조화로운 균형 속에 지켜져 왔습니다.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 다른 세상에 대한 사랑은 무엇인가?


그럼, 그와 같은 사랑은 무엇일까요? 당신들은 어쩌면 내가 다르마[Dharma]를 사랑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남성을 대표하고, 그녀는 여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하지만, 행성 시스템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인 우리 호스트들은, 실상 그러한 사랑의 표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은 고차원 상에서는 심지어 발생하지도 못합니다. 사랑은 모두를 ‘포섭’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벌리[Oberli]를 사랑하고, 꼭 그만큼 레노스[Ranos]도, 일즈[Ilsie]도, 데일렌[Daylene]도, 다르마[Dharma]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라도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높은 이해 수준에 따른 사랑[the Love of higher understanding]’에 감명받게 되었을 때, 그 어떠한 지구상의 경험도 이 경험에 비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적인 경험으로서, 인간들이 물리적인 형태의 존재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당신들은 단순히 이를 잊어버렸습니다.

당신들이 흔히 언급하는 사랑은, 단순히 타인에 대해 ‘반해 있는 상태[infatuation]’입니다.—전적으로 신체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며, ‘감정적 성취[emotional fulfillment]’의 놀라운 아름다움은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감정적 성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쾌락’을 대신 갖다 놓기 때문입니다. 두 영혼 간의 결합이 있게 될 때,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사랑[LOVE]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사회 시스템 상에서, 신체적인 결합만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 당신은 오직, 정신적인 황폐함과 질병이 들끓는 자기자신만을 발견하게 될 따름입니다.—어떠한 평화도, 만족도 성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당신은 오직 나쁜 습관만을 가지게 되고, 그저 또 다른 상대를 더 건드려 보려는 욕구만을 갖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의 인간들은, ‘사랑[LOVE]’과 ‘사랑[love]’간의 차이점을 잊어버렸습니다. 긴 여정 가운데 있는 아이들인 당신들이,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는 ‘사랑[LOVE]’을 느껴 볼 방법이 없습니다.—당신들의 계산상으로 치자면, 나는 이미 수천살이 넘었고, 당신들은 그저 아기들 혹은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의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될 점이 있다면, 실상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영겁에 걸친 시간[eons of time]’동안 나와 함께 걸어 왔지만, 단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당신들이 내게 끌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같은 정수[the same essence]’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바로 그 ‘같은 정수’라는 것이, ‘완전함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사랑의 진실[THE TRUTH OF ETERNAL LOVE IN ITS WHOLENESS]’입니다. 나는 내 존재와 내 소유의 모든 것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주고, 당신들을 위해 이를 건네 주고, 또 당신들과 함께 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그리하면, 그러한 ‘선물’에 대해 되돌아 오는 것이 또 다시 내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가 된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성취해 내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랑[LOVE]’이 바로 ‘진실[TRUTH]’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님[GOD]’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떠한 관계이든 그 속에서 자신이 배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관계를 부러워합니다.—단지 자기 자신만을 빼놓게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self-orientation]’ 사고를 놓게 될 때, 오직 그 때에만, 그는 마치 ‘하나님의 사랑[God-LOVE]’이 표현되듯, 그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른 것 대신[all is in behalf of the OTHER]’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러한 형태의 자연의 사랑[LOVE OF THAT KIND OF NATURE]’은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따름입니다. ‘관계의 완전성[the fullness of the relationship]’은 다른 것에서부터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 저마다가 ‘모든 것들을 내어줄[GIVING ALL]’ 때, 모두가 다 ‘받게[BE GIVEN]’ 됩니다.—‘각자각자는 저마다의 완전함 이상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EACH MORE THAN HIS WHOLE].’

‘각자’와 ‘모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끌어 당기는 ‘마음의 힘[mind power]’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주의할 것을 권합니다.—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불운한 것도 충분히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넘어서게 될 때, 당신은 ‘진실[truth]’을 발견하게 되고, 또 ‘모든 지식[all knowledge]’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평화와 안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삶의 진실[truth of life]’이 갖는 의미는, 오직 “주는 것[giving]”과, 적절히 “받는 것[accepting]”, 그리고 ‘감정적 동등성[emotional equality]’의 “상호 교환[exchanging]”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택에 따른 자유의지[FREE-WILL THROUGH CHOICE]’, 그리고 ‘하나님과의 하나됨으로의 회귀[THE RETRUN UNTO THE ONENESS WITH GOD]’, 이는 바로 당신들의 타고난 권리[BIRTHRIGHT]입니다! 모든 다른 것들은, 그저, ‘신성 속의 진실[TRUTH IN GOD-NESS]’을 성취하기 이전에 겪는, 배움의 “여정[THE TOURNEY]”일 뿐입니다.

물리적인 존재는 오직 물리적으로 시각화 되는 것을 보게 되지만, ‘보다 높은 정수[higher essence]’의 존재는 오직 영적인 것만을 보게 됩니다. 나는 당신들의 ‘영혼의 정수[the soul essence]’를 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물리적인 것인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물리적인 경험 속에 있는 자아 너머의 것을 볼 수 있으며, 육체를 가진 인간들이 물리적인 경험으로부터 받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렇지만, 내가 당신들을 들여다 볼 때, 정작 바라다 보는 것은 당신의 영혼인 것입니다.—따라서, 당신이 목욕하는 것을 엿보지나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영혼과 회합을 갖는 것이지, 신체와 회합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당신들이 받게 되는 ‘물질적인 영향’을 이해합니다.—하지만 이를 극복해 내야 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그것은 내 관심 사안이 아닌 것입니다.—예외가 있다면, 내 관할권 안에 있는 자들, 즉, ‘내 명령 체계 아래에서 일하는 일꾼들[workers within my Command]’에게 미치는 영향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내가 직접적인 통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앞서, 분별력을 갖게 되길 내게 요구해 오는 상황에서만, 나는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나의 형제들도, 경고의 말을 건네고, 이 임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는 정도 이상의 개입을 할 의도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신론[GODLESSNESS]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차원의 우주 형제들과의 회합과 더불어 다가올 ‘변환[transition]’에 참여하려는 의향을 가진 자들, 혹은 보다 특별히, 다른 차원의 상위 에너지와의 관계 속에 ‘변환[transition]’에 참여하려는 의향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법칙[God’s laws]’과 ‘창조의 법칙[The Creation’s laws]’ 양쪽 모두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모범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욕망과 탐욕은 생길 것입니다.—그러나 일련의 주어진 상황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우주적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이를 두고, 우리가 당신을 “배척한다거나[kick you out]” “소외시킨다고[isolate you]” 말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당신입니다.—우리가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을 언제든지 변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를 “속일[fool]”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영혼의 의도[soul intent]’만이 고려대상이 될 뿐입니다! 과거의 잘못들? 그건 그저 과거지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있어서, 모든 법칙들의 적용에 있어,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이러한 법칙들에 대한 일탈이 의도적인 것인지”의 여부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법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약속하건대, 만약 당신이 계속 ‘사탄의 덫[Satan’s trappings]’에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은 ‘신성으로 향하는 문들[the gates into Godness]’을 통해, ‘당신의 다음 여정[your next journey]’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칙들을 배우고, 법칙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이 멋진 변환의 시기에 가장 값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아데스인들은, 자신들의 균형잡힌 삶을 어지럽히게 될, 어떠한 무책임한 인간들도,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들로 원치 않습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띤 인간들이 받아들여질 여지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휴거 (종교적 도취) 시나리오[RAPTURE SCENARIO]”를 전적으로 다시 고려해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릇된 물질주의[ill-using physical-ness]’에 빠져 있다면, 내가 “보다 높은[higher]” 차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고 또한 너무나도 분명히 ‘하나님’과 관련하여, 당신은 물리적으로 어떤 곳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들어 올려지지[rapture]”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악한 의도[EVIL INTENT]’도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간의 몸[human format]’을 가진 ‘행성간 존재[inter-planetary beings]’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은 인식상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높은 수준의 배움[higher learning]’을 얻게 된 존재들이, 종종 보다 낮은 진동 수준으로 변모되어, 당신들이 대개 “애정[love]” 관계라고 일컫는 “보다 낮은” 진동 상태에 참여하기도 합니다.—그렇지만, 이 때 비록 신체적인 행위를 수반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그러한 수준의 물질적인 문제만으로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 “보다 낮은[lower]” 존재는 빠른 성장을 보일 수도 있으며, 또는 양쪽 모두에게 큰 고통이 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다 높은” 존재는 ‘영혼의 진실[soul truth]’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타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이는 종종 발생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어떤 존재들, 예를 들면 플레이아데스에서 온 존재들은, 당신들이 사는 곳에 ‘순환 임무[rotations of duty]’를 맡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파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기억 상실로 인해, 이들이 당신들의 환경에 종속되기도 합니다. 종종 이들은 행성 지구의 환경과 이 곳에서의 행동 방식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종종 높은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훌륭한 “수신자들[receivers]”도 지구의 환경에서 길을 잃게 되면, 당신의 행성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캡슐[dense capsule]’처럼, ‘자기 중심적인 에고[ego state]’를 갖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열린 상태’로 바꾸는 것은 실로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자들이 극히 최근에 와서야 겨우 ‘순수한 교신[purity of communication]’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적절한 시퀀스[proper sequence]’에 따라 ‘봉사[serve]’할 수 있도록, 초반에는 단순히 ‘열리지’ 않았던 것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조각들[each fragment]’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적절한 경험의 시퀀스에 따라 봉사하게 됩니다.—‘학생들’은 ‘변화’를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필요한 배움[the learning requirements]’의 일부이자, 또한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각각은 ‘변환[transition]’의 시기, 이전에 ‘가르침들[lessons]’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낡은 것들은 벗어 던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이 지은 죄와 잘못들에 대해, 당신을 ‘실수로’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당신이 지은 잘못에 대해 대신 책임져 줄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인 경험들 속에서 당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이에 답변을 해야 될 자는 바로 당신입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바로 당신입니다!!
pp.149-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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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30권, “PLEIADES CONNECTION - Return of The Phoenix. Volume I”, 제 3, 12, 17장, pp. 28-34, 103-110, 1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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