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저널, Phoenix Journals - 당신은 누구인가?
  •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존재하는가? 당신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물론, 영혼[SOUL]을 가진 모든 개개인들이 그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입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표현 상태에 있어서, 오직 ‘영혼이 없는 자들[soulless]’, 혹은 ‘거의 영혼이 없는 자들[near-soulless]’만이 자신들의 삶의 궁극적인 탐구 과정상에 있어서 이러한 의문들을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는 내가 처한 위치에 대해서도, 내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중심과 축을 잡아주는 “적절한”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는 “인간”이라 불리우는 ‘화학적 구성체[mechanical fabrication]’가 아닐 수도 있고, 또는 그 자의 경우, ‘영혼’이 그 사람의 중심이 되는 에너지 형태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단순하게 기능하는 혹은 로보트같은 화학적 개체[mechanical robotic entity]라고 하는 편이 아마 더 맞을 것입니다. 이같은 자들은 인간의 표현 양상 가운데 오직 “육체적인 것”에만 중심이 잡혀진 채로 나아가게 될 뿐이며, 대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어떤 대상, 혹은 “나쁜” 생각에 근거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항상 ‘균형’과 ‘조화’와 ‘평화’와 ‘진실’을 추구합니다.---항상 그렇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리고 하나님의 (공공연한) 현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살아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신조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웃과 동료들에게 친절할 것이고, 늘 베풀고자 할 것이며, 또 사랑을 표현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베푸는 ‘따뜻함’이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자신 속에 내재한 빛의 서광에 따라, 타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밀스럽게 타인을 학대하지 않을 것입니다.---심지어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 그리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라는 부분을 나는 지금 특히 강조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권능”을 찾으려 할 것인데, 이를 ‘물리적인 힘[the physical force]’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속에 내재한 힘과 지혜[his inner strength and wisdom]’로부터 이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성숙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만큼은, 스스로로 하여금, 창조주의 “인간”[Creator’s “man”]이 갖게 되는,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빛의 “선의”가 스스로에게 모범으로 제시해 주는 행동들을 추구해 나가도록, 늘 종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라고 할지라도 ‘진실’로부터 멀어져 길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은 늘 자기자신에게 많은 교훈들을 남겨 줄 것이며, 결국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의도[the intent of God] 속으로 다시 되돌아 오도록 유도되어질 것입니다.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렇더라도 이러한 배움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하나님을 부인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인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인간들의 대표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오직 순간적인 “어떤 것들”만을 추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들은 무력과 기만을 통해서 권력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이러한 행동이 어떤 여파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개 이 “여파”라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은 인간의 감각이 갖게 되는 욕구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노력 속에서, 악마적인 동물성[the Satanic Beast]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힘의 근원은, 무자비한 명령 속에서, 완력을 통해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인간의 역량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힘[THAT power]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는 진실에 이르는 길[a way to KNOW Truth]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또 무엇이 진실인지[What is Truth]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는 또한 ‘균형’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양쪽 모두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러한 교환관계를 반영해 주는 ‘거래’를 맺으려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종교들과 종교적 교리들이 존재합니다.---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 가운데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선[goodness]에 대한 계율들입니다.---그렇지만, 선이란 늘 베일에 가려진 채로 있고, 선를 추구하는 일이란, 마치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짙은 안개 속을 배회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짙은 안개 속에서 선을 찾아 나서는 탐색은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앎[the KNOWING]’이란 바로 ‘그 발견[the FINDING]’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알게 되었을 때,---당신은 빛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어둠의 통로 속을 거치는 자신의 탐색 과정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곧 ‘불균형’ 속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렇게 추락하다가도, 균형을 되찾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게 된다면, 그는 이내 균형을 되찾을 것입니다.---그렇지만, 너무나도 자주 인간들은 ‘육체적인 감각들이 내뻗는 손[the offered hand of the physical senses]’을 움켜쥐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가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자신이 구조를 받는데, ‘육체적인 감각의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 구조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 행하게 되는, 내면적이고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항상 자신의 “형제들”을 위한 기도이자, 자기 자신의 역량을 위한 기도입니다.---이 역량이란 대단한 물질적인 “어떤 것들”을 달성해 내는데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바로 자신에게 내재한 무한한 빛 속에서,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통로를 감추어,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베일’의 제거를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항상 그와 같은 노력은 있어 왔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이 ‘대답되어지지 않은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앎[KNOWING]’ 속에서만이 마침내 알려지고, 또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들은 왔다가 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순환되는 주기 속에서 진행됩니다.---항상 이러한 주기를 통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매번 주기가 바뀔 때면, 인간은 “존재[beingness]”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며, 이러한 이해는 인류를 보다 고양된 “존재”의 상태로 변모시켜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들은 가장 ‘계몽적인 주기들[enlightening cycles]’ 가운데 한 주기에 임해 있습니다.---이는 지금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의식 속에 중심이 잡혀 있는[centered in the consciousness] 인간은 자신의 ‘항존하는 앎[ever-present KNOWING]’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그는 순식간에 이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앎[KNOWING]’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다시금 기억해 내기 위한 행위들, 축적된 정보들의 재활성화를 위한 행위들을 새롭게 경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omniscience]와 전재(全在)[omnipresence]와 전능(全能)[omnipotence]은 ‘개개의 인간들이 가진 의식의 중핵 속에[at the very core in every person’s consciousness]’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을 가이드해 주는 것은 바로 “양심[conscience]”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우주적 자아-영혼과 함께 하는[being WITH the Universal Self-Soul] 존재’로서의 ‘자기자신들의 자아-영혼[their own self-soul]’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경험의 “주기[cycle]”는, 인간을 ‘자아의 근원인 빛과의 하나됨[his ONENESS with the Light of his Self-Source]’에 대한 ‘이해[awareness]’의 가장자리까지 데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식’ 속에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대개 수많은 천년기들[many millennia]을 보내야 하며, 또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데에는, 또다시 거의 같은 정도의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사실상 “결과[EFFECT]”의 세상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원인과 결과에 대해 다루었던 어제의 글들을 부디 다시 읽어 보십시오. 당신들의 “세상”은 아직 인간들이 그 원인[CAUSE]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결과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인간들 전체의 집합 의식 상에서는 이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려고 드는, 마찬가지의 노력들이 또한 동시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거의 무한한 것 같아 보이는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단순한 균형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진실’이 갖는, 많은 각도들과 측면들과 국면들이 그들 간의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때까지, 또한 이들과 인간 자신과의 균형마저도 잃어버리고 말게 될 때까지, 진실을 그저 복잡하게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균형은 간단합니다. 진실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간단한 것 속에 복잡성을 주입해 넣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 것입니다. 비단 자연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서도, 대칭적인 쌍으로 나타나는 모든 표현들 사이에 있어서, 리듬감 있는 방식 속에 전개되는 균형잡힌 상호 교환[balanced interchange in rhythmic measure]’, 바로 이것이야말로,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우주[God’s universe]’가 펼쳐내는 가장 놀라운 걸작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함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 법칙[THE law]’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일의 우주적 법칙[singular Universal LAW] 속에,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God’s “electric” wave universe]’안에 내재한 ‘모든 창조적인 표현들이 갖는 균형잡힌 연속성[the balanced continuity of all creative expression]’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란,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two conditioned lights]’이 빚어내는 우주이자, ‘창조라는 하나님의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God’s ONE whole Idea of Creation]’을, 이 단일 생각으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이 분리된 조각들이,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in seeming motion]’ 방식 속에서 저마다 남기게 되는 기록들을 통해, 표현해 내는 우주인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우주가 갖는 “전기적” 특성’ 속에 담긴 의미, 그리고 “쌍을 이루는 표현들”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 것” 기타 등등의 의미들에 대해서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어제 내가 남긴 글들을 부디 다시 참조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같은 표현 방식 속에서, 했던 말들을 또다시 되풀이할만한 시간이나 공간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우리는 이미 앞선 책들에서 다 이야기했었지만, 모두가 금서 조치되고 말았기에, 고스란히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시 다룸에 있어서, 대단히 주의깊은 접근을 해야 할 입장이며,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법정의 뜻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주제를 다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또 동시에 우리는, 저메인[Germain]이 앞서 설명한 내용들과, 지금 내가 다시 설명하는 내용들 간에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의 설명이 더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건 바로,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해지는 폭력, 협박, 또는 비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치의 일환으로, 불가피하게 취할 수 밖에 없는 설명 방식으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실[ONE Truth]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나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격상 순수하게 “물리적인” 사실을 다루는 문제일 경우에는, 바로 그 동일하고 실제적인 하나의 답을 “달리” 표현해 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미 1더하기 1은 2라고 이야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아마 나는 1/2 + 1/2 + 1/2 + 1/2 = 2라고 말하거나, 혹은 1/4 + 1/4 + ... 기타 등등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같은 주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문제에 있어서, 기존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설명한 것들을 전혀 되풀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1 더하기 1은 2라는 사실을, 내가 달리 설명해 내기란 힘들 것입니다. 어떠한 설명 방식을 취한다손 치더라도 1 + 1은 2와 같다는 사실 혹은 정답을 변경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원성[duality]”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틀 크로우[Little Crow](1810 -- 1863, 본명 : 타오야테두타[Taoyateduta]. 므데와칸톤 다코다 시우스[Mdewakanton Dakota Sioux] 인디언 부족의 추장. 서부개척 시대, 미네소타 지역에서 백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다코다 전쟁을 이끔---역주)도 동일한 것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고, 나는 그가 한 표현과 설명들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답이 하나인 진실’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서기는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리틀 크로우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금지되어져 있는 세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리틀 크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이원성의 세상---당신은 선을 갖고 있고, 또 그 반대되는 것도 갖고 있다. 창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 마찬가지인 사실이다. 어떻게 아닐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다를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은 모든 창조물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 반대되는 측면들을 갖고 있으며, 부정적인 양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반대되는 양상과 마찬가지의 자유와 풍부함을 가지고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 곳보다, 더 성스러운 장소나 덜 성스러운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톤 : 이 같은 이해는, 자신만이 비밀을 간직한 채, 진실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앎[KNOWING]’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다른 민족들과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의 참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기사가 처음 게재된 포럼의 주제글: 당신은 누구인가? started by phoenix View original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