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저널, Phoenix Journals - 육체와 마음, 분리된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우주
  • 육체와 마음, 분리된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우주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것


    삶의 여러가지 측면들에 걸쳐서 모든 것들이 점점 더 악화되어져가는 시대에 있습니다. 당신들은 ‘모든 것들’이 그저 잘 되어가고 있다는 거짓을 믿도록 유도되어질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이 악화되어져 가는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단지 전쟁만이 아닙니다. 전쟁은 전체 인류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만을 해치고 있지만, 술과 담배 그리고 다른 약물들은 온 세상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남자들와 여자들, 십대 청소년들, 심지어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마저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니코틴, 치명적인 약물들, 마약류들을 통하여 서서히 정신적, 육체적 중독 상태의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세기에 걸쳐 인류의 이 타락화 과정은 엄청난 규모로 점차 더 악화되어져 왔고, 술과 담배는 세계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5대 산업’ 중에 각각 포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담배와 관련된 최악의 그리고 최대의 숨겨진 위험 가운데 한가지는, 담배 제조업자들은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전세계에 걸친 제약 업체들도 함께 소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 담배를 피는 과정에서도 또 니코틴 중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설탕이 사용되어지지만, 설탕은 연소시 유독한 암유발 물질을 생성해 내기도 합니다.



    약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약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모든 세부적인 영향들까지 다 다루어볼 수는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감염된 바늘을 통해 전파되어지는 에이즈나 기타의 질병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려밖에 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간의 영적 자아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만큼은 논해보고자 합니다.

    깨어나는 인간은 자신의 신성한 영적 자아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전체 인류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진정으로 ‘빛’ 속에서 살고, 또 그 기쁨을 알려는 목적 속에, 하나님-앎[God-awareness]의 빛과 더불어 일깨워졌을 따름입니다. 나는 지금 일요일 아침에 행해지는 여러 ‘종교단체들’의 설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불완전한 앎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그들의 “선호에 따라” 정해둔 교리들에 불과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영혼-의지[Soul-Will]가 자신들의 육체로 표현되는 물질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천상의 왕국을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산만한 주의를 끄는데 있어 중심점의 역할을 하는 육체를 완전히 잊을 수 있는 상태 속에서, 자신들의 의식이 갖는 천상의 리듬을 알 수 있는 자들입니다. 육체를 잊고, 영혼-의지[Soul-Will]에 따라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신비의 성취이자, 신성한 빛[the Divine Light]의 황홀경을 알게됨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는, 이들 소수의 사람들이 독실한 계시에 따라 빠르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갑자기 자극을 받게 된다거나 또는 거짓으로 젠체하며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우주적 인간[Cosmic Man](Human?Higher Universal Man)이 그처럼 높은 단계, 즉,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육체-감각[body-sensation]을 차단할 수 있고, 이 감각적인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영혼의 의지에 따라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그러한 단계에 이르기까지에는 대개 수백만년에 걸치는 세월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환생을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바로 그러한 천상의 왕국의 문앞에 이른 수백만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오늘날 무수히도 많은 자들이 바로 그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고 있는데, 이러한 일은, 바로 자신들의 신체 조직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정신적 기능마저도 변경시켜버리는 물질들에 중독되어, 스스로 약물의 노예가 되고 마는 과정을 통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니코틴은 단순히 겉보기에는 해가 없는 것 같지만, 잠재적 해악을 지닌 채로 있다가, 결국엔 신뢰를 저버리는 양상을 띠게 되는, 아주 천천히 작용하는 약물로서, 그렇게 무수한 세월에 걸쳐 찾아 온 빛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가지 약물에 중독되어버린 자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물리적인 이유들만큼이나 많은 감정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러한 중독에 대한 용서를 베풀어,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잊지도 못하고, 또 이를 통제하지도 못하는데, 왜냐하면 항상 흡연 욕구가 “한모금의 담배”를 더 바라는 육체적 욕망으로 주의를 되돌리게 해서, 단순히 육체적인 요구에 따른 ‘지금과 여기’ 속에 자신들이 갇혀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약물 중독자들은 영혼-앎[Soul-awareness]의 상태가 배제된 채, 완전히 자신들의 육체에 따라서만 통제될 뿐인데, 예외가 있다면, 약물 중독의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짧은 시기 안의 몇몇 순간에 걸쳐, 적정량의 약물이 자신들의 정상적인 균형상태를 되찾게 만들어주는 드문 타이밍 동안에만 육체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흡연이 육체를 물리적으로 해치지는 못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끼칩니다. 흡연은 위궤양, 폐 및 목의 질병에서부터 폐암, 심장 약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상해를 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육체 자체가 최우선 순위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흡연을 통해 육체가 주기적으로 뇌세포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니코틴을 원하면 원하게 될수록, 서서히 당사자의 이성적 판단 및 사고 과정이 “비극화[depolarization]”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육체는 오직 한 개피, 그리고 또 한 개피의 담배를 더 요구해 나가게 될 뿐인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거의 전적으로 산소, 수소, 탄소 그리고 질소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들이 전체 인간 육체의 98.5%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1.5%은 미네랄 성분들로 되어 있지만, 극히 소량들입니다. 그런데 이 1.5% 속에도 니코틴은 전혀 들어 있지 않는데, 이 점을 통해 보더라도 왜 니코틴이 그렇게 위험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구성 성분이 아닌 것을 흡수하는 것은 오직 독이 될 따름입니다. 니코틴 및 다른 약물들은 육체의 구성 요소가 아니기에, 이것은 여러가지 측면에 걸쳐 신체에 해가 되며, 나아가 정신적으로는 더 큰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물은 뇌세포를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며, 이것은 또렷한 사고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아주 특이한 점이 있다면, 뇌가 약물에 의해 무뎌지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한 유일한 조치는 더 많은 약물을 복용하여 뇌를 잠시동안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것일 뿐인데, 그러고 나면, 육체가 원하는 한, 점점 더 많은 약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되고, 결국 약물에 대한 노예화가 뒤따르게 됩니다.

    어떤 흡연가들은 하루에 6개피 남짓의 담배를 필요로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매 20분마다 한 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골초”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영혼-의지’를 상실해 버린 자들로서 이들의 육체는 약물의 노예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미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니코틴, 음식, 알코올등에 노예가 된 자들이 이를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하지만 수 천 시간 이상 담배를 피워 온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력이 니코틴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지 못했고, 그보다는 니코틴의 힘의 자신의 의지력을 항상 능가한다는 사실만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탐구, 그리고 하나님의 빛이 있는 높은 천상에서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자라면, 이 육체의 노예화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발견하는 것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인데, 이는 인간들이 이미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성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것은 오직 그가 이 사실을 알 때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실을 육체-감각[body-sensing]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빛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영적 황홀경을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영원한 인간[Eternal Man]은 전능하고[Omnipotent], 전지하고[Omniscient], 어디에나 편재해 있지만[Omnipresent], 인간의 육체는 오직 감각의 덩어리일 뿐으로, 권능도 지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감각의 덩어리로 머물러 있는 한, 인간은 늘 감각의 덩어리일 뿐이며, 결코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류는 영적인 길을 통해 천상의 왕국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모든 인간들을 빛의 문 앞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감각의 덩어리인 채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결코 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중독성 물질의 사용을 통해 인간은 영적 자살의 비극[the tragedy of Man’s suicide of the Spirit]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육체의 극성은 효과적으로 변하게 되고, 감각을 충족시켜 주는 대신 영적인 정신을 억누르게 되어, 내면의 목소리를 점점 더 효과적으로 차단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재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물질에 과도하게 중독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천재성을 표현해 낼 수 없게 되고, 오직 약물 자극이 허용하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 자신에게 내재된 빛을 알 수 있게 되어, 그 때에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고 나면, 약물은 자신의 감각에 커다란 호소력을 갖게 되지만, 결국 그의 육체는 약물의 노예가 되어갈 따름입니다.

    이처럼 약물의 노예가 된 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갖혀 있는 감금의 덫은 점점 더 커져 갈 뿐이며, 스스로 이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고통스럽도록 슬픈 일인 것입니다. 한 명의 천재가 자신을 가둬놓고 있는 약물의 홍수 속에서만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비극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생의 전개 과정 속에서 위대한 영적 각성은 오직 자기자신 속에 내재한 빛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알코올이나 다른 중독성 약물이 인체에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 해당 인간에게는 극성의 변화가 생겨나서, 정상적인 육체의 극성은 인공적인 수준으로 낮춰지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이 인공적인 극성 상태는 그러한 약물 사용자가 자신 속에 내재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막게 되고, 오직 약물이 그를 자극하여 인공적인 정상 상태에 이르게 되는 짧은 순간에만 그러한 표현이 가능해질 뿐이고, 또한 이 짧은 순간은 지속적으로 더 짧아져만 갈 뿐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동안에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뿐이고, 이 순간적인 자유의 시간동안 영감에 찬 예술을 구현해 낼 수 있지만, 보다 강화되어져 가는 예속화의 정도가, 영원한 인간 정신 속의 높은 권좌에서 그를 끌어 내려, 지상의 감각 덩어리에 머물도록 강요해 나감에 따라, 그러한 짧은 순간은 계속적으로 점점 더 줄어들 뿐인 것입니다.



    단순성의 추구



    당신들은 당신들을 혼동스럽게 만드는 어리둥절한 세상 속을 살고 있는데, 이는 단지 당신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원시인이 시계를 보았을 때 마찬가지의 난감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원을 그리며 도는 바늘들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터인데, 그 이유는 시계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시계의 목적성에 대해서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에게 있어서 시계는 아주 단순한 기구입니다. 그 작동 원리와 목적은 당신들에게 친숙한 것이라서, 당신들은 이를 가장 유용하고도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시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기구로 간주합니다.

    당신들은 ‘창조’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느낌을 가질 뿐인데, 이는 당신들이 창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들은 ‘창조주’에 대해서도 난감해 할 따름인데, 이 역시 당신들이 그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들은 물질과 움직임의 작동 원리 및 목적성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며, 이 또한 당신들이 이들에 대해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물질과 움직임에 대해 아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하고, 또 이는 대단히 간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당신들은 항해사 없는 배를 타고 있는 꼴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우주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당신들의 육체, 즉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이 육체는 우주의 한 단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어떻게 이를 제어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합니다. 이에 더해, 당신들이 우주에 대해서 그저 추측하고 있는 바가 아닌, 우주의 실제가 무엇인지도 알아야만 하기에, 반드시 우주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하나의 존재이자 ‘움직임의 어떤 상태’로서의 우주의 개념에 대해 익숙해지게 되었을 때, 당신들은 이러한 움직임의 상태는 당신이 가진 욕구의 파동-기록[wave-records]으로서, 이는 한편의 그림이 이를 그린 화가가 그리고자 했던 바의 기록인 것에 비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조업자는 생산하는 제품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을 때,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공장에서 만든 제품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만든 생산품입니다. 수백만년에 걸친 당신의 욕구가 당신의 육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단 1분 간에 걸친 당신의 의지적 바램으로도 당신은 당신 육체가 갖는 전체적 구조의 균형을 다른 방향으로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 쪽에서의 최소한의 물리적인 움직임이 없이도, 당신은 ‘삶’을 향한 방향으로도, 또는 ‘죽음’을 향한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무수히 많은 결과들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보다 고양된 지식에 기반할 때, 의술은 엄청난 진보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결과들, 육체상에 나타내어지는 결과들에 대한 원인을 탐구하려고 할 때, 그 출발은 물질적인 ‘움직임’에 대한, 그리고 육체를 제어하는 ‘마음’과 이 ‘움직임’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작동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문제를 보다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해야만 하겠기에, 비슷한 예가 될만한 것으로서 시계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쉬운 표현이 필요한 이유는, 움직임에 대해 당신들에게 설명하게 될 것들은, 전혀 새로운 개념들로 오래된 개념들을 대신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들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었고, 또 지금껏 자연에 대해 추정되어진 적도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이해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당신들이 원시인들에게 시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는 아직도 움직임의 모든 결과들이 갖는 원인[CAUSE]과 목적성[PURPOSEFULNESS]을 이해함에 있어 원시적인 상태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당신은 원시인이 시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최소한의 희미한 이해라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쉬운 말로, 바퀴에 대해, 기어에 대해, 중심축에 대해,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대해 하나 하나 설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설명한 후에 조차도, 그 원시인은 그러한 움직임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또는 시간의 원리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쉬운 말로 설명하더라도, 당신은 당신에게는 그렇게도 간단한 것을 그에게 설명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마치 아이에게 말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로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주적 축의 정지된 중심[the still center of the universal shaft]의 동기적 정신[the motivating Spirit]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힘이, 분리된 힘과 배증된 힘의 사이클들을 통해 확장되어진다는 간단한 이해의 기반을 정립하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해 오고 있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창조의 모든 작용-반작용의 타임 시퀀스를 설명해 주는, 우주적 박동의 고동소리를 표현해 내기 위하여, 모든 바퀴들은 서로간에 기어가 넣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적) 시계의 모든 부분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에 연계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된 우주는 서로 간의 불균형의 상태에 균형을 찾도록 만들어 주는 모든 균분선[equator]의 각면 상에서 발생하는 한 번의 째깍거림을 갖게 되고, 이러한 째깍거림은 이 균분선의 반대 면에서의 우주적 추가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째깍거림으로 계속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쉬운 설명을 찾아야만 하고, 또 쉬운 예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지적인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지만, 만약 당신들이 무언가를 완전히 새롭게 배워야만 한다면, 당신들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두 개의 세상 속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으며, 이 두가지 세상 간의 관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각각의 세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아야만 합니다.



    욕구[DESIRE]의 에너지가 분리되지 않은 정지된 빛[Light]을 움직이는 빛의 쌍들로 나누려고 하는 동안, 균분선의 한 면으로부터 다른 한 면으로의 움직임의 교환이 없다면, 우주적 펌프는 나타남과 사라짐으로 전개되는 이 두 개의 우주를 계속적으로 펼쳐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윗 단락에서 “나타남과 사라짐[appearing-disappearing]”의 우주라는 표현 대신에, “생존하고 죽어가는[living-dying]” 우주, 또는 “성장하고 부식하는[growing-decaying]” 우주, 또는 “생성하고-퇴화하는[generating-degenerating]” 우주, 또는 “압축되고 팽창되는[compressing-expanding]” 우주, 또는 “극화되고-비극화되는[polarizing-depolarizing]” 우주, 또는 “충전되고 방전되는[charging-discharging]” 우주 또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띤[centripetal-centrifugal]” 우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든지 간에, 이들은 모두 명백히 같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는 피스톤의 압축과 팽창인 것으로, 이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Nothing]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는 실체(천체, 육체)[Bodies]가 만들어 지게 되고, 그런 다음, 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영원한 현실이기도 한, 존재하지 않음[Nothing] 속으로 다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현실비현실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 가령, 분리된 것과 분리되지 않은 것,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세속적인 마음과 신성한 마음등과 같은 표현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알기를 원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할 때에 난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에 대한 배우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보다 나은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될수록, 이러한 모든 표현들에 대해서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당신이, 우주적 천체 뿐만 아니라 당신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물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것에 대해서도,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권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표현은 분리된 우주로부터 생겨나는 리듬에서 나오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문화적, 지적 표현들로 확장되어지는 영혼의 생각은 분리되지 않은 빛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파동[the wave] 속에 숨겨져 있는 모든 비밀들에 대한 지식은, 우주적 메커니즘과 우주적 수학과 우주적 에너지 표현에 대한 앎으로 당신을 이끌 것입니다. 논의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너무나 많은 추상과, 의미에 대한 진정한 이해 없는 단언들로만 채워질 뿐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딱딱하고 또 무르기도 한 실체들(천체, 육체)[bodies]이 우주로부터 생겨나고 또 다시 우주에 의해 되삼켜져 버리고 마는가 하는 문제를,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커다란 미스터리라고만 불러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바로 어떻게 분리된 우주가 분리되지 않은 마음의 빛[Light of Mind]으로부터 생겨나는가와 같은 의문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간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당신들이 자연을 보다 단순하게 바라보도록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삶과 죽음을 보다 단순하게 바라보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는 실상 당신들이 ‘소리와 침묵’을 바라보는 것 만큼이나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알도록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만약 당신들이 죽을 수 없다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연속되어지는 삶의 여행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 쉴 때,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생성해 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숨을 내 쉴 때,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파괴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죽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살기를 바라는 만큼만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너무 조급해 하지는 마십시오. 잠시동안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점에 대해서 우리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옳은 생각이 자연에 대한 그른 생각보다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도록 합시다.



    움직임과 삶은 쉼과 죽음을 표현해 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하지만 각각 희망적인 암시와 끔찍한 암시를 갖고 있는 이 단어들을 사용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차라리 이 두 단어를 완전히 잊어 버리고, 대신 움직임[MOTION]과 쉼[REST]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합시다. 당신이 움직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를 나누어지지 않는 것, 또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욕망[DESIRE]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욕망 그 자체는 에너지의 두가지 상반된 표현들?응축시키려는 욕망과 분산시키려는 욕망?로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점을 상기해 보십시오. 당신이 당신 마음 속, 쉼 속에 있는 한가지 생각을 표현하고자 할 때, 당신은 이를 움직임[MOTION] 안에 둠으로서 당신의 생각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보이게 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감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구체성[solidity]이라 불릴만한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움직임[MOTION]의 증대에 제동을 걸어서, 당신의 생각을 분산시켜 버립니다. 그 때, 움직임은 그것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생각 속의 쉼[REST] 상태에 이르게 될 때까지 분산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이 보이게 만들었던 어떤 것을, 그것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갈 때까지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의 멈춤을 통해, 움직임을 “공간” 속으로 방출시켜 버릴 때, 바로 당신 안에 있는 “천상의 왕국[Kingdom of Heaven]” 속의 고요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이 되는 원칙을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모든 움직임은 쉼의 한 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가, 쉼의 한 점을 찾아 나가게 되며, 궁극엔 바로 그러한 움직임이 생겨났던 원래의 쉼의 균형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움직임은 형태를 가진 실체(천체, 육체)[Bodies]를 감아들이기 위해 구심성을 띠고 시작했다가, 다시 이를 제로 상태로 풀어버리기 위해 원심성을 띠며 끝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위의 원칙에 기초하여, ‘창조’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창조는 하나님의 앎-마음[GOD’S KNOWING-MIND]의 쉼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마음[GOD’S THINKING-MIND]의 두 방향의 움직임으로 표현되어지는 생각[IDEA]인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깊이 성찰해 보면, 삶이란 단지 하나님의 제로 상태의 우주[God’s zero universe]안에서의 움직임의 욕망[desire for MOTION]이며, 죽음이란 그러한 움직임으로부터의 쉼의 욕망[desire for REST]임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해, 삶과 죽음, 양자 모두는 단지 생각의 이미지[the image of thoughts] 속에서 형성되는 생각의 실체들[bodies of thoughts]일 뿐인 것으로서, 영원히 생각-마음[Thinking-Mind]으로부터 나왔다가 이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움직임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힘을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보다 크면 클수록, 당신 육체 속에서 삶을 표현하고자 하는 당신의 역량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러한 힘을 비극화[depolarization]나 피로, 또는 그 밖의 그 무엇이 되었든, 역동적인 펌프질을 통해 당신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가지게 될 힘을 수축시켜버리고 마는 기제로 인하여, 당신이 그러한 힘을 줄여버리게 될 때, 바로 이 때는 당신이 당신 육체의 죽음을 표현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아침에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려고 할 때 당신이 갖게 되는 욕망, 하루 종일 역동적으로 당신이 가진 힘을 표현해 내기에 앞서, 당신이 갖게 될 이 의욕적인 상태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만 밤이 되었을 때 당신은 그러한 움직임을 다시 멈추고 편히 쉬려고 하는 욕망을 마찬가지로 갖게 되지 않습니까? 나중엔 잠 속에서의 완전한 이완을 통해 사고의 움직임 마저도 멈추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이 양쪽 모두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당신은 쉼[REST]의 욕망은 움직임[MOTION]의 욕망과 마찬가지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쉼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지만, 바로 그 곳으로부터 삶이 재탄생 되는 것이며, 자연 속의 모든 상태들은 바로 이 두가지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 쉬려는 욕망은 당신이 쉼을 내쉬려는 욕망에 의해 균등화되어집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숨을 들이 쉴 때, 당신은 움직임의 가속화를 통해 삶의 표현을 응축시키는 셈이 되며, 반대로 당신이 숨을 내 쉴 때, 움직임의 감속화를 통해 죽음의 표현을 팽창시키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 쉴 때,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창조하고[CREATE]. 당신이 숨을 내 쉴 때,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파괴하게[DESTROY] 됩니다. 당신의 육체는 쉼의 비가시성[the invisibility of REST]으로부터 생겨났다가 움직임의 가시성[the visibility of MOTION]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당신은 끝없이 살고 죽으며?성장하고 부식하며?생성하고 방출하며?움직이고 쉬는 것입니다. 당신의 육체는 이를 에너지로 충전하게 되는 움직임의 증대에 의해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 육체는 그러한 에너지를 방전하게 되는 움직임의 분산에 의해 부식됩니다. 육체가 살고 죽는 그 동일한 이유로, 육체는 생성하고 방출하는 것이며, 이 각각을 위한 욕망은 동등합니다. 그 어느 쪽도 반대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각각은 반대쪽으로부터 동시적으로 생겨나고, 연속적으로 또 그 반대의 것을 낳게 됩니다.

    신성한 삼위 일체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The Divine Trinity]은 여기 언급된 모든 것들 속에 들어 있고, 그러한 원칙의 표현은 반대되는 것들로 구성된 각각의 쌍들 간에, 서로를 통한 움직임의 양방향의 상호교환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죽었을’ 때, 당신은 이내 커다란 슬픔과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지식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당신의 이러한 감정 표현을 억누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되어지는 바 그대로인 것입니다. 당신들 모두는, 창조의 신성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며, 만약 이 주인공들이 대본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감정표현을 해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별 소용없거나 목적성을 갖지 못하는 주인공들일 것입니다.

    슬픔, 고통, 고독감, 기타 이와 유사한 감정들은 삶이라는 신성한 드라마 속에서 기쁨, 행복 기타 이와 유사한 감정들 만큼이나 목적성을 갖습니다. 바로 목적성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자연 속에 있는 햇빛은 그림자가 없이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만든 그 어떤 예술 작품도, 빛과 그림자가 없다면, 즉 균형잡힌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이 두가지 중 어느 한가지라도 없다면, 아무런 목적성도, 가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의 비현실성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깊을 지라도, 또 아무리 당신이 영적으로 강한 삶을 살고 있을 지라도, 바로 당신은 영적인 생각들을 표현해내는 물리적인 형태의 육체를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분리된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우주 속에 당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분리되지 않은 우주에 관한 지식에 너무 천착하게 될 경우, 이는 당신을 분리된 우주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감정들에 대해 냉정함만을 갖도록 만들 것인데, 이 경우 당신은 “연극”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지게 되고, 동시에 당신 자신을 목적 잃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성취는 모든 것들을 균형잡히게 취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며, 이것은 지적으로 냉정한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육체[God’s body]는 두가지 상반된 상태들을 만들어 내도록 가해지는 중력의 압력으로부터 야기되는 분리[division]에서 생겨나는 모든 감정과 열정들을 표현해 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생각[God’s thinking]을 표현해 내게 되고, 이들 모두는 균형잡혀 있습니다. 폭풍우가 가라앉으면, 이어서 고요와 진정이 찾아 오는데, 이 두가지는 모두 동등하게 ‘좋은[GOOD]’ 것입니다. 오랜 동안의 갈증을 느낀 후에야 물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듯이, 고요는 폭풍우가 앞서 지나갔기에 더 기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균형되게 취하는 법을 배운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것들이 유익한 것임을 이해하는 지식 속에서 보다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결과들은 다시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상반된 결과들로 분리되는데, 각 쌍의 한 쪽은 나머지 한 쪽과 동등하며, 그 각각은 동등하게 ‘좋은[GOOD]’ 것입니다.

    당신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역량은, 바로 당신이 슬픔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역량을 통해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지식도 당신을 비인간적이 되도록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이 갖게 될 지식은 모든 반대되는 감정들의 균형을 찾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결국 당신이 경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감정들을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반면, 무지는 두려움과 근심과 미신과 다른 비자연적인 감정만을 낳게 될 뿐이며, 이는 결국 당신의 성장에 커다란 짐으로 작용하게 될 뿐입니다.

    우주적 법칙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Universal Law]은, 당신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실패, 당신의 존재자체마저 위협하게 되는 최악을 실패조차도 변화시켜, 당신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공으로 당신을 다시 이끌 수 있는 용기를 당신 자신에게 안겨다 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하나의 철학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당신은 모든 경험들이 좋은[GOOD] 것이라는 지식으로 보다 풍요로와진 채, 죽음의 슬픔에도 직면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는 가운데 각각의 경험들이 당신을 보다 강하게 만들게 되어, 당신은 모든 경험들을 동등하게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주적 균형 상태로부터의 삶[LIFE]의 출현이, 그러한 삶의 재출현을 위해 동일한 균형상태로 되돌아 가는 여행에 비해 더 위대할 것도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삶[LIFE]을 탄생시키는 균분선[equator]은 죽음을 변화시켜 또 다른 삶을 표현해 낼 뿐이라는 사실, 마치 분리되지 않은 우주가 그 변화없음성[changelessness] 속에서 영원하듯이, 삶은 영원한 반복 속에 끝없이 전개되어진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되도록 쉬운 말과 예를 통하여, 변화하지 않는 하나[the changeless ONE]의 분리되지 않은 균형[the undivided BALANCE]과, 바로 그 하나[THE ONE]를 표현해 내는, 변화하는 반대를 이룬 쌍들[the changing pairs of opposites]의 분리된 균형[the divided BALANCE]을, 당신에게 설명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균분선의 한 쪽에서 나타나는 것은 균분선의 반대쪽에 나타나는 것과 동등하지만 반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 각각은 겉보기에 죽음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 사라져 갈 것이지만, 또 제각각 겉보기에 삶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 재탄생될 것이라는 점 역시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다시 숨을 내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주의 양극들은 음극들의 날숨들이고, 우주의 음극들은 양극으로부터의 들숨들인 것입니다. 또한 지금 살아 있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 있는 만큼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당신은 끝없이 살기 위해 끝없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생각-육체[thought-bodies]를 구성하게 되고, 옥타브 톤[octave tones]으로 된 빛의 파동들[light-waves] 속에서 이 생각-육체들이 형태를 띠게 만든 다음, 이를 여러가지 것들로 구성된,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우주의 객관적 요소들인, ‘고체화된 물질’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들에게는 미스터리이자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일 뿐이지만, 바로 이 우주적 물질들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 당신이 놀라운 지식의 황금 사과와 함께 영예롭게 될 당신의 삶 속에, 비극과 재앙들이라는 연극 대본들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당신의 불멸의 경험만이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삶의 각 장들에, 패배와 병과 좌절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되는 생각인, 이 분리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들은 유익한 것들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 자체가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진술을 추상적인 진실로서 완전히 믿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앎[KNOWING]에 이르지 못한 채 믿음[BELIEF]만을 갖는 것은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지식(앎)만이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육체적인 강인함보다가는 지식(앎)의 강인함이 요구되어집니다. 작은 지식 한가지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거대한 사이클로트론[cyclotrons](원자 파괴를 위한 입자 가속 장치?역자주)을 짓기도 합니다. 바로 그러한 지식을 이미 갖고 있다면, 사이클로트론을 짓는데 드는 노력은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힘은 보다 잘 일을 해 낼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도구와 같습니다. 하지만 약한 마음이 그 도구가 제대로 작업을 수행해 내도록 명령하지 못한다면, 도구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일도 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힘을 솟게 만들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는 기제라면 그것은 바로 지식과 인격의 힘인 것입니다. 강해지고, 또 지식을 쌓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로 삶이 당신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삶을 멋지게 살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금 제가 뭐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제 지금껏 이야기했던 것들을 요약해 볼까 합니다.



    요약



    삶은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영원한 여행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사랑으로부터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사랑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은 사랑을 찾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사랑’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천상의 왕국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천상의 왕국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목적은 완수되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것들은,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당신이 당신 자신을 발견할 때 생기는 부수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행복과 사랑과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당신은 많은 것들을 깨닫게(발견하게) 됩니다. 궁극에 있어, 영겁의 세월에 걸친 발견의 노력 끝에,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것들을, 실상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려고 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당신은 타인에게 주려고 하는 그것을 당신이 이미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발견의 순간, 당신은 행복을 발견하게 되고, 또 당신이 ‘줄 수 있는 역량’만큼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를 추구하려고 할 때, 당신이 그 부를 타인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이 이미 부를 갖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부의 크기는 당신이 바로 나누어주려하는 부의 크기만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역량을 의심하십니까? 당신이 가진 것을 줄 때, 그 때 당신은 온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권능이, 바로 그렇게 주고자 하는, 당신의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전능함[Omnipotence]을 발견하게 되는 때는, 바로 당신이 ‘처음’ 주고자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찾아 헤메었던 것을, 마침내 당신은 발견하기에 이르런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아직 천상으로 향하는 길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준비되어 있든, 준비되어 있지 않든, 인류에게 펼쳐지는 새로운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제 막 천상의 왕국을 발견하게 된 반면, 이를 찾고 있는 무수히도 많은 사람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를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도대체 여기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알려하고, 또 희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당신은 이제, 이렇게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그들이 찾아야 되는지를 알려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보물인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시대의 인간에게 알려지게 될 ‘진실[TRUTH]’을 통해, “구세주”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 안에 내재한 부성과 모성[Father-Mother]이 당신에게 명령을 내려 이러한 지식을 공유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모두가 빛의 통로인 진실을 발견하여, 육체적 감각을 통한 이 여행에서 악에게 희생되지 않도록 돕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해 수백만번에 걸쳐서 목숨을 잃게 되지만, 이 영원한 삶과 불멸성을 발견한 자는, 이러한 ‘불멸성’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건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만, 하나님은 인류의 재탄생을 위해 자신의 메신저들을 보내십니다. 빛을 찾는 인간의 긴 여정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삶의 빛은, 빛에 대한 앎에 이르게 될 인간들을 영원히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다림의 고통은 인간들 자신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Aton, 아톤

    피닉스 저널 제 33권, “MUDER BY ATOMIC SUICIDE : Technical And Spiritual Disclosure Of the Secrets Of How, Why, What, Where, When And Who Of The Universe And Its Functional Projections”, Pleiades Connection Vol. IV., Introduction, pp. 13-22.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이 기사가 처음 게재된 포럼의 주제글: 육체와 마음, 분리된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우주 started by phoenix View original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