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저널, Phoenix Journals - 공자와 노자에 대하여..--공자와 노자에 대하여.. (2)
  • 공자와 노자에 대하여..

    역사는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는데, 한 사회 속에 침투해 그 사회를 망치는 자들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댓가로, 세계의 여러나라들은 실로 수십억 달러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바로 당신들이야말로, “다른 쪽 뺨을 갖다댐을 통해” 그리고 관용할 수 없는 일을 관용함을 통해, 범죄적 행위들을 북돋우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스승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옳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셈일까요?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로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는 ‘위대한 스승’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보다는, 당신들은, 파워-브로커들의 입맛에 맞게 스승들이 남긴 말씀들의 의도가 어쩌면 다소 왜곡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수천개의 감옥들을 유지하는데 비용을 대고 있으면서도, 수요를 다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게다가 진짜 범죄자들은 감옥 밖에 있으면서, 감옥 안에는 실제로는 범죄를 범하지 않은 자들을 가둬놓고 있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수천개의 정신병자 수용소, 경찰 병력, 재활 기관들 그리고 기타의 다른 기관들의 유지에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들이 인성을 갖추지 못한 질서파괴자들을 홀로 끝없는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도록 내쫓아 버려 왔다면, 그런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의 법률은 모순적이게도 범죄자들이 자신들이 뿌린 씨앗의 댓가를 받게 되기 보다는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발달해 왔습니다. 당신들은, 정치가들이 무슨 짓을 하든 마치 그것이 당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심지어 웃고 넘어가 버리기조차 하지만, 이 비열한 자들은 바로 당신들의 생존에 관한 것, 전부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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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는 묻습니다. “만약 내가 악행에 대해 선함을 베푼다면, 선행에 대해서는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가?”

    공자는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황금율’을 최초로 제시했었습니다 :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공자의 모든 가르침들은 초기 이집트인들의 행동 규범들을 너무나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당신 자신에게 호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은 옳은 행동이며, 당신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은 옳지 못한 행동임을 누누히 강조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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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특징들 가운데 한가지는, 임마누엘(예수)과 그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명상을 통해 우주로부터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을 가졌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종종 인간이 감각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지식은 영적인 지식으로서 이것은 우주 그 자체와의 직접적인 회합을 통해 인간에게 전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영적 지식은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했으며 이것은 일부러 찾아 나서야 되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 속에 머물며, 바깥으로 향해있는 감각들을 거두어 들여, 이를 안쪽으로 돌릴 때, 또는 내적 앎을 추구할 때, 모든 지식들은 그들에게 오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방식 속에, 그는 자기 자신이 찾고 발견했던 것처럼, 인간들이 고요함 속에서의 도(道,Tao)(God)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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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가 남긴 유일한 책은 도덕경이며 이것은 영어 및 다른 언어들로도 번역되어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이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귀한 책이, 노자가 자신의 종적을 감출 목적으로 만리장성을 지나가던 중, 마침 그 곳을 지키던 한 문지기의 부탁에 의해 씌여졌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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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은 이 책 속에서 제시하는 가르침들의 완전한 유사성에 흥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설명을 해가면서 당신들에게 이 책의 몇몇 부분들을 인용할 것입니다. 우선, 그 문지기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면, 노자가 자신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그 문을 통과하려하자,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 “선생님,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선생님의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글을 남겨 주실 수는 없으실런지요?” 그러자 노자는 몇일간 체류하며 이 불멸의 글들을 그 문지기에게 건네주었고, 그런 후 그는 문을 통과하여 북쪽의 산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로 다시는 그는 다른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노자는 한가지 사상에 대한 주장을 통하여, 동양사상의 영적 유산을 완전히 변화시켰으며, 당신이 그러한 그의 사상을 당신의 의식 속으로 불러들일 때, 그것은 마찬가지로 당신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릴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우주적 의식에 도달하는 것을 돕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남겼던 것입니다. 그는 이를 창조적 정적(靜寂)주의(Creative Quietism) 또는 도교적 정적주의(Taoist Quietism)라고 불렀습니다. 도(Tao)(God)는 절대적인 고요함으로서, 모든 권능과 창의적인 지식이 바로 이로부터 나온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와 하나가 되며, 궁극에 창조주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의도 속에, 절대적 고요함을 추구하며, 외딴 산간의 오두막에 살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그러한 원칙의 전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결코 은둔주의자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어느 누구라도 그의 문을 두드리는 자라면 반갑게 맞이하여 댓가를 받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가르침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의 회합 속에서 갖는 “고요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당신들에게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기 위해 고요함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이 필요한 이유는 그렇게 함을 통해 당신이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노자는 자신의 창조적 정적주의 원칙을 수행함을 통해, 우주와 창조의 과정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자신이 신성한 하나님이 되기를 요구했었던 것이 아니었냐구요?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 자신이었던 바’ 그 자체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노자’이자 ‘진실에 대한 교사’이길 바랬을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놀라운 스승은 그 어떤 순간이든,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갖게 되는 자신의 의식과 감각 사이를 차단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신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들의 시작이란 무엇이었던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성취함이란 무엇인가?

    그는 마치 다른 스승에게 질문이라도 하듯이 이러한 물음들을 의식 속에서 제기하였고, 그런 다음 자신의 ‘육체-앎’(body-awareness)의 상태를 분해시켜 도교적 정적주의의 상태, 즉 하나님-고요함(God-stillness)의 상태 속으로 이끌어 가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다렸고, 또 대답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노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스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그는 이 ‘우주적 의식’ 속에 도달하는 방법을 다른이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었던 반면, 다른 위대한 현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풀어서 설명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경우, 사람들에게 수천번에 걸친 설교를 통해, 그러한 의식에 이를 수 있는 심리적 상태 속에 자신들을 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까지는 말해줄 수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서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을 직접 말로서 설명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찰에서 자신의 삶을 보내거나 또는 길가에 나란히 앉아 명상에 잠겨 있곤 하지만, 실상 그 진정한 의미는 잘 모르는 채 행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의 힌두교 신자들은 불교주의가 갖는 의미를 정적 상태 그리고 모든 욕구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하는 반면, 일본의 불교도들은 창조적 정적주의라는 노자의 가르침 덕택으로, 명상이 갖는 힘에 대한 보다 심오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기에, 창조를 위한 바램들을 명상 상태 속에 채워넣을 수 있었고, 이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바로 이 한가지 아이디어만으로도,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여러차례에 걸쳐서,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바대로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힌두인들과 일본인들 간의 이 완전한 심리적, 육체적 습관의 차이는 바로 그들의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선 의식적인 바램을 갖고, 또 그런 연후에 하나의 커다한 정적상태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고자 하는 의식적 요구를 통해, 바로 이 창조적 정적주의의 아이디어를 당신이 갖는 명상 속에 더 많이 포섭해 들이면 들이게 될수록, 당신은 점점 더 우주적 스승의 발 아래 앉을 수 있게 될 것이고, 모든 지식과 모든 권능이 진실로 당신 속에 있다는 사실 역시 점점 더 깊이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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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관한 그 어떤 위대한 철학도, 이 중국의 현자가 도덕경에 남긴 것에 비견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깊게 살펴보면 유사한 것이 크리슈나의 가르침 속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스와미 프라브하바난다[Swami Prabhavananda]가 번역한 것 가운데 몇 가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앎이란 무엇인가? 알려져야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슈리 크리슈나[Sri Krishna]는 이 우주체(universal body)는 하나의 장(Field)으로서, 그 속에 아는자(KNOWER)에 의해 흩뿌려진 앎의 씨앗들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주 속에는 바로 이 아는자(KNOWER)와 장(FIELD)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 장(field)에 대한 또다른 이름이 바로 프라크리티(Prakriti)이기도 하며, 이는 힌두어로서 우주라는 뜻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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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olinio Germain 비올리니오 저메인


    피닉스 저널 제 35권, “The Sacred Spirit Within” ? MITAKUYE OYASIN (for all my relations-which is ALL), Pleiades Connection Vol. VI. 제 14, 15, 16장, pp. 185-210 중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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