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된 법리주의 원칙들
만약 누군가 유태인들의 학살이 이미 뉘른베르크[Nuremberg] 재판정에서 “증거”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 재고해 봐야 될 것인데, 왜냐하면, 당시의 재판은 건전한 법리주의 원칙들이 완전히 무시된 채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고소자들이, 동시에 검사이자, 재판관들이며, 또한 형벌 집행인들로서 활동했습니다. (판사들 가운데는 물론 러시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 가운데는 15,000명에 이르는 폴란드 장교들의 학살 사건도 있었고, 사망자들의 시신 가운데 일부는 스몰렌스크[Smolensk] 근처 카틴 숲[katyn Forest]에서 독일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출신 검사들은 바로 그러한 학살행위조차도 모두 독일측에 떠넘기려고 시도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바로 소급 법리[ex post facto legislation]가 만들어졌는데, 말하자면, 누군가가 일련의 행위를 이미 완료한 후에라도, 그것이 범죄행위였던 것으로 추후에 선언된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 가장 기본이 되는 법리상의 원칙이 있었다면, 그건 범법행위 당시 유효했던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에, 오직 그러한 행위 당사자만이 기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법률없이 형벌없다[NULLA POENA SINE LEGE]”는 원칙(죄형법정주의).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명확성을 갖고서 옳은 구형이 내려질 수 있도록, 지난 수세기에 걸쳐 발전되어온 영국의 법리 체계인 ‘증거 재판 주의[The Rules of Evidence]’ 역시 뉘른베르크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재판정은 증거재판주의의 기계적인 적용에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선언되었고, “증거 제시력을 갖춘 어떠한 증거”라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유죄판결만을 용이하게 만들어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설에 따른 증거나 문서들도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정상적인 재판 과정에서라면 신뢰할 수 없는 증거로 간주되어 항상 기각의 대상이 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거들 조차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심각한 문제점을 낳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대량 학살이라는 전설이, 그저 위조된 몇가지 “진술서들[written affidavits]”을 근거로도 얼마든지 입증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재판 과정 동안에 오직 240명의 증인들만 소환되었을 뿐이고, 비록 유죄를 입증해 줄만한 “진술서들”은 30만장이나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모두 선서를 하고 난 뒤 작성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어떠한 유태인 추방자들이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자들이라도 저마다 원하는 만큼 보복적인 진술과 주장들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믿기지 않는 일 가운데 한가지는,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의 방어측 변호사들에게는 기소측 증인들에 대한 상호 검증[cross-examine]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공정한 일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에서도 만연하였는데, “만약 관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아이히만의 변호사의 발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중단 명령이 내려질 수 있었고, 이는 결국 그가 아이히만의 무죄를 입증하기 시작할 때면, 번번히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내막이 공개된 것은, 미국 출신의 판사이자, 당시 펼쳐졌던 여러가지 재판들 가운데 한 사건의 재판장 역할을 맡았던, 베너슈투름[Wenersturm] 판사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는 진행되던 재판과정들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져서 곧 자리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되돌아 갔으며, 자신이 왜 그 재판에 대해 반대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열거한 내용들은,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cf. 마크 라우트른[Mark Lautern], 뉘른베르크에 대한 최근 언급[Das Letzte Wort uber Nurnberg], p. 56.) 그가 제시한 사유들 가운데, 3항에서 8항까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3. 검사국[the department of the Public Prosecutor] 위원들은 재판의 기초가 될 법리 원칙들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개인적인 야망과 복수심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4. 기소측은 방어하는 측에서 재판을 준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고, 증거 제출도 불가능하도록 막았다.
5. 테일러 장군[General Taylor]에 의해 주도되었던 한 기소에서, 그는 자신의 직권을 이용해 군사 재판정에서 만장일치 판결이 나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고, 미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문서화된 증거자료들이 법정에 제출되는 것도 막기 위해, 워싱턴에 이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다 썼다.
6. 뉘른베르크 재판정에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 90퍼센트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에 있어 편견을 가진 자들이었고, 이들이 소송을 주도했다.
7. 군사 재판정에서 공식적인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미국으로 귀화한 것을 증빙하는 서류들을 방금 막 만든 채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맡은 일이 행정적인 서비스였건, 번역 업무였건 간에, 모두 기소된 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8. 뉘른베르크 재판의 실제 목적은 바로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총통[Fuhrer]이 저지른 범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목적은 동시에, 재판이 명령에 따라 진행되도록 만들어 주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만약 내가 뉘른베르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7달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pp.1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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