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과장들
지금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이유로, 독일을 상대로 그 첫번째 비난의 화살을 던진 사람은 폴란드계 유태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으로, 이러한 내용을 다룬 그의 책, ‘유럽 점령지에서 동맹국들의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는 1943년 뉴욕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점에, 렘킨은 이후, “인종차별주의[racialism]”를 금지하는 U.N. 제노사이드 협약[U.N. Genocide Convention]을 기안했습니다. 자신의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치는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수는 어쩌면 6백만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책이 출간된 1943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학살 행위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은 단지 1942년 여름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비율로 학살이 계속되었더라면, 1945년까지는 전세계에 있는 모든 유태인들을 다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이후, 그러한 과장은 점점 더 심해져서 놀라운 수치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반나치주의자이자, 한 때 자신이 독일 비밀 경찰 조직[the S.S.] 안에 몰래 잠입해 들어갔었노라고 주장하던, 커트 거슈타인[Kurt Gerstein]이라는 자는, 레이몽 까르띠에[Raymond Cartier]라는 프랑스 심문관에게 말하기를,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4천만명이라는 숫자를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들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1945년 4월 26일, 자신이 첫번째로 내놓은 비망록에서 그는 이 수치를 2천 5백만명으로 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가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들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았기에, 1945년 5월 4일, 로트바일[Rottweil]에서 출간한 자신의 두번째 비망록에서는 다시 6백만명 정도로 하향 조정했고,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Nuremberg Trials]에서도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거슈타인의 누이는 선천성 정신 이상을 앓았고, 안락사로 사망했는데, 이는 거슈타인 자신에게도 어쩌면 정신 이상 증세가 발병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갖게 해 줍니다. 하지만 이는 물론 순수한 추정에 불과할 뿐입니다.?어쩌면 그가 단지 숫자를 잘 셀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는 1936년에는, 우체국에 이상한 우편물을 보낸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위의 두 번의 “자백”을 한 후, 파리의 ‘셰르셔 미디 프리종[Cherche Midi Prison]’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그렇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계속 살아 남았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에 그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정보를 한 독일 남작을 통해 스웨덴 정부에 알렸지만, 몇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원인들로 인해, 자신의 보고서가 “날아가고 잊혀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1942년 8월, 베를린에 온 교황 사절단[the Papal nuncio]에게 이 “학살 프로그램”의 전모를 알렸지만, 당시 참석해 있던 성직자로부터 들은 말이란 오직 “나가시오”라는 대답 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들 가운데는 엄청난 규모의 대량 학살(벨제크[Belzec]에서 하루에 만2천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등)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이야기들로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두번째 비망록에서 서술한 내용의 일부이기도 한, 1942년 6월 6일 히틀러가 폴란드에 있는 한 강제 수용소에 직접 방문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도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미국에서 선거가 임박한 10월달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전하는 놀라운 뉴스를 가리키는 말--역주)”의 일종인가요!?
거슈타인의 이 환상적인 과장들이 미친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들은 대량 학살에 관한 주장들을 불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베를린의 복음주의 주교[Evangelical Bishop]였던 빌헬름 디벨리우스[Wilhelm Dibelius]는 그의 비망록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폄하했습니다. (H. 로트펠스[H. Rothfels],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목격자 보고[Augenszeugenbericht zu den Massenvergasungen]”, “현대사 계간[Vierteljahrshefte fur Zeitgeshichte]”, 1955년 4월호.) 다만, 거슈타인이 “목격자들 가운데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의미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폄하에도 불구하고, 1955년 독일 정부는 거슈타인의 두번째 비망록을 독일의 각급 학교에 배포하였습니다.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문서[Dokumentation zur Masenvergassung], 본[Bonn], 1955). 그리고 이 배포 자료상에는, 디벨리우스[Dibelius]가 특히 이에 대한 신뢰를 표했다는 언급과 함께, 비망록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치의 대량 학살에 대한 근거없는 주장이 독일에서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특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료로 채택된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전쟁 중 6백만명에 이르는 유태인 학살의 이야기가 최종적인 신뢰성을 얻게 된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중 빌헬름 홰틀 박사[Dr. Wilhelm Hoettl]의 진술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아이히만[Eichmann]의 조수로서 일했지만, 실상은 미국 정보 기관을 위해 일했던 수상한 인물이었으며, 발터 하겐[Walter Hagen]이라는 가명으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홰틀은 또한 동시에 소련의 첩자로도 활동했으며, 페르거[Perger]와 페르버[Verber]라는, 비엔나 출신의 두 명의 유태인 이주자들과도 공모관계에 있었습니다. 한편, 이 둘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예비 심문 과정에서 미군 장교들로 활동했습니다. 이 지극히도 정체가 모호한 인물이었던 홰틀이라는 자의 증언이, 6백만 유태인 학살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1945년 11월 26일에 한 진술에 따르면, 자기가 알고 있던 사항은 아니었지만, 1944년 8월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도합 6백만명의 유태인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아이히만은 자신의 재판에서 이러한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홰틀은 전쟁 후반부 전기간에 걸쳐서, 미국의 첩자로 활동했었기에, 그가 하이드리히[Heydrich]와 아이히만[Eichmann]의 직속에 있었으면서도, 애초에 유태인 학살 정책에 대해서 미국인들에게 최소한의 힌트조차 준 적이 없었다는 점 역시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