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HU-MAN]의 가장 “치명적인[DEADLY]” 죄악들에 대한 식별과 정의
우리는 사난다[Sananda], 주 마이클(미카엘)[Lord Michael], 저메인[Germain], 드루셔[Druthea]로, 하나님/아톤[God/Aton]의 신성한 빛과 창조[Creation]의 지혜 그리고 진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 하나로서 현존해 계신 하나님/아톤의 빛[The Light of God/Aton the One Within All]의 우주 위원회[the Cosmic Council]로부터 왔으며, 우리의 형제들인 당신들에게, 당신들 또한 하나됨의 기쁨 속에, 하나님의 신성한 빛과 진실과 아름다움과 지혜의 왕국[God’s Holy Kingdom of Light, Truth, Beauty and Wisdom] 속에 있는, “빛의” 형제단[“Lighted” brotherhood]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아톤[God/A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이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 또는 아톤[Aton]을 언급할 때, 이 분을 “그[HE]”라고 지칭함에 따라 “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주를 가리키는 표현을 당신들의 언어로 옮길 때,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성[Gender]을 나타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아톤은 “원칙적으로[principles]” 남성과 여성 양쪽 모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성에 있어서”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생명체의 영혼은 당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제한된 언어 안에서는 남성 또는 여성의 에너지를 대표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당신들 각각은, 당신들이 겪는 경험에 있어서, 남성 또는 여성의 육체를 선택했습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의 에너지가 당신들 각자에게 있어서 대표성을 갖습니다. 또한 당신들은 우리가 “그”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지칭일 뿐이지, 특정의 성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이를 설명하는 이유는 육체적인 형태에 있어서 “여성들”이 “경시된다고” 느끼거나, 덜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육체적인 형태에 있어서 “남성들” 또한 여성들과 동등할 뿐이지, 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점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창조주/창조[CREATOR/CREATION]의 모든 ‘조각들’은 어떠한 피부색과 어떠한 성을 가졌든 간에, 창조주/창조를 반영함에 있어서 모두 동등합니다. 또한 하나님/아톤/창조[GOD/ATON/CREATION]를 두고, 당신들이 어머니/아버지[Mother/Father]라고 부르거나, 혹은 창조주/창조[Creator/Creation]라고 부르거나, 기타 다른 표현으로 부르기를 더 선호한다면,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질문이기도 한, “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포커스를 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당신들이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을 먼저 도와야 할 것입니다. 앞서 서술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The Laws of God and Creation]’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자”이자 “지혜의 왕[King of Wisdom]”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영적 지혜와 완벽함을 갖춘 위대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인식이 갖는 3차원적 존재로 제한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성’이라는 “제한된” 여건 때문에, 아직 “무한”의 존재 또는 “존재 상태”를 정의할만한 역량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분이, ‘하나로서의 전체성[The Totality of the One]’을 보다 확장시키고 더 많은 경험을 갖도록, ‘하나님의 창조’ 속에 있는 ‘창조의 조각’으로 자기 자신을 “조각화[fragmented]”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법칙, 자연의 법칙, 균형의 법칙, 그리고 창조의 법칙은 모두 동일한 우주적 법칙들[UNIVERSAL LAWS]로서, 응집력 있는 조화와 하나됨[Oneness]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주적 법칙들은 무한한 창조의 전개를 위한 우주의 법전들[COSMIC CODES]로, 하나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확장과 표현을 최대한으로 허용하게 됩니다. 각각의 조각들은 창조주 하나님[CREATOR God]의 일부분이자, 또한 창조[THE CREATION]의 일부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우주의 법전들 또는 “법칙들”은 ‘하나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ONE ALL THAT IS]’의 창조적 전개와 확장에 있어서, 균형잡힌 응집성을 유지해 주는 논리의 열쇠들[keys of LOGIC]인 것입니다. 따라서 배움을 통해, 당신의 확장하는 창조적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해 낼 수 있게 될 때, 당신은 하나[THE ONE]로부터 당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 속에 당신을 묶어 두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악, 죄, 그리고 하나님과 창조의 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지혜를 갖춤으로써, 당신은, 무한한 창조[LIMITLESS CREATION]의 전체성[WHOLENESS]과 하나됨[ONENESS]의 기쁨이기도 한, ‘생명에 대한 사랑[LOVE of LIFE]의 공동-창조[Co-creation]’에 있어서, 당신이 갖는 개인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악은 무엇이겠습니까?” 악은 모두가 “사탄” 또는 “적”으로도 불린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것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하나됨의 전체성의 창의적 전개[creative unfoldment of the totality of ONENESS]’의 표현과 확장을 제한하고 감금하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에너지의 존재는 (자유 의지[Free-Will]에 의해) 허용되고 선택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며, ‘우주적 창조[Cosmic Creation]’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으로서, 오직 ‘전체[the Whole]’가 갖는 경계와 한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은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만, 스스로를 파괴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자신이 부여한 경계 안에서만 지배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또한 팽창하는 ‘하나’의 쇄도하는 물결 속에 떠내려 가게 되어 결국 스스로를 없애 버리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많은 자들은 ‘모두가 하나[ALL IS ONE]’라는 개념을 “궁극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그 의미는 종종 모두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믿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The One]’의 일부로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 ““선”과 “악”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단지 경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의 경험도 아니고, 내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만한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닌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행위나 행동을 두고,” 나쁜 것” 또는 “좋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영원히 무엇이든 허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생명과 선에 반대되는 생각, 말, 행위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당신이 ‘불멸의 의식[CONSCIOUS IMMORTALITY]’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의 왕국[HIS UNLIMITED kingdom]’에 결국엔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그리스도 또는 적들을 알아 봄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법칙들이 강행되게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강제하는 자들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 분은 오직 사람들이 “보다 밝고”, 균형잡히고, “보다 사랑에 입각한” 존재 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눈에 뜨일만한 범례들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각자 각자는 저마다에게 주어지는 여행을 시작해야만 하고, 진실과 신성한 이해의 불꽃을 당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된) 생각, 행동, 행위를 바꾸는 선택을 하고, 이를 통해 하나됨 속에서 하나님과 균형 속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당신으로 하여금 타인이 당신에게 악의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도 “허락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신은 항상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필요하다면 타인이 당신에게 가하는 학대나 손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결코 “희생자”가 되길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 당신이 아는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에 반하는 행위가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에게 가해지는 일을 참거나 “허락”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FREE-will]’라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까? 자유 의지는, 당신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를 배우고, 그리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들이 독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소. 따라서, 악 또한 단지 우리 경험의 일부인 것이오.” 하지만, 다음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아톤은 자신의 완벽한 형상[IMAGE OF PERFECTION]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 분은 당신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당신은 적이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모든 균형의 법칙을 깰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악도 창조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책임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악은, 인간이 스스로가 가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직접 창조한 것입니다! 창조주 아톤은 신성한 자비와 함께 성스러운 균형 속에 자신의 방식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간은 ‘창조적 생명의 영혼[CREATIVE SPIRIT OF LIFE]’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신만을 위한 어둠의 우리[DARK CAGE] 속에 계속 갇혀 있게 될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도 보게 되겠거니와, 당신들의 자유 의지는 실로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게 만드는 당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들의 “변질된” 에고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는 항상 당신들의 영적 이해를 “제한”하고, 결국 당신들이 가진 창의적 잠재력과 조화와 하나됨의 균형을 교란시키고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당신들은 당신들이 가진 유일한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따를 때, 당신들은 논리적 균형에 입각한 하나님의 방식이 진정으로 균형잡힌 영적 자유와 기쁨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앎의 지혜 속에서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주의 창조적 전개[COSMIC CREATIVE UNFOLDMENT]가 펼쳐내는 균형의 흐름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당신이 “헤엄쳐”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당신의 경험들 속에서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죄악들 또는 오류들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사탄” 또는 “적들”이 당신이 하나님과 창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 속에 계속 사로잡혀 있도록 만드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또한 당신이 “제한적으로” 표현되는 현실과 함께 영적 굶주림[spiritual starvation] 속에, 스스로가 갇혀 있게 만드는 “거짓된” 권력[“false” power]에 대한 가짜 “믿음”과 “미신”을 따르도록 만듭니다. 결국 그와 같은 무지 속에서, 당신은 이들의 지배에 계속 구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1. 자만[PRIDE]
자만(자부심)[Pride]은 당신들의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 “1.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 거만; 자기 과대평가. 2. 개인적 위엄과 가치에 대한 적절한 인식. 3. 자기 자신에 대해 공정하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여기서 보다시피, 자만(자부심)에는 두 가지의 전혀 상반되는 “종류”의 정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영혼[the Spirit Within]’에 비추어 볼 때, “죄” 또는 “잘못”으로서, 여기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바로 “거짓된” 자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거짓된 자부심은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부지런히 그리고 정직한 노력으로 이루어 낸 행위나 앎에 대한 자기 존중이나 자기 영예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거만한 우월감’이나 “거만한 독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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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전쟁터로 보내게 되었을 때, 전쟁이 타인에 대한 살인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실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인지 혹은 자신들의 “거짓된” 자부심을 단순히 숨기고 있었을 뿐인지는 바로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전사했을 경우 이내 경악하기 마련이고, 또 그 전쟁이 “어떠한 선의의 영예로운 이유”도 없는 전쟁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거짓된 전쟁에 아들들을 보내고 지지했던 “잘못”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아 보겠습니까? 어느 단계에서든, 거짓된 자부심을 가졌던 자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수나 무지에 따른 결과를 직시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들의 “죽음” 또는 “불명예”를 야기할 수도 있는 “거짓”을 믿고 지지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거짓된” 우월감 뒤에 숨는 편을 택하고, 자신의 “잘못된” 믿음만큼이나 스스로의 판단도 “잘못”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사실들에 입각해서 판단하지 않고, 무엇이 “대중적인” 견해인지에 입각해서 스스로를 형성해 나갈 때, 그들은 이내 무기력한 악의 꼭두각시[powerless puppets of evil]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무감각해지고 게을러진 데다,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라면 전부다 “믿어버리는 쪽”을 단순히 선호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자신들의 귀중한 시간을 스포츠 중계나 TV 드라마를 보는데 허비하지 않으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TV를 보면서,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끝없이 형성하고 강요하는 “그들의 견해”를 액면 그대로 자신들의 견해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자신들의 견해”로 채택하고, “자신들의” 관점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깊은 영혼의 수준에서 벌어지게 되며, 실상 이 영혼들은 이러한 기만으로부터 고통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부심은 오직 이처럼 특정의 “믿음”에 대한 ‘홀림의 상태[TRANCE]’로부터 빠져 나와, 진실을 추구하고 알게 되어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진실을 아는 것’은 개인적 책임에 따른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또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나는 내가 이 일을 잘 수행해 내어 자랑스럽다”라거나 “나는 네가 그 일을 잘 수행해 내어 자랑스럽다”라고 말할 때, 어쩌면 당신은 “거짓된” 믿음이나 독선적 우월성 뒤에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혹은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이나 진실로 가치있는 성취에 대한 정직한 “자부심”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들 각자 각자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구별해 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계속해서 진실의 “환영” 속을 살아가거나, 혹은 당신 자신의 “완고한”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희생자”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례들은 우리의 형제, 하톤[Hatonn]이 피닉스 저널[THE PHOENIX JOURNALS]을 통해 당신들에게 전하는 진실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악이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스며들어 있고, 또 바로 당신들의 눈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이러한 진실들을 맹목적으로 믿기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경고의 깃발을 흔들며” 당신들이 당신들에게 주어진 선물이기도 한 ‘사고하는 지성’과 저마다의 이성을 가지고서, 당신들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WITH GOD WITHIN YOU], 주의깊게 이 책들을 읽어 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TV를 통해[Couch Potato]” 얻어 온 상식들을 뿌리치고, 여기서 제시되는 내용을 입증할만한 “증거들”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당신들 안에 있는 진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능을 가지고, 비난받을 만한 일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에 맞서,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 내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일환으로 당신들에게 사실들(팩트들)을 제시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기의 끝과 시작의 시기에[End/Beginning Time Cycle],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진실의 말씀을 전할 것[THE WORD OF TRUTH WOULD GO FORTH to all]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당신이 “자랑스럽게”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각하고,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 때(모든 사실들의 실체를 믿게 되었을 때), 당신은 더 이상 어리석게 속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계인들은 존재하지 않고, 당신들의 정부가 악한 음모에 개입되었을 리가 없다는 주장들, 여타 이러 저러한 무수한 거짓된 내용들을 당신들의 “견해”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 당신은 한 명의 바보가 되어 적-그리스도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아버지 하나님/아톤이 그러한 당신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푸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날 당신들이 직면해 있는 “환영[illusion]”은 그 성격상, 진실에 관한 다른 누군가의 “거짓된” 허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출되고 둘러싸여 있기에 형성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창조에 의해 주어진 ‘균형의 “우주적” 법칙들’에 관한 논리를 현명하게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면, 당신은 이러한 “거짓” 허상들을 뚫고 나오게 될 것이며, 당신의 진정한 “하나님의” 권능과 또 그 분과의 연결을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당신들 각각이 ‘당신들 안에 있는 진실’을 깨달아 알게 되고, 또 하나님과 창조의 진실과 지혜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 속에서 주어지기를 요구하게 될 때, 당신들은 타인의 “견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참된 지식에 대한 증거와 이해를 얻게 될 것이며 또한 이를 요구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2. 탐욕[AVARICE]
탐욕[Avarice]은 기본적으로 욕심[GREED]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 “특히 부의 소유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 욕심이 많은 자 또는 탐욕스러운 자는 어떤 물질적인 것 또는 부를 얻고 획득하기 위한 과도한 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들은 이기적이고 과도하게 탐내며, 무언가를 얻는 것에 집착하지만,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치있게 보이기 위해서, 또는 승자가 되기 위해서, 혹은 가치있고 승자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미지’ 속에서의 “우월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물질적인 대상에 대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이기적인 갈망이며, 이 시대, 당신들의 행성 위에서, 그 대상은 대개 더 많은 돈이 됩니다. 따라서 과도한 욕심에 사로잡힌 자는 아직 성취되지 못한 많은 물질적 바람들을 갖게 될 것이며, 타인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조차, (물질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어떠한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이를 달성하려 할 것입니다.
욕망의 씨앗은 대개 처음에는, 당신들의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 끝없이 조장되는 성공과 승리의 “이미지들”에 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압도적인 “자기-실패”의 감정에 의해 뿌려집니다. 그런 다음, 이는 동일한 것을 갖거나 만들어 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도 그러한 것을 “가질만하다는” 감정으로 변모됩니다. 당신들의 미디어 매체는 누군가 “행운”이라 불리는 방식을 통해 “무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를 통해 이러한 욕망이 형성됩니다. “행운”이란 무작위의 운이며,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가 창조해 낼 수 있게 도와주는 개인적인 능력과 책임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종종 스스로 느끼는 물질적인 것들의 “부족” 또는 “손실”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신들의 역사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 욕망은 주로 당신들의 법률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자들에 의해,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형성되고, 북돋워지며, 조장되기도 합니다. 사회 속에서 스스로 “빈자”라 여기는 자들과 또 자기 가치 부족에 따른 “희생자들”로 여겨 좌절감을 느끼는 많은 자들은 욕심과 ‘자기 책임 부정’을 조장하는 변호사들의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들의 “서구” 사회가 가장 소송이 빈발하는 사회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서구 사회가 “자신이 받게 된 진짜 손해 또는 인식상의 손해 때문에, 타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향”이 가장 높다는 뜻입니다. 당신들의 참되고 공정한 (법률) 시스템은 거의 사라졌으며, 변호사들은 거의 항상 모든 사건마다 소송의 양 당사자들 모두로부터 이득을 취합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불공정의 시스템 속에서 “승소”하기 위해서는, 소송 상대방을 완전한 재정적, 물질적 파산 상태로 몰고 가더라도, 거짓말하고, 상대를 속이고, 도둑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신이 타인을 상대로 고소를 검토하게 되었을 때, 당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우선 고소하려는 욕구 속에서, 당신의 참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의도된 것이었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었든 간에, 당신은 정말로 손해를 입었습니까? 그리고 당신 역시 이러한 (고소의) 경험을 갖게 되는데 참여했다는 점을 인정하십니까? 타인과 법적 다툼을 벌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왜 당신이 이러한 경험을 갖기를 선택하게 된 것인지,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또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상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타인이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그리고 당신의 감정이나 당신의 자산에 대한 이기적인 경시 때문에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만약 당신이 알게 된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이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당신을 상대로 의도적으로 가해진 이 잘못에 대한 균형을 되찾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분명하게 확립된 내적 의지의 참된 통합성과 함께,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정의가 회복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원함에 있어서 거짓이 필요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의도적으로 가해진 손해를 입게 되었다면, 사실들(팩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당신에게 가해진 악에 맞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라고,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현명하게 “법률 시스템”을 활용하여 정의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소수의 변호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추구해 온 정의의 ‘균형’을 되찾기를 바라는 한,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임을 당신은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슬픈 일이지만, “동전”의 다른 면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이 고소는 당했지만, 사실상 “무고한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손해를 입었고, 잘못 고소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의를 추구하며 싸우기 보다는,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보는 편”이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더 “값싼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의 변호사 협회(ABA)[American Bar Association]를 통해 훈련되고 통제되어 온 변호사들과 판사들이 이 같은 ‘깔끔한 지름길들’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피고에게 최소한의 “손실”만을 야기하는 이러한 합의를 그들은 “사업상의 결정”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양쪽의 변호사들은 모두 완전히 대가를 지불받고, 잘못을 저질렀지만 원고가 승리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피고가 돈을 내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때, 변호사는 시간을 벌고 좀 적은 보수를 받지만, 대신 그는 고객의 돈을 “아끼게” 만든 셈이 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틀렸습니다! 피고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자신이 “유죄”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외의 선택이란, 수 년에 수 년을 더한 시간이 걸리는 소송 건에 매달리면서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황폐화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통합성이 있습니까? 여기 진실이 있습니까? 친애하는 자들이여, 타인의 손해를 바탕으로 물질적인 승리를 쟁취하고, 과도한 비용을 무릅쓰고 ‘자신의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만든 소송 방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승자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채택하는 방식임을 알아 보겠습니까? 그들은 정직, 통합성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에 대한 완전한 무시 속에, 비용이 아무리 들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 보겠습니까? 승리만이 목적인 것입니다. “경쟁” 체제 속에서는 어떠한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항상 이겨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 이외의 선택이란 패배자가 되는 것 밖에 없으며, 그 때 이 패배자는 정말로 ‘가치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하나님의 왕국에는,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창조의 신성한 완전성[DIVINE PERFECTION OF GOD CREATOR/CREATION]’의 조각들을 가졌듯이, 오직 승자들만이 존재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다른 누구와도 경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각 ‘우리 아버지[OUR FATHER]’로부터 부여받은 유일하고 개별적인 능력과 역량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아톤[GOD/ATON]에 대한 중요성의 반영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도 더 낫거나 더 못하지 않습니다. 각각은 하나님과 창조[GOD AND THE CREATION]의 끝없는 전개에 있어, 앎과 아름다움의 확장을 위한, 저마다의 유일한 창조적 잠재력[unique creative potential]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상대로 “경쟁심”을 느낀다면, 실상 당신은 타인의 역량에 대한 비교 속에 스스로가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쟁”의 환상 속에 놓여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가지 ‘표현’을 다른 한 가지 ‘표현’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표현들’은 하나의 ‘신성한 자아’의 발견의 전개 과정[the unfolding discovery of THE ONE DIVINE SELF]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갖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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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탐취[GLUTTONY]
우리는 먼저 탐취자(대식가)[Glutton]에 대한 정의를 통해 탐취의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탐취자(대식가) : 1. 과도하게 먹는 자 2. 어떤 것에 대한 매우 과도한 취향 또는 수용력을 가진 자”. 탐취에 대한 이해의 열쇠가 있다면, 이것은 이성적인 필요를 넘어 과도하게 가지려는 행위, 취향 또는 어떤 물질적 상태에 대한 욕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음식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학대”를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관계를 탐취할 수 있고, 누군가는 전쟁을, 또 다른 누군가는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탐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인식상의” 육체적 쾌락[“perceived” physical pleasure]을 과도하게 취하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자는 자신이 과도한 취향을 갖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충분치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때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탐취는 자기 학대의 일종인데, 왜냐하면 음식, 성관계, 또는 권력과 같은 것을 과도하게 “취하는 것[intake]”은 종종 스스로를 탐취에 따른 자기 파괴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필요 이상의 이와 같은 과도함은 그 당사자 내에서 동화되기 보다는, 사실상 ‘축적되게’ 되며, 이후 그 주인을(숙주를) 집어 삼키고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기억하겠습니까?)(‘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 자신 안에서 동화시키거나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너머로 ‘에너지’를 축적하게 될 때, 모든 에너지의 성격이 다 그러하듯, 이처럼 “갇힌” 에너지는 “정적” 상태[“static” state]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주인(숙주)의 파괴를 수반하더라도, 다시 움직이려 하고, 살아있는 상태가 되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과도하게 갇힌 에너지는 탐취자 자신에게 있어 마치 “기생충”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여, 당신들도 보게 되겠지만, 어떤 에너지가 비정상적인 기간 동안 축적되고, 저장되고, 고이고, 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 에너지의 통합성이 저해됩니다. 이것은 보존된다기 보다는, 저장된 음식물, 또는 저장된 연료가 그러하듯 상태가 나빠집니다. 다양한 보관 방법이나 절차에 따라, 음식물이나 연료의 수명이 연장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음식이나 연료가 계속 정체된 상태 또는 휴지 상태에 있게 될 때, 그 질이나 통합성의 수준은 대개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버지 하나님/아톤[GOD/ATON]이 그 분을 위한 봉사를 지속해 나가기 위해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제공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생명의 영혼[the SPRIT OF LIFE]’의 일부이기도 한 당신 안에, 어떤 에너지를 과도하게 축적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소중한 자들이여, 이에 대한 옳은 대답은, 만약 당신이 ‘당신의 참되고 무한한 권능’으로서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FATHER WITHIN]’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혼이나 육체가 당신을 지탱하는 데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과도하게 소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 안에 당신은 ‘그 분을 위한 봉사’를 계속해 나가는 데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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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자기 학대에 대한 탐취”에 빠져 있다면, 그 자는 스스로에 대한 명예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가 부족한 자로, 자기 자신에게 부적절한 스트레스와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끊임없이 축적해 나가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 자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희생자로서의 경험을 과도하게 반복하는 “탐취”에 빠져있는 셈입니다.
탐취는 실로 ‘생각이 없는[mindless]’ 행위로서 탐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에 홀린 상태 또는 전적으로 구속된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탐취는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감정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 행위이자, 어리석은 집착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당신들도 이제 알아볼 수 있겠지만, 탐취는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는 자들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가 부적절한 인간이라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대상,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느끼는 자들이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구와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들의 사회 안에 많은 젊은 남녀들이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껴 반복적으로 “아무 생각없이” 폭식하고, 이내 스스로에 대해 역겨움을 느껴, 다시금 먹은 것을 토해내곤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중독적인” 행위를 “병적 과식욕[bulimia]”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증세는 특히 젊은 층에 있어, 그들에게 제공된 것 혹은 스스로 택한 것이기도 한, 어떤 “거짓된” 완벽함의 육체적 이미지 또는 여타의 이미지에, 자신들이 아무리 이르려고 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새로운” 질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단순히 병적 과식욕을 가진 자와, 실제로 필요 이상으로 먹어서 과도한 체중을 갖게 되는 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양쪽 다 내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먹으며, 종종 스스로에 의해, 또는 타인들에 의해 자신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곤 합니다. 다만, 병적 과식욕만을 가진 자는 겉보기에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여 자신의 ‘음식 중독’을 세상으로부터 감춤으로써, ‘탐식과 허영’, 이 두 가지 모두를 취하는 것입니다. 반면,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과체중인 자는 다양한 이유로 음식 중독을 갖게 된 자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의한 또는 타인에 의한 감정적 공격을 막아내는 보호 “막”을 (과도한 몸무게로 생겨난 보호 “막”을) 가지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 양쪽 모두 음식 중독자들로 이들은, 왜 자신들이 음식을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욕구”가 실제로는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중독을 치료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정의하는 이러한 “죄악들”은, 실상 당신들 안에 있는 적-그리스도라는 암적 존재로 인해 생겨나는 “증상들”로, 당신들의 창의적인 ‘생명의 영혼[SPIRIT OF LIFE]’을 집어 삼키고, 감금하고, 한계지우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창의력을 제한하는, 이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족쇄로 인한, 이 절대적인 고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당신은 이러한 증상들을 알아 보고, 당신의 창의적인 영혼의 전개에 대한 이 같은 한계의 족쇄들을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FATHER WITHIN YOU]께 그 분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HIS POWER, HIS WISDOM, AND HIS LOVE]을 자신에게 건네 주실 것을 요청해야만 할 것입니다!
4. 욕정[LUST]
소중한 자들이여, 이제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자신들과 또 당신들 안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이 한 가지 “죄악”이, 무자비한 적-그리스도에게 잘 이용되어, 당신들의 종을 거의 절멸 직전으로 몰고 갔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 안에 있는 생명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자, ‘아버지의 사랑[THE FATHER’S LOVE]’에 대한 이 같은 타락이 당신들에게 있어 육체의 질병은 물론이고 영혼의 공허와 부족을 낳게 된 것입니다.
욕정을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1. 육체적, 성적 욕망. 2. 과도한 성적 욕망으로, 특히 즉각적이거나 무자비한 만족을 추구하는 것. 3. 압도적인 욕구: 권력에 대한 욕망. 4. 열정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바람을 갖는 것.”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과도하거나 압도적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혼과 생명을 고갈시킵니다. 욕정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아톤에 대해 “적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욕망으로, 오직 당신들이 처해 있는 3차원의 물리적 공간에서만 허용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욕정의 감정이라는 이 독의 씨앗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영리하게 뿌려지고, 형성되고, 권고되어, 결실을 맺어 온 것으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갖는 참되고 신성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대체하고 파괴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당신들은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이 당신의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게 됨으로써 너무나 혼동스러운 상태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욕정이 사랑은 아니라고 믿는 자들도 성적 욕망이 친밀한 관계를 공유하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일부라고는 여기고 있을 만큼 여전한 혼동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욕정은 육체적, 성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원 나잇 스탠드(하룻밤의 밀회)”(이런 세상에!)이든 “사랑하는” 파트너와의 행위이든 간에, 욕정은 욕정일 뿐인 것입니다. “성적” 행위에 대한 남용이 어떻게 당신들의 영적, 창조적 잠재력을 파괴시키는 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듣길 바란다면, 부디 우리가 앞서 제시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읽고, 또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욕정”이라는 표현은 부자연스럽고, 육체적인 욕망, 특히 “성적” 결합에 대한 욕망을 주로 나타내는 것이지만, 권력이나 돈 또는 물질적인 환상 속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가 이 같은 (자신의 영혼에게 있어) 부자연스러운 욕망에 매달릴 때, 당신은 단순히 현실처럼 보이는 “환상”에 심각하게 매달리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결국 무지의 어둠 속에도 오랫동안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권고하는 것으로 당신들이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부자연스럽거나 과도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서, 당신 안에 계시고, 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도 있는, 참되고 신성한 빛에 대한 앎과 봉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5. 분노[WRATH]
분노[WRATH]는 당신들의 사전 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 “1. 극도의 또는 격렬한 화. 2. 강렬한 화, 격노. 3. 복수심에 따른 행위.” 그리고 복수/보복[vengeance/revenge]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벌, 상해, 또는 손실을 통한 앙갚음. 2.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보복의 수단.”
이제 분노와 화 사이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두 가지는 종종 연결되어 있지만, 분노는 훨씬 강렬하고 감정적인 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노에 찬 자는, 어떤 면에 있어서, 자신에게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악의적으로 “잘못”을 끼쳤다고 여겨지는 자에 대해, 실제로 자신의 감정에 따른 보복을 바라게 됩니다. 이번에는 화를 정의해 봅시다. : “잘못이나 손해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 대한 적개심 또는 강한 불만의 감정.” 보다시피, 화는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향할 수도 있는 것으로, 실질적인 또는 인식상의 “잘못”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이를 목격하거나 경험함으로써 생기는 불만의 감정입니다.
자기 자신 또는 타인에 대해 가해진 (또는 가해지지 않은) 어떤 행위에 대해 갖는 화는, 종종 단순한 성마름에서 시작되지만, 해결되거나 해소되지 못할 경우,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궁극적으로 참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내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아톤의 지식과 지혜를 통해 성취되지 못할 경우, 분노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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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난은 스스로 느끼는 성마름, 좌절 그리고 화로부터 생겨나는 가장 보편적인 “부정적” 감정 표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완벽한 것인지에 대한 거만한 자기만의 “견해”에 입각하여, 타인과 그들의 행위, 행동, 또는 그들이 행한 일을 비난함으로써, 열등감을 해소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진짜” 문제 또는 인식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한 최악의 적이 되기도 하는데, 당신 자신과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스스로가 비난하고, 자기 자신을 항상 열등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여겨 책망하기도 합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그러기를 멈추십시오. 당신들 각자 각자는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영혼인, 하나님/아톤/창조[THE SPIRIT OF LIFE, GOD/ATON/CREATION]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특정한 상황에 있어 스스로 행한 일이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는 마십시오. 그러한 경험을 갖게 된 것을 축복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자기 자신과 또 자신이 가졌던 용기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러한 경험 자체를 기쁨 속에서 당신 안에 있는 영적, 창조적 잠재력을 발견하고 이를 계속 활용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조정의 기회로 만드십시오.
이제, 당신 또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 대해 진정으로 정의롭지 못한 일이 가해졌기에 당신이 화가 났다면, 이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의 “신호”로써, (화가 나 있는 동안에) 당신은 사실상 당신에게 또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이미 가해진 것을 다시 제대로 되돌려 놓는 것에 대한 무기력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를 억제하거나 내적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기 보다는 우선 이러한 화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아톤으로부터 떠나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는 분노의 단계로 변모될 것입니다. 당신이 화를 “떠나가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될 일은 당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진 행위를 우선 제대로 인식하고, 당신에게 가해진 이러한 행위 또는 범죄로부터 당신이 얻게 될 교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식별하는 것입니다. 보다 신속히 당신에게 가해진 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될 때,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왜 당신이 이러한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했던 것인지, 그리고 당신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는 정당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무엇이 되돌려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식과 진실의 지혜를 발견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에 반하는 범죄의 수준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안에서, 그에 대한 “징벌”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살인이나 강간을 범했다면, 그에 대한 징벌의 평결도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에 근거한 논리와 지혜에 따라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당신의 분노에 찬 감정과 복수심에 따른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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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 나는 사난다이다.”라는 책(피닉스 저널 제 2권--역주)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들어왔을 것이니라. 그러나 내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연의 창조의 법칙[the natural Law of Creation]에 따라 정의를 행할 때, 너희는 논리와 지혜 속에 답이 주어짐을 보게 될 것이니라. 정당할 때 사랑을 건네고, 자연의 법칙이 벌을 요구할 때 벌하도록 하여라. 너희는 창조의 법칙[the Laws of The Creation] 속에서 옳은 판단을 하여야만 할 것인데, 왜냐하면 ‘지혜 속의 판단’이 이미 제시되어 있는 창조의 법칙을 너희가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라.”
“진정을 가지고 부탁하는 자에 대해서는 요구를 들어 주되, 정직하지 못하며 너희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안위와 지위를 높이려고 물어 오는 자에 대해서는 돌아서서 떠나도록 하여라.”
“너희는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는 말을 들어 왔을 것이니라. 그러나 내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연의 창조의 법칙에 따른 이해와 사랑을 행하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너희는 정의와 논리에 따라 옳게 행하고 옳게 느끼리라. 정당할 때 사랑을 행하고, 자연의 법칙이 벌을 요구할 때에도, ‘대상이 아닌 행위’를 나무라도록 하여라.” (인용의 끝)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들이 식별하고 목격하게 되는, 또는 당신들의 환상과도 같은 경험 속에서 겪게 되는, 거짓말, 속임수, 불공정 앞에서도, 화를 내고 역겨움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뜻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되는 화에 따라 당신은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부터 먼저 해야 할까요?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와의 회합을 갖고, 당신이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 보십시오. 이를 알아 보는 데에 수 일이 또는 몇 주가 걸릴까요? 만약 당신이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고, 또 그러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순식간에라도 당신이 해야 될 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당신 안의 목소리를 들어 보려는 의지에 따라, 그리고 어떤 조치를 취할 지에 대한 당신의 뜻에 따라, 보다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안의 영혼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여부는 항상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피닉스 저널”을 소개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해 봅시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곳에서 옳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알게 될 것이고, 사악한 거짓말들, 속임수들에 대해 화가 나고 역겨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저널들 안에 진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저널들을 읽어서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길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을 알게 된 자가 행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그런 다음, 당신이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결정에 달린 문제가 될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알게 된 것에 따라 당신 안의 영혼과 함께 움직이기를 바라며, 최소한 진실을 들으려고 하는 모든 자들과 이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그리고 당신들이 거주하는 행성에 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들은, 당신 안의 영혼으로부터 제시될 것이고, 창조주/창조[CREATOR/CREATION]에 의해 당신에게 주어진 재능에 따라, 영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톤 사령관이 현명하게 제시한 다음 진실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할까 합니다. “어떠한 희생자[Victims]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희생당하기를 “지원한 자들[volunteers]”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6. 시기[ENVY]
우리는 이 저널의 앞 부분에서 제시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에서 시기[ENVY]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미 논한 바 있습니다. 왜 시기심이 인간의 “치명적인” 죄악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반복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기심은 타인의 우월한 업적, 재능, 또는 소유에 대한 분노 또는 불만의 감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타인에 대해 부러움을 느낀다면, 그는 사실상 열등감을 가진 셈인데, 왜냐하면 그는 우선, 타인의 행위 또는 성취가 자신의 것이기를 바라는 감정을 갖고 있으며, 둘째로 그러한 행위나 성취가 자신의 역량 너머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은 당신이 창조한 운명보다 “더 나은 것”을 당신 바깥에서 찾느라고 전 생애를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당신의 가치’를 당신의 바깥에서 찾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의 영적이고 창조적인 잠재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좌절감 안에 당신을 가두어 버리고 마는 셈입니다.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 있다면, 당신의 경험 속에서 당신이 해온 모든 것들은 지금껏 당신 자신이 선택해 온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놀라운 성취를 남겼다고 “인식”하는 타인에 대해 경의와 존중의 감정을 갖는 대신에 왜 당신은 부러움을 느끼는 것입니까? 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놀라운” 성취가 무엇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자기 자신의 성취에 따른 기쁨과 영적 지식과 지혜의 정도에 따라, 이를 가늠해 보지는 않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의 성취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현현해온 “환상” 속의 모든 경험들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짐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에게 부여한 권능을 되찾으십시오.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아톤에게, 영예, 균형, 조화, 기쁨, 통합성과 진실 속에서, 그 분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실 것을 부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아톤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도 한 하나[THE ONE ALL THAT IS]’의 기쁘고도 창의적 전개에 있어서, 당신 만이 할 수 있는 공헌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7. 나태[SLOTH]
우선 나태가 무엇인지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 “게으름(애를 쓰는 노력에 반대되는 것); 무위; 일하기 싫어함(일하거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거부).”
우리가 당신들의 행성 위에서 가장 자주 목격하는 사례는 바로 하나님이 부여한 ‘이성적 마음[reasoning MINDS]’의 나태입니다. 이 나태한 마음이 바로 당신들로 하여금 거짓과 거짓 정보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 대신 생각하고 추론하도록 내버려 두는 습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게으름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스스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마음을 갖고, 적절한 조사를 통해 무엇이 진실인지에 관한 지식과 지혜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진실에 대한 타인의 추정이나 의견을 믿는 쪽이 더 편하다고 여기도록 만든 것입니다. 당신들도 보다시피,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진실을 알고 추구해야 하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당신들은 “거짓” 또는 “기만”이 나중에 발견되었을 때, 당신 밖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심하게 불평하고 비난하고, 책임을 떠 넘김으로써,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던 당신의 “잘못”을 더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직도 무지가 축복[IGNORANCE IS BLISS]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성한 지식과 지혜의 내적 성취와 습득[GODLY KNOWLEDGE AND WISDOM ACCOMPLISHED AND EARNED WITHIN]이야말로 진정한 축복[TRUE BLISS]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진실에 대한 무지는 당신을 거짓의 삶 속에 가둬 놓는 환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으며, 진정으로 슬픈 것이 있다면, 당신이 속고 있으며 함정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을 묶고 있는 체인은 보다 꽉 조여질 수 있으며, 정작 당신이 진실에 대해 알게 되어 깨어났을 때, 이 체인은 문자 그대로 당신을 “후려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종종 너무나 큰 트라우마를 남기며, 당신이 스스로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육체의 죽음 만이 당신이 스스로 허락한 이 고통과 공포로부터 놓여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몰랐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항상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당신이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내적 지식과 지혜로 점차 무장해 나가게 되었다고 할 때, 당신의 뜻에 반해, 혹은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 주위로 스며 들어 있는 이 사악한 환경을 바꿔 놓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신의 무관심하고 나태한 마음[MIND-SLOTH]은 점점 더 냉담함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적-그리스도에 맞설 수 있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능을 가졌음에도, 절망과 낙담, 꼼짝도 할 수 없는 무희망에 사로잡히고 이에 압도되어 버리지는 않겠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의 형제들이자, 하나님/아톤과 창조[GOD/ATON AND THE CREATION]의 진실과 빛과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호스트들로서, 분명코 당신들의 뜻에 반하는 일들이 펼쳐질 가능성을 낮추려는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들을 것입니까? 당신들을 볼 것입니까? 당신들은 하나님이 내미시는 진실과 자비의 손, 사랑과 지혜의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친애하는 자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에게 선택을 요청합니다. 그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부디 당신 안에 계신 신성한 하나님의 빛이기도 한, 진실과 지혜 그리고 자유에 불꽃이 당겨져서, 기쁨 속에 당신이 스스로의 의지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아톤과 창조의 무한한 의지를 펼쳐 나가는 데, 봉사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나태에는 물론 육체적인 나태와 게으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종종 ‘나태한 마음[Mind-sloth]’의 짝이 될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마음을 ‘앎’ 속으로 옮겨두지 못한다면, 당신의 육체 역시 동기 부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삶을 살아가거나 삶에 참여할 역량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당신의 삶의 운명을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태한 자들은 그저 자기 연민 속에 조용히 앉아 있거나(또는 그렇게 조용하지 않게 앉아 있거나), “바깥 세상의” 모든 것들을 비난하지만, 자신이 “인식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 책임은 지지 않는 것입니다.
8. 두려움[FEAR]
우리는 앞서 “내재하는 적-그리스도를 식별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두려움의 감정이 “치명적인” 죄가 된다는 점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고착화[FUTURE-FEAR ORIENTATION]된 환상 속에 당신들을 가둬둔다는 사실을 논했습니다.
두려움을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 “1. 위험, 곤란 등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생겨난 동요된 감정. 2. 자신의 바람과 반대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 3. 깊은 공포와 무서움의 감정” ......
발생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끝없는 동요와 불안 속에 당신을 가둬 둘 때, 당신은 영원 속에서 항상 ‘지금[NOW]’이기도 한, 삶의 현재의 순간들을 도둑질 당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미래에 발생하게 될 일 또는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자는,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많은 “시간”을 걱정[WORRY]하면서 보내며, 종종 마지막 선택을 하는 데에 꾸물거리게 됩니다. 걱정[WORRY]을 정의해 봅시다. : “1. 마음 속의 불안함; 초조. 2. 이빨로 무언가를 물어 뜯거나 찢고 싶은 듯한 상태. 3. 마음 속에 불안한 감정이 생기게 하는 것; 근심거리. 4. 괴롭거나 난처하게 만드는 것. 5. 불안을 야기하는 어떤 것.” 당신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거나 들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 “나는 아플까봐 걱정했다!” 그런데,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걱정”은 문자 그대로 당신의 육체를 아프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 속으로 어떤 상황이나, 생각 또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당신은 스스로 두려워하는 것을 실제로 “현실화”시키게 됩니다. 당신의 최악의 두려움에 따른 물리적인 결과가 실제로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당신은 두려움과 걱정을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발생한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알아 보겠습니까? 당신은 두려움의 감정적 반작용 속에서 비록 그게 당신의 “마음” 속에서이지만, 최악의 것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합니다. :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 왔듯이,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나 LA에서 엄청난 지진이 곧 발생하게 될 공산이 크다고 한다면, 이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확대”시키고, 이로 인해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만드는 셈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당신들은 당신들의 “현재” 상황에 관한 진실에 입각한 팩트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이 행성, 어머니 지구는, 그녀의 수호자들이기도 한, 바로 당신들에 의해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정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엄청난 지구 상의 격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머니 지구의 내부를 곪아 들어가게 만드는 핵폭발이나 살충제, 기타 등등의 물질들로 인해 누적된 독극물들을 다시금 지표 위로 올려 보내는 과정의 일부로서 생겨날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은 인위적으로 날씨 패턴을 변경시키기도 하고, 당신들의 “취약” 지역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폭탄들을 폭파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러시안 코스모스페어들[Russian cosmospheres]도 갖고 있습니다.(‘미 우주왕복선과 러시안 코스모스페어’, ‘제 1차 핵 전쟁 계획’ 참조--역주) 말하자면, 당신들의 소중한 행성은 오직 자기 정화의 계획만을 가지고 있지만, 소수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어둠의 형제단은 당신들의 행성을 통제하고, 궁극적으로 보다 쉽게 자신들의 지배력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세계 시민들을 함께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엘리트들이 당신들을 상대로 행해 온 거짓, 속임수, 은폐들에 대한 진실의 정보들이 피닉스 저널을 통해 공개되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까? 당신들은 “부정적일” 것으로 보이는 원치 않는 결과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고려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십니까? 여기 피닉스 저널들은 진실 속에 주어지는 정보들로서, 명백한 현실 앞에서 “부정적으로도” 또는 “긍정적으로도”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여기서 제시된 대부분의 정보들은 “사탄”과 “적들”이 누구인지 드러내 보이기로 한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입니다. 이 “사탄” 또는 “적들”은, 억지로 또는 당신들의 허락 하에, 당신들이 당신들 안에 계신 창조주와 마치 분리되어 있는 듯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도록 그간 당신들을 ‘인질’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보유한 ‘하나됨의 권능’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이러한 진실에 대한 기만 속에 그렇게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더 이상 진실에 대해 무지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갖게 된 두려움 뒤에 숨어 버리거나 스스로 느끼는 무력감 속에만 빠져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당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만약 그러한 계획이 당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진실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통해 ‘자기-발전’과 ‘자기-확장’의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전개를 위한 것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도 보게 되겠지만, 만약 당신이 앎을 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그 자체가 진실에 대한 지식과 지혜 속에 당신이 보다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 부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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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이해함에 있어서 당신들이 알아봐야만 할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명백한 또는 명백하지 않은 위험에 대한 “경고”의 메커니즘으로써 두려움을 또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이 물리적 행성 위에서 “생존”을 위한 당신의 욕구의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의 “베일”로 인해 야기되는 한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당신에게 공포감을 주고, 당신을 통제하고 노예화시키기를 바라는 “사기꾼들” 또는 “사탄”에 의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보다 조장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사실을 이제 잘 알게 된 당신들 조차도, 만약 당신 또는 당신의 가족이 어떤 방식으로든 위협에 처하게 된다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두려움이 주는 “경고”의 성격을 알아봄으로써, 그리고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와 상담과 안내를 추구함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 또는 다른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지시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요컨대, 우리가 “당신은 당신의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두려움이 당신을 무력감 속에 혹은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속에 스스로를 마비시켜 버리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라면 당신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어머니께 부탁하는 한, 그것이 무엇이든 기필코 주어질 것입니다!!
9. 죄책감[GUILT]
이제 우리는 죄책감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당신들로부터 ‘지금’과 삶의 현재의 순간들을 빼앗아 가는 방법의 한 가지로 어떻게 과거의 잘못 속에 당신을 가둬두는 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먼저 죄책감(또는 유죄)[guilt]을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 “1. 법적 또는 도덕적 잘못을 범한 사실 또는 상태. 2. 실제의 또는 상상의 잘못된 행동을 행한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후회의 감정. 3. 죄가 되는 행위.” ......
우선적으로 당신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과거의 생각, 말, 행위로부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항상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영혼[YOUR SPIRIT WITHIN]’에 반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재한 영혼[the Spirit Within]에 대한 “잘못”은, 당신이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비난하고, 자기 학대적인 생각이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벌줄 때 생겨납니다. 당신은 항상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가, 어떤 행위나 일어난 일이 실제로는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제공하거나 부과한 것을 당신 스스로 받아들이거나 이에 대한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죄책감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이는 “현대” 서구 문명 속에서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겪는 경험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11살짜리 소녀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그 분들로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평탄한 유년기를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은 당신의 부모님이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없으며, 곧 이혼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부디 이 상황을 잘 이해해 보십시오. 부모님이 이혼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비난합니다. 당신들도 보다시피, 아이들은 종종 “아빠, 엄마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분들은 나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만약 한 쌍의 부부가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사실상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끔찍한 변화나 이혼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는지 알아 보겠습니까? ......
당신은 이러한 일이 어린 여자 아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 보기 시작했습니까? 그녀는 스스로가 거절받았다고 느낍니다. 그녀는 부모님의 이혼이 어쩌면 자기 자신이 충분히 “착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거나,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이 어린 여자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화와 분노를 터뜨리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오직 이 아이의 영혼에 고통을 더해 주고,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것만을 심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녀가 사랑하고, 신뢰했으며, 심지어 우상화하기까지 했던 두 분이, 더 이상 그녀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녀는 외톨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당신들 대부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들이 건네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진실된 사랑을 조건 없이 항상 되돌려 받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제 이 어린 여자 아이는 스스로를 벌주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정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사랑과 수용을 바깥에서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10대 시절을 보내면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거나, 타인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거부되는 행동을 통해, 희생자의 길을 걷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보다시피, 지금 어른이 된 대부분의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오직 사랑받길 원하지만, 스스로를 자신이 갈망하는 참된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자기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거나 또 그런 불명예스러운 관계 맺기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적으로 파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떠나가 버린” 아버지에 대해 분노해 있기에, 어쩌면 “남성들” 모두에게 분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를 대표하는 모든 “남성들”을 벌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굳어 버려, 어떠한 기쁨도, 사랑도, 애정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세상을 배척하고, 고독과 비통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분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겪는 경험들 속에서 “부정적인” 반응만을 보이고 말 때, 커다란 슬픔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 속에, 이 어린 여자 아이에게 그녀를 사랑하고 돌봐 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보도록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건네는 사랑의 “표시들”을 그녀에게 제시할 것이며, 이를 통해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내재해 있는 병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건네진 하나님의 사랑을 그녀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어떤 것도 강요하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사람들을 현명하게 선택하실 것이며, 가장 받아들이기 용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이를 제시해 보이실 것입니다. 그 때, 그녀가 얼마나 이를 잘 알아보고, 또 스스로에게 부과한 “죄책감”을 용서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오직 ‘그녀의 영혼의 통합성’에 달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 왔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기꺼이 하나님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도록, 타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또 고난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당신들은 어려운 “테스트”를 거치기를 단순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테스트를 통해, 당신들의 형제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이렇게 심하게 상처입고, 속임을 당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길을 잃게 된 것인지를 이해하고 이에 연민을 느낌으로써, 속임을 당한 자들이 처한 환경을 제대로 알게 되고, 또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이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GODLY TRUTH WITHIN THEM]의 “빛[THE LIGHT]”을 볼 수 있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학생들이여, 부디 제시되는 교훈들, 새로 얻게 되는 교훈들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보십시오. 그 때 당신들은, 이러한 과정들로 인해, 영적으로 보다 강건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 고착화된 상태에 대해 조금 더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한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면, 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타인에 대한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리하여 교훈을 얻고 배웠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죄책감이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이 “끔찍한” 상황 주변을 허우적거리며, 스스로에게 유감을 표하지만, 그러한 “잘못”이 사실 당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고, 교훈을 얻고, 그런 다음 자신을 용서하고, 이러한 감정이 떠나가게 하십시오. 그것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이 “끔찍한” 일을 계속 “되풀이”하여 당신의 영혼에 반하는 과오를 끝없이 되뇌인다면, 당신은 정작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가하는 징벌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뜻인 것입니다. 이를 알아 보겠습니까? 당신은 주변을 계속 배회하며, “나는 이렇게 했어야 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다음 번에 유사한 상황이 되풀이 된다고 할 때, 이제야말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합성’에 따라 반응하는 것인지를 알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10. 위선[HYPOCRISY]
위선이란 “누군가가 선량함이나 고결함을 가진 듯한 감정이나 특성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제 17계명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가장 큰 “표식”은 바로 그들의 위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신성한 독실함과 고결한 도덕적 표준을 지닌 듯한 “외양”을 주의깊게 형성해 내는, 당신들의 종교 기관에 몸담고 있는 위선자들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덕에 대한 “신념”을 갖고서, 놀라운 수준의 “선함과 신성함”을 보유한 채로, 이러한 미덕을 당신들 앞에서 설파할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자신들이 이미 “머무르고” 있는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당신들을 인도하려 할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당신들은 이처럼 위대한 자들 곁에 있는 기회라도 “얻기” 위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이 거짓된 자들이 들고 있는 “모자” 속을, 당신들이 기꺼이 헌납하려 하는 돈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쩌면 당신들 역시 “가치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은 위선자들의 소유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더 이상 내놓을 돈이 없게 될 때까지, “모자”를 돌리고 또 돌릴 것입니다. 마침내 당신들의 돈이 바닥났을 때, 그들은 당신들을 저버릴 것이며, 당신들을 “무가치한 자들”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 때 대부분의 당신들은 스스로가 정말로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고, 가난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들을 유혹하여 자신들의 “노예”로 만드는 동안, 이 위선자들은 당신들을 “조롱하고”, 증오와 조작으로 형성된 “거짓의” 화려한 외관 속에 머무르며, 당신들, 눈 먼 자들과 무지한 양떼같은 사람들[sheeple]로부터 훔쳐낸 산더미같은 “부”를 바라보며, 음탕하고 탐욕스럽게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종교적” 위선자는 당신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또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이제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도 알기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기만의 도살장”으로 안내하는 한편, 꽤나 체계적으로, “비밀”의 문 뒤에서, 바로 당신에게는 따르라고 지시했던 신성한 행동의 규칙들을 자기 자신은 모두 다 어길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자들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타인에 대한 권력과 통제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모든 면에 있어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그가 타인들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어, 그들의 돈을 거둬들여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게 될 때,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우리가 앞서 ‘자만[Pride]’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뤘던 거짓 “자부심” 또는 병적인 자기애[narcissism]라고 할만한 악마의 주문에 걸려 있는 셈인 것입니다.
당신들, 친애하는 눈먼 자들은 오늘날 나르시즘에 빠진 사악한 위선자들이 당신들의 세상의 대부분의 정부와 기관들 안에 침투해 들어와 리더와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허용했습니다. 이들은 사악한 통제를 가하려는 자신들의 의지를 통해, 모든 선과 자유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당신들 모두를 노예화시키기에 알맞은 자리를 선점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들은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들로, 당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사실상, 당신들이 그들 앞에 “무력한 채로” 머물러 있도록 만들고, 당신들이 그들의 손에 철저히 통제될 수 밖에 없도록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악의 씨앗들인 이 “악당들”은 오늘날 너무나 용의주도하게 침투해 들어와, 스스로 당신들의 “지도자들”임을 자처하며, 그러한 자리를 거의 모두 다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는 나르시즘적 위선자들인 “사탄” 또는 “적들”은, 조용하고도 비밀스럽게, 그러면서도 극도의 교활함을 가지고, 오늘날 당신들을 통제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당신들의 눈 앞에서 권력 찬탈과 같은 범죄를, 대부분의 당신들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이뤄냈으며, 오늘날 당신들을 노예화시키는 일을 거의 완수해 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과의 최후의 대결에서는 결국 하나님이 이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각각의 조각들이기도 한 당신들이, 균형의 법칙을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분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로 선택해야만이, 그 분의 성스러운 사랑과 진실과 지혜와 생명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의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하나님/아톤은 당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아톤의 사랑과 보호와 안내는 당신들로부터 불과 한 호흡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들의 진정한 청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은 ‘생명의 하나님의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모두가 악일 뿐인 어둠과 파괴와 무지와 분열의 “환상”의 함정 속으로 빠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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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허영[VANITY]
우선 허영[vanity]을 정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헛된 상태나 성격; 자기 과대 평가 (거만한 자존심). 2. 의욕적 과시; 허세. 3. 성과없고 쓸모없는 특성 또는 존재의 상태. 4. 헛되거나 실체없는 것.” 그럼, 이제 ‘헛된[vain]’이라는 단어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1.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의 외관 등에 대한 부적절한 감탄으로 가득 차 있거나 또는 이를 보여주려 하는. 2. 비생산적인; 성과없는. 3. 실질적 근거를 갖지 않은; 공허한; 헛된 희망[vain hopes]. 4. 허세부리는; 눈길을 끄는. 헛되이[in VAIN]--목적없이; 결과없이.”
말하자면, 허영이란 자신의 신체적 외관, 이미지 또는 외양을 보여주거나, 이를 변경시킴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감탄받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공허한 자들은 사실상 내적인 열등감과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느끼지만, 종종 자신의 외적 모습을 자랑하거나, 또는 자신의 “우월한” 거만함을 드러내는 허세를 ‘보여줌’을 통해(과시적이면서도 과도한 드러냄을 통해), 내적인 열등감을 숨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르시즘[Narcissism]은 자신의 내적, 외적 면모에 대한 자기-과대 평가 속에 부적절한(과도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감탄을 하고,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나르시즘에 빠진 자들은 외양에 있어서도, 지적 수준에 있어서도, 중요성에 있어서도 스스로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채택하는 사회적 기준에 따라, 남성과 여성 모두, 신체적으로 아름다운 “외양”에 집착하는 증거들은 주로 당신들의 서구 “문명” 속에 넘쳐 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외양”이 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이러한 사고에 의해 통제되어 온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바로 적-그리스도가 당신들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통제되는 언론 매체를 통해서, 당신들은 사랑스러운 모습을 지닌 자들이 상품의 “모델”로 등장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광고는 당신들의 내적 욕망에 호소하여 보다 쉽게 수용될만한 가치에 대한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그러한 상품을 갖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적” 욕망(“리비도[libido]”를 기억하십니까?)을 타락시키고 의도적으로 재정의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아름다움, 섹스 어필, 건강, 젊음, 부, 지위 등과 같은 것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거짓된 “약속”을 건네는 광고 상품을 당신들이 갖고 싶어 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갈구해야 하는 아름다움, 섹스 어필, 건강, 젊음, 부, 지위 등과 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한된 표준은 멋져 “보이는” “모델들”을 통해서 대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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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한 “성형” 수술[“cosmetic” surgery](도살업[butchery])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할까 합니다. 당신들의 통계에 따르자면 많은 여성들이 “작은”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 덜 여성적이거나 덜 매력적인 것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냐하면 “통제된” 언론 매체에 의해, 보다 큰 가슴과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성들의 이미지가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거의 내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들 어린 소녀와 여자들은 만약 자신들이 보다 “큰” 가슴을 가진다면 남자들에게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여자들에게도 부러움을 살 것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종종, 한편으로는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상이라고 배워온(프로그램되어온) 모습에 자신이 들어맞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들은 의사가 당신들의 육체를 난도질하도록 내버려 두고, 이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은 물론이며, 종종 나중에 합병증을 앓게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체적 “외관”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만 하면 그만인 것입니까? 인류는 (적들은) 다시 한 번, 여성의 “가슴”을 육체적 욕망의 도구이자, 소름끼치는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켜, 그 순수성을 타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여성의 몸은 하나님의 완벽함 속에 아름답고도 우아하게 창조되었습니다만, 가슴, 음부, 입, 목, 다리, 엉덩이 등이 모두 육체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갈갈이” 난도질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신들은 왜 여성들에게 가슴이 주어진 것인지 압니까?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기도 한, 그녀의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양육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성들이여, 당신들이 자신의 가슴을 보다 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점을 잘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주어진 육체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이를 “매력적인” 모습으로 바꾸고 싶다고 바람으로써,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왜 이런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미지가 당신에게 억지로 주입된 것이며, 왜 또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은 결코 타인의 견해와 타인이 정해둔 이미지에 따라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성들이여, 여기 당신을 위한 시험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전신 거울 앞에 가서 자신의 나신을 바라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도 만지지 않고, 거들이나 패드가 들어간 브레지어도 하지 않고, 멋진 옷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과오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회합을 가지십시오. 부디 자기 자신을 용서하되,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꾸밈없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거울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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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당신들의 서구 문명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 소녀와 소년들이 영화에서 보았거나, “거리”에서 보았거나, 광고에서 본, 다른 누군가처럼 보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프로그램된 언론 매체와 광고를 통해, 자기 자신들이 각자 각자 하나님의 아름다운 개별적인 반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외관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여태껏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화장품이나 연계된 산업이 수십억 달러의 이윤을 내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러한 업계는 (적-그리스도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끝없이 소비자들의 허영심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결코 이러한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하기에” 자신들의 육체적 불완전함의 개선을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들의 사회 안에서 젊은 시절 “아름다운 자들”로 간주되던 많은 사람들도, “노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내팽개쳐지곤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젊은 시절 자신들의 뛰어난 “외모”에만 의지하여 살아가던 자들은, 노화의 기미가 발견되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자신들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인정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점차 외면받게 될 때, 내적으로 보다 공허해지고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어떤 방식의 긍정적 안내를 통해, 자신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주입되고 틀지워진 “한계”를 벗어나, 내적 아름다움과 영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우선 자녀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 하나님/아톤, 다른 사람들, 행성, 광물들, 식물들, 동물들, 다른 행성들, 모든 생명체들과 모든 창조물들, 이 모든 것들과 자기 자신이 하나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조각들이기도 한 세상 모든 창조물들에 대한 그 분의 사랑에 대해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창조 위에서, 그리고 창조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된, ‘자연의 균형의 법칙[the Natural Laws of Balance]’을 가르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한 자유 의지와 또 저마다의 개인적 책임의 특성에 대해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이는 각자 각자의 안에 계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오직 그 분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봉사하기 위함이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분은 공명정대하고 현명한 영적 창조자/통치자이자, 지혜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게 하고,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을 속여 왔는지도 가르치십시오. 아이들에게 분리로 여겨지는 것은 오직 분리의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시오. 자녀들이 만나게 될 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하나님의 “적”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있어, 아직 영적으로 깨닫지 못했을 뿐임을 알게 하십시오. 아이들에게 모든 다른 사람들도 결국 하나님 자신과 창조의 조각들인 만큼,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모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렇지만, 또한 명백하게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을 어기는 행동(무지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견해들, 오해들, 이에 따른 행동들)은 알아보게 하고, 이러한 행동을 관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만약 무지하거나 영적으로 나약한 자들이 아이들 또는 타인에게 (생각, 말, 행동을 통해) 해를 끼치려 한다면, 아이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존중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공동-창조하는 자신들의 권능에 대해 가르치고,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항상 돌이켜 보게 하십시오.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봉사 속에 신성한 세상을 창조해 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십시오. 그리하여 아이들이 항상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이고 사랑스러운 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이를 발전시키도록 하며, 또 이러한 면모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십시오.--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생득권[BIRTHRIGHT]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영적 하나됨, 내적 아름다움, 권능, 지혜, 사랑은 결코 나이를 먹지도, 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것이라는 진실을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영적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실제적인 것이며, 모든 창조물들의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영혼으로서, 기쁨과 사랑의 만개 속에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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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게 무엇이 당신에게 그러한 동기부여를 제공한 것인지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부러 아름다운 모습을 변경시키거나 숨기지 않는 한, 단정하고 깨끗하게 “옷을 입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키가 크든 작든, 빨간 머리를 가졌든 회색 머리를 가졌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경의를 표한다면, 당신은 사실상 하나님/아톤을 받아들이고 경의를 표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 모두도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아톤의 개별적인 반영들입니다. : “사람들의” 편견과 그들의 견해는 당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큰 그림” 속에서 당신의 물리적 육체는 사실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조각으로서, 물리적으로 현현된 당신의 육체는 이 아름다운 창조 속에서 경험을 겪어 나가기 위해 당신이 선택한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아톤의 아름다운 창조물들이며, 제각각 다른 모습을 가졌을 뿐입니다. 경이롭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역시, 창조 속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창조물들의 다양성을 즐깁니다. 당신들의 이 작은 행성 안에 왜 이렇게도 다양한 생명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각각 다른 꽃들, 각각 다른 무지개의 색상들, 각각 다른 기후와 계절들, 각각 다른 벌레들, 각각 다른 동물들, 사람들, 이 멋진 창조 속에서 당신들 또한 모든 창조물들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즐기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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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당신들은 당신들의 육체가 늙고 노화하게 되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적들은 당신들에게, 당신이 늙으면, 덜 인간적이고, 덜 매력적이며, 사회에도 공헌할 수 없게 되어 (종종) 배척될 것이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들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사탄에 의해 주입된)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 당신들의 신체 내부에 있는 “노화 시계”를 작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신들은 스스로 오직 100세 정도까지만 살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아주 어린 아이 시절부터 자신의 노화 과정을 진행시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당신들 곁에 있는 적들이, 삶의 고난, 오염 물질들, 당신들 행성 위의 각종 독성 물질들을 통해, 당신 스스로가 정말로 더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에, 당신의 육체는 노화 과정을 시작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활기차고 더 건강하겠습니까? 활기차고 건강한 자들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영혼에 대한 경의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육체도 역시 노화되지만, 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리화된 수명의 한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보다 위엄있고 품위 있게 나이가 들 것인데, 그 여부는 그들이 살아오면서 내적으로 인정하고 배양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비롭게 건네 온, ‘기쁨과 사랑에 대한 영적 순수성’의 정도에 달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실상 자신의 육체를 창조할 수 있고, 당신들의 계산상으로 거의 영구적으로도 살 수 있으며, 만약 당신이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이것이 진실임을 알기만 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플레이아데스 형제들은 당신들의 계산 상으로 육체를 가진 모습으로 약 1,000년 이상을 살아 갑니다.(‘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참조--역주) 당신들의 고대 문명들 가운데 아틀란티스와 뮤[MU](르뮤리아) 시대의, 당신들의 조상들 또한 지금의 계산 상으로 1,00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학생들이여, 당신들의 불멸의 영혼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물리적으로” 현현되는 육체를 가진 자들은 궁극적으로 노화를 겪게 되지만, 반드시 두려움 때문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며, 종종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 싫증이 났거나 지루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들은 노화를 창조해 내며,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하여, ‘창조[CREATION]’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보다 높은” 영역에서, 당신들의 형태는 보다 응축된 세포의 “빛”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 자신의 ‘내적 영혼[SPIRIT WITHIN]’과 하나이기에, 당신의 의지대로 이를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자의 눈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아톤의 “눈”을 통해 보게 될 때, 장엄하고 경이로운 다양성을 지닌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과 창조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적-그리스도 만이, 혹은 적들 만이 자신들의 암적이고 “거만한” 나르시즘 속에서, “추함”의 환상을 찾아 내고, 정의하며, 한계 짓습니다. 또한 이들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한 제한적 틀을 만들어 당신들에게 강요하며, 아버지/어머니 아톤[FATHER/MOTHER ATON]과 창조[THE CREATION]로부터 분리된 영역에 당신들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이러한 표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거짓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면, 적들은 이러한 일을 수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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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편견[PREJUEDICE]
우선 편견[prejudice](사전-판단[PRE-JUDGE])을 정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형성된 판단이나 견해; 특히 적대적이고, 비이성적인 의견. 2. 특정 단체, 인종, 종교 등에 대한 증오나 반감. 3. 다른 사람들의 성급하고 불공정한 판단에 따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 ......
말하자면, 편견을 가진 자들은 진실 또는 사실에 거의 또는 전혀 입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기 자신의 견해에만 기초하여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하톤은 피닉스 저널을 통해, 시온 의정서[THE PROTOCOLS OF ZION]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시오니즘[ZIONISM]의 배후에 있는 자들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한 “유태인[jew]”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나아가 이 용어 자체가 잘못된 명명이자 잘못 “만들어진” 단어라는 점에 대한 진실들을 누누이 밝혀 왔지만, 하톤과 피닉스 저널의 출판을 담당하는 자들은, 오늘날 당신들의 사회 속에서, 반-유태주의자들[ANTI-SEMITIC]로 불리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반-유태주의(반-셈족)[Anti-Semitic]라는 단어 또한 유대인들[Judean](유대 땅에 사는 자들을 의미--역주)이 아닌, 러시아의 노르딕 및 몽골 부족 출신들로, 자신들의 종교로 유대교[Judaism]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방어막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들의 반-유태(반-셈족)[ANTI-SEMITIC], 반-생명[ANTI-LIFE], 또는 적-그리스도적[ANTI-CHRIST] 방식들에 대한 혼동과 분열을 야기했던 자들로, 그 때 당시 하자르족[KHAZARS]이라 불리던 자들로부터 기원한 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습니다(‘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 앞선 피닉스 저널들에서 당신들이 배운 바대로, “셈족[SEMITE]”이라는 표현은 “노아[Noah]”라 불리던 자의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의 혈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셈(솀)[SEM(SHEM)]이었고, 그의 조상은 아담[ADAM]이었으며, 아담은 백인 종족의 선조로서, 하늘의 아들이자 수호 천사였던 셈야자[SEMJASA]와 “땅의(지구의)” 여인 사이에서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셈(솀)과 그의 후손들로부터 요셉[Joseph]이 나왔으며, 요셉은 임마누엘[Jmmanuel]의 지상의 아버지이자, 신성한 하나님[HOLY GOD]과 그 분의 천상의 아들들[HIS celestial SONS]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반-유태주의자(반-셈주의자)[ANTI-Semite]라고 부르는 것은 반-“유태”[anti-“jew”]나 다른 어떤 종족에 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상, 반-하나님주의[ANTI-GOD]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신성한 유대인들[Judeans]을 포함한 당신들은, 사탄의 악의 무리들[THE EVIL ONES of satan]에 의해 창조된 “여론-형성자들”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왔습니다. 이 악의 무리들은 오늘날 스스로를 시오니스트 유태인들[ZIONIST JEWS]이라 부르며, 당신들로 하여금, 시오니즘과 그 대표 기관들, 예를 들어 ADL이나 모사드,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국가에 대해 반대하고 그들의 악행을 대외적으로 폭로하는 자들이 마치 ‘반-유태주의자들[ANTI-SEMITES]’인 것처럼 믿도록 유도하고, 또 이러한 ‘반-유태주의자들’의 입을 막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 자들은 실로 교활하게 신성[GODNESS]을 파괴하고, 당신들의 세상을 통제하기를 바래 왔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그렇다면, 당신들도 보다시피, 만약 당신이 이 “여론 형성자들”의 거짓말을 고스란히 믿는다면, 당신 역시 편견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당신 자신의 무지로 인해 악의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당신을 기꺼이 따르던 자들까지도 파괴시켜 지옥으로 향하는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선한’ 의도들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 자신의 “선한” 의도가 진실과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하나님의 의도인지, 혹은 스스로의 죽음을 야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거짓 여론의 의도인지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악한 자들은 타인에 대한 비이성적 편견, 증오, 그리고 혐오감을 가진 채, 자신들만이 옳다는 아집에 빠져 있으며, 그러한 자신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으면 불관용과 고집불통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치명적인” 죄악으로 ‘자만심[PRIDE]’에 대해 설명할 때 논의했듯이, 악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파괴적인 시각과 조작되고 거짓된 관점들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조하도록 꾀어내지 못하게 될 때, 이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의 불관용과 고집 때문에, “선”과 “통합성”을 가진 자들을 없애고 파괴해 버리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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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이 글에서 “A”라고 부르게 될 친애하는 형제에게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A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그렇다면, 흑인들은 노예가 되기로 지원했다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희생자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발적인 지원자들만이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자여, 그렇습니다. 그들은 흑인으로 태어남으로써, 또는 백인들에 의한 노예 제도 속으로 내던져짐으로써, “희생자”의 역할을 맡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당신들이 앞에서 이미 읽었듯이, 이는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제 18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영혼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들은 자기 자신을 흑인이나 백인, 또는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아톤의 조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는, 지금 현재 당신이 어떠한 육체를 갖고 있든, 당신들의 무수한 전생의 경험들 속에서,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희생을 가하는 자가 되기도 해서, 각각의 역할을 맡아 해 왔습니다.(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왜 당신은 희생자의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까? 혹은 왜 희생을 가하는 자의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환상 속에 매몰되어, 무수한 삶을 반복해 가며, 끝없는 편견에 찬 행동들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 당신이 가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됨의 진실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했기에, 똑같은 교훈을 계속, 계속 되풀이하며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가졌던 “거짓된” 자만과 편견의 결과로 당신은 희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가졌던 “거짓된” 자만과 편견의 결과로 희생을 가하는 자의 역할을 맡는 것을 자원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이 같은 근원으로부터의 분리의 환상에 싫증이 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당신들이 그러하기를 희망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진실에 대한 무지 속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기에, 여전히 희생자 또는 희생을 가하는 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로부터 벗어나 무엇을 위해 지원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바로 사랑과 조화와 균형과 자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봉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진실을 제시하여, 당신들 각자 각자가 저마다 선택하도록 하는 이유는, 그 때 당신들이 어쩌면 “환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하나님/아톤의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집으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백인, 흑인, 또는 황인이기에, 혹은 남자 또는 여자이기에, 타인에 비해 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 또는 불교를 믿고 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자라고 느낀다면, 그 자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를 알아 보겠습니까? 당신이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당신이 어떤 성별을 가졌든, 당신이 어떤 종교를 믿든, 하나님 보시기에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명백한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들 모두 안에 존재하는 아버지/어머니 하나님과 창조의 영혼인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무슬림이라 부르든, 크리스챤이라 부르든, 혹은 무신론자라 부르든,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저마다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규정짓든 간에,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과 단일성[LOVE AND UNITY]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십니까? 당신은 앞에 제시된 자연의 균형의 법칙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은 계층, 피부색, 종교와 같은 카테고리에 따라 당신 스스로가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느껴, 스스로 분리된 감정을 느끼거나 분리를 추구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편견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은 앞서 제시된 법칙들을 “구시대적인” 것이라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 공공연히 이를 경시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균형을 위해 제시된 이러한 원칙들이 논리적인 사실들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거나” 이를 이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가 편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습니까? 학생들이여, 당신들도 보다시피, “이스라엘인[israeli]”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빛, 단일성, 사랑, 지혜, 진실, 균형, 조화 속에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Israel]은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성한 하나님과 창조의 균형과 하나됨이라는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를 뜻합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형제, A가 한 다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예수가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를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피닉스 저널(피닉스 저널 제 2권 참조--역주)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왜 밝은 피부색에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친애하는 자여, 무엇보다 외모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인해 혼란스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라고 불렸던 나, 사난다[Sananda]는 밝은 피부색을 가진 유대 땅의[Judean]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천상의 아들들의 후손인 라시엘[Rasiel]의 혈통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수호천사인 가브리엘[Bariel]이 마리아[Mary]를 통해 나를 낳았던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자여, 당신에게 제시되는 혼동스러운 이미지로부터 당신이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내가 명백한 모습을 지닌 채로 되돌아 왔을 때,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자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의 형제들이기도 한 당신은 나를 알아볼 것입니다! 반드시 내 모습을 통해서 나를 알아 본다기 보다는, 나의 존재, 나의 에너지, 그리고 나와 아버지 아톤과의 하나됨을 통해 나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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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이 책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 친애하는 학생들이자,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여. 이 저널은 하나님/아톤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분리, 어둠, 무지,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영혼의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아가 적-그리스도, 하나님에 반하는 것[Anti-God], 사탄, 적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분별할 수 있는 놀라운 도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바로 지금, 영원 속에 주어진 지금 이 순간, 앞서 제시된 법칙들을 현명하게 이해하고 따른다면, 만약 당신이 조화, 사랑, 권능, 지혜, 진실이자, 아버지 하나님/아톤의 의지이기도 한, 하나됨의 균형 속에 자기 자신을 잘 정렬시킨다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것이기도 한, 무한한 영혼의 공동-창조와 자유 속에 참여하고 또 이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난다, 주 마이클(미카엘), 성 저메인, 그리고 드루셔이며, 신성한 하나님/아톤에 의해 보내진 호스트들로, 빛과 진실에 따라 하나님과 당신들에 대한 봉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우주의 빛의 형제들/천사들[cosmic brothers/angels of LIGHT]과 함께 왔으며,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이자 영적 통치자[SPIRITUAL RULER]인 하나님/아톤의 뜻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모두는 오직 창조 속에 다같이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피닉스 저널 제 27권, “PHOENIX OPERATOR-OWNER MANUAL”, pp.77-124에서 발췌.
http://www.phoenixarchives.com
http://blog.daum.net/truthi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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