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저널, Phoenix Journals - 제137,139권, 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II
  • 제137,139권, 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II


    제 12장, 1995년 5월 10일 수요일, 10:06 A.M. 8년 267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1 :

    [인용]
    섹션 II[Section II]

    메이슨(건축 석공)[Architectural Masonry]

    ......

    네스타 웹스터[Nesta Webster](1876-1960, 음모론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영국 여성 작가--역주)에 따르자면, 영국에 처음으로 메이슨들이 자리잡게 된 건, A.D. 926년, 유명한 요크 센터[York Center]가 생기면서부터였으며, 주로 컬데스[Culdees](?--저자)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기관을 통해 영국내 메이슨 활동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컬데스는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 킬위닝[Kilwinning], 멜로즈[Melrose], 에버딘[Aberdeen]에 있던 메이슨 학교[the Masonic Collegia]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존 야커[John Yarker]의 책, ‘불가사의한 학교들[The Arcane Schools]’에 따르자면). 중세시대 프랑스에 있던 메이슨(노동 석공)[working stone masons] 동업자 조합은 “꽁파뇨아쥬(동업조합)[Compagnonnages]”로 불렸으며, 독일에 있던 메이슨들의 조합은 “슈타인메첸(석공들)[Steinmetzen]”으로 불렸다. 프랑스 단체의 본부는 파리에 있었으며, 독일에서는 나중에 석공들 가운데서도 고딕 건축업자들[Gothic architectural builders]의 본부가 스트라스부르그에 생겼다.(이 단체는 1498년 막시밀리언 황제에 의해 마침내 승인되었다.)

    이와 같은 초창기 유럽내 메이슨들의 단체는 그 활동에 있어서 어떤 부패한 면모이나 불길한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날의 프리메이슨[Freemasonry]처럼, 그들도 친절하고 인간적인 면모 너머로, 어떤 정부 전복적 성격을 가진 비밀 움직임들을 가졌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적인 윤곽 속에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사변적이고, 철학적 성격의 메이슨들, 보다 나은 표현으로는 ‘프리메이슨[Freemasonry]’으로 알려진 자들이다. 어쩌면 당신이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15세기, 영국에서 헨리 6세[King Henry VI]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의회 법안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었던 건 바로 이 ‘프리메이슨들’이었다. 정확히 1세기 후,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은(우리가 이어서 곧 보게 되겠지만) 요크[York]에서 매년 열렸던 그랜드 롯지 모임[the Annual Grand Lodge meeting]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정보기관 개관[INTELLIGENCE SURVEY]

    영국 정보기관 약사 및 프리메이슨과의 상호 연계성

    여왕 폐하의 비밀 정보기관[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정보기관 그룹[Intelligence Circles]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연원은 400년도 넘게 거슬러 올라간 약 A.D. 1570년경에 이른다. 처음에는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프랜시스 웰싱햄 경[Sir Francis Walsingham](1532-1590)으로 그는 진취적인 영국 프리메이슨[English Freemason]이자, 당시 (튜더 왕조[the House of Tudor]) 엘리자베스 1세 여왕[Queen Elizabeth I] 휘하의 양대 국무장관[Joint Secretary of State] 중 한 사람이었다. 여왕의 스파이 업무 최고 책임자로서, 웰싱햄은 정교한 스파이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그 때 당시 꾸몄던 불행한 음모는 궁극적으로 (스튜어트 왕조[the House of Stuart])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을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고, 1587년 결국 그녀의 참수로 이어졌다. 메리 여왕은 그 무렵 카톨릭을 배후로 한 음모를 꾸며,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자기 자신이 영국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메리는, 진정 독사 같은 인물이자 야심차고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었으며, 동성연애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왕[King James VI]의 어머니였다. 제임스 6세는 로마와 공모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연대를 맺기도 했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처형이 있을 당시, 조용히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둘러싼 모든 음모와 간계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메리는 당시 영국 여왕을 둘러싸고 있던 메이슨들이 꾸민 영리한 장치[clever set-up]에 걸려 들었던 불행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제기 된다.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Allen Dulles]가 쓴 ‘정보기관의 술수[The Craft of Intelligence](1963년)’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의혹을 이내 확인해 볼 수 있다. 덜레스의 서술에 따르자면, 메리는 실로, 웰싱햄의 교활한 음모 가운데 하나에 “성공적으로 걸려 들었던” 것이다. “웰싱햄 덕택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영국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바빙턴[Babington]의 어리석고도 엉성한 음모는, 엉뚱한 결말을 맺게 되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메리의 처형을 명하는 문서에 서명할 구실만을 만들어 주었다.” 메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위치한 스타 체임버 법정[Star Chamber Court](15세기 후반부터 1641년까지 운영되었던 법원으로 일반 법원에서 다루기에는 부담이 되는 거물급 인사들의 재판을 담당--역주)에 기소되었으며, “엘리자베스의 암살 음모를 입증하는, 웰싱햄의 손으로 쓴, 많은 편지 카피본들이 주된 증거가 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 악명 높았던 스타 체임버는, 헨리 7세가 봉건시대 군주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설립했던 법정으로, 그 이전에는 유태인들과 관련된 각종 권리 증서나 “문서들[starres]”(starr는 헤브루어로 ‘document’를 의미--역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소로 쓰인 곳이었다. 스타 체임버는 튜더 왕조시대 형사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배심원들의 결정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하톤: 당신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들 모두가 이 이야기를 헐리우드 영화에 나온 것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까 합니다. 그렇지만, 헐리우드[Hollywood]가 얼마나 영리하게 잘못된 정보들을 유효한 사실들로 포장해서 당신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에 대해 늘 주의하기 바랍니다!]

    웰싱햄과 함께 영국 정보기관을 세운 또 한 명의 공동 창립자는 윌리엄 세실(버레이 경) 1대 남작[William Cecil(Lord Burleigh), 1st Baron](1520-1598)으로, 그는 28세에 이미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거머쥐었던 인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최고 참모[chief adviser]가 되어, 이후 약 40년 동안 그녀를 보좌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재임시절(1542-1567)에는 로마 카톨릭을 따랐었다. 그러나 이후 1570년,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정책의 교활한 기안자이자 주의깊은 지휘자가 되었으며, 메리 여왕에 대한 직접적인 음모를 꾸미기 위해 스파이 조직을 구성했으며, 심지어 훗날 그녀가 처형되기 전부터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실질적인 책임자로 간주되었다. 당신들도 기억하겠지만, 영국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1536-1608, 영국 시인, 정치가--역주)은, 메리가 잔인하게 참수되기 직전에, 그녀의 사형을 발표하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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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톤: 여러 사건들을 둘러싼 오래된 동맹 단체들간의 훼방과 “연합[connection]”이 있어 왔으며, 바로 이들 오래된 동맹 단체들로부터 ‘신 세계’에 대한 통치권[the throne], 곧 ‘디 오더[the Order]’(신 세계 질서)를 지향하는 커넥션들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신 세계 질서[a New World Order]’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실제로 ‘신 세계 질서[New World ORDER]’(신 세계의 질서[ORDER of the New World]--U.N. 빌딩을 본부로 하여 “뉴욕”에 여러 건물들에 두고 있는 신 세계 질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요크 오더[the YORK ORDER]에 따르자면, 이건 ‘뉴 월드 오더’ 또는 ‘뉴-요크 오더[The New World or New York ORDER]’겠지만, 다른 예를 들자면, 이건 ‘장미 십자가회의 오더[ORDER of the Rosie Cross]’ 또는 ‘템플 기사단의 오더[ORDER of the Knights Templar]’, 기타 여러 단체들의 ‘오더’도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들은, “정부”의 활동이 다양한 기관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브루킹스 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e](여타 싱크 탱크나 연구 기관들)는 영국 여왕의 정보기관인 MI-6의 활동을 숨겨주는 기관으로, 각종 마인드 컨트롤 프로젝트나 컬트 단체들(교회나 사이비 집단들)의 활동에 대한 위장막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 및 철학 대학[the University of Science and Philosophy]’과 같은 단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및 철학 대학’은 영국 “러셀[Russell]” 가문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기관이자, 라오[Lao]와 관련된 왕실 계보와도 연계되어 있습니다(빛, 물질 등을 연구한 월터 러셀[Walter Russell]은 자신의 두번째 부인인 라오를 만난 이후 몰락. 러셀에 대해서는 ‘빛에 대하여’, ‘물질의 구성’ 참조--역주). 라오의 가계는 영국 왕립 블루 북[the Royal Blue Book](런던내 주소별 인명사전--역주)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다양한 기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다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반-중상 동맹(ADL)[Anti-Defamation League](이 역시 영국 정보기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브나이 브릿츠[B’nai B’rith](유태인 문화교류 촉진협회--역주)는 특히 주목할만한 기관에 해당합니다.)과 함께, 런던 타비스톡 연구소[the Tavistock Institute of London]와 영국 정보기관의 미국내 주요 지부 역할을 하는 기관들입니다.(브루킹스 연구소가 미국내 본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지금 우리가 전하는 이 신성한/그리스도적인 진실[Godly/Christly truth]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반대 여론과 반대 움직임을 조성할만한 기관들인 것입니다. 이제 다음을 상기해 보도록 합시다. : 당신은 이러한 조직들의 통제 하에서, 현재 진행 중인 ‘오더[ORDER]’에 당신들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를 알게 되면, 그리고 당신들이 얼마나 손쉽게 “눈가림[hoodwinked]”(이것은 유효한 메이슨들의 용어[a valid Masonic term]입니다.)을 당할 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당신들이 완전히 속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될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진실(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폭로--역주)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높은 빛의 진실[Highest Lighted Truth]’에 입각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당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누가 한 일인지에 대해 널리 알려준다면 당신은 대단히 기쁘지 않겠습니까? 흥미로운 일이지요! 부디 우리가 “공격 모드[bashing mode]”에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단지 문서화된 자료들과 공공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다시 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웰싱햄이 주도했던 메이슨주의에 기반한 영국 스파이 기구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신규 요원 채용과 관련하여,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위원이자 전 OSS의 관리였던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를 졸업한 가장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주 대상이었으며, 웰싱햄은 이들을 다시 프랑스로 유학 보냈는데, 프랑스 법원을 비롯한 주요 기관에 침투시켜 프랑스의 대영 전략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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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양 대학교는 여전히 영국 정보기관 인력 충원에 활용되고 있으며, 꼭 마찬가지로 CIA는 주요 인력을 하버드와 예일(이 대학들은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에서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책에서 영국 상류 계급과 정보 기관 활동을 높이 찬양하는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서도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알렌 덜레스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웰싱햄의 지휘 아래에서, 영국 국무장관이 국내 및 국외의 많은 서신들을 중간에서 가로 채, 열어 보고, 읽어 보고, 다시 봉해서 원래 발송지로 재송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 되었다. 이에 따라 비밀 서신은 코드나 암호로 쓰여져야 했고, 웰싱햄은 이 업무에 관한 전문가, 예를 들면, 토마스 펠리페스[Thomas Phelippes]와 같은 인물을 고용하기도 했는데, 그는 암호문 서기이자, 암호문 분석가의 역할을 했다. : 말하자면, 그는 비밀 코드를 개발하여, 웰싱햄이 가로챈 메시지 안에 집어 넣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대, 웰싱햄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전문 정보기관 서비스’를 만들어 냈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France’s Cardinal Richelieu]라는 라이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가 되기까지 이들만큼의 스파이 전문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톤: 기억하십시오. 덜레스는 찬탈자들[THE USURPERS] 가운데 한 명입니다. ; 우리가 앞에 썼던 저널들을 다시 읽어보고, 덜레스와 관련된 다른 책들도 검토하여, 이 인물에 관한 당신들의 기억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웰싱햄의 가장 큰 업적은 해군 정보 수집으로, 그가 제공한 정보는, 필립 2세 왕[King Philip II]이 이끄는 스페인 무적 함대[Spanish Armada]에 영국이 맞서는 데 있어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스페인과 싸우는 와중에, 웰싱햄은 카톨릭에 의해 통제되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Amsterdam]에서는 유태 랍비들과 여타 동족 유태인들이 이미 모든 권력층에서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그 때 이미, 지난 시절의 “불공정”에 대해 영국에 복수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임마누엘 레볼드[Immanuel Rebold]의 가장 흥미로운 책인 ‘프리메이슨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Freemasonry]’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와 있는데, 바빙턴 사건[Babington affair]이 발생하기 몇 년 전이었던 1561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리메이슨들이 그녀의 부군에게 종신 그랜드 마스터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데 분개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메이슨 단체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은 메이슨들이 준-연례 모임[semi-annual meeting]를 가진 날이기도 했다. 여왕은 자신의 칙령 수행을 위해 무장한 부대도 파견했다. 그러나, 여왕의 명을 받았던 부대 사령관이 이 모임이 정치적으로 무해한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보고하자, 여왕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의 왕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보호자[protectress]가 되었으며, 프리메이슨들이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을 그랜드 마스터로 선택한 것도 추인해 주었다.” 색빌은 자신이 얻게 된 이 새로운 지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귀족들 간에 있어서는 벅허스트 남작[Baron Buckhurst]으로 추대되었으며, 나중에는 제 1대 도르셋 백작[1st Earl of Dorset]이 되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조직은 항상 상명하달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대개 대단히 부유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사회내 노동자 계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몇 년 후인 1578년, 프란시스 베이컨 경[Lord Francis Bacon](1561-1626, 영국 철학자, 정치가--역주)은 아직 십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파울렛 대사[Ambassador Paulet] 수행원의 일원으로 템플 기사단 단원[a Knights Templar]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밀 단체에의 가입이 정확히 어떤 절차를 거치는 것인지 궁금해 했으며, 또한 이 단체는 사실상 동성애에 기반한 의식도 갖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가입 초기 단계에 그런 류의 통과 의례를 거치는지도 궁금해 했다. 어떻든 간에, 베이컨은 캠브리지에서의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인해 영국 정보기관의 일원으로도 활동 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평균적인 수준의 메이슨이기도 했다. 오컬티스트 맨리 팔머 홀[Manley Palmer Hall]이 쓴 ‘메이슨 형제단[Masonic Orders of Fraternity]’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게마트리아[gematric](전통 유태 방식에 따라 단어나 문자에 숫자를 할당하는 시스템--역주) 숫자 등치 방식에 따르면 b,a,c,o,n이라는 문자는 메이슨적인 의미로는 숫자 33을 가리킨다.--이는 고대 의식과 전래된 스코틀랜드 의식에 따른 ‘단계’를 가리킨다. 문자 A.U.M.은 아르티펙스 유니베르수스 문디(세계의 위대한 건축가)[Artifex Universus Mundi(The Great Architect of the World)]라는 말로 간주되며, 같은 방식의 숫자적 독해에 따르면 역시 총합이 33이 된다. 따라서 A.U.M.은 ‘베이컨[Bacon]’에 해당하는 카발라[cabala](유대 신비교의--역주)인 것이다.” 그렇지만, 홀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33단계 프리메이슨들은 이 “위대한 건축가”--즉 루시퍼[LUCIFER]--를 숭배한다는 점이다!

    A.D. 1600년, 웰싱햄 사후 10년이 되는 해이자, 세실 경이 죽은 지 2년지 지났을 무렵, 그들의 비밀 승계자들은, 시티 오브 런던에서 소그룹으로 활동하던 부유한 마라노 유태인(신분을 숨긴 유태인들--역주) 상인들[Marrano Jewish Merchants]과 조용한 연대 관계를 맺었으며, 이들은 노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긴급히 무역 독점권[trading charter]을 자신들에게 허가해 줄 것을 강요했다. 무역 독점권이 부여되고 난 후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였다. 정보기관 요원들과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 작전의 성공에 크게 흥분했다. 한편, 초기 형성 과정을 거쳐 발전해 나가던 영국 정보 기관은 이제, 이전부터 해오던 모든 작전들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왕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은 인도를 시작으로, 많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 카르텔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그들의 지도자에게 이득이 되는 전쟁도 조장했다. 또한 대단히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던 마약 거래의 토대도 형성했다. 2년 후, 암스텔담에서 네덜란드 정부를 좌지우지해 오던 사립의 유태계 은행가들은, 엄청난 이윤의 낌새를 눈치채고, 영국의 전철을 밟아,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했다. 이들은 재빠르게 자신들만의 마약 거래 사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비극’을 다루는 추악한 일이었지만, 또 하나의 높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에 곧 착수했다.--흑인 노예 무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 특별한 유태계 무역상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으로부터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가 ‘신 세계(대륙)’에 처음으로 공급했다. 이들은 1619년, 마치 여느 가축들을 다루듯,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Virginia]에다 흑인 노예들을 하역했다. 그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국의 엘리트들에게도 유사한 인간 화물들을 공급했는데, 다수의 노예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배에 나눠 실린 채, 사나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냄새나는 갑판 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고통 속에 죽어 갔다. 이들 비정한 유태계 노예 상인들은 값싼 장신구, 구슬, 거울, 색유리 등을 오늘날의 나이지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물물교환의 대가로 건넸으며, 이 곳 원주민들은 아프리카 내륙 지방을 약탈하여, 다른 흑인 부족들을 포획하고 노예로 사로잡았다. 반드시 주목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협조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노예 거래를 했던 이들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현대 역사에서 볼 때는, 사실상 두번째였으며, 처음 노예 거래를 시작했던 건,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졌던 포르투갈 유태인들로, 이들은 약 1세기 전에(1503년) 검은 대륙에서 불행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았었다.(이보다 앞선 시기의 노예 거래는 주로 로마 제국에 의해 행해졌다.)
    pp.9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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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장, 1995년 5월 10일 수요일, 1:09 P.M. 8년 26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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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2 :

    [인용]
    정식으로 지정된 롯지들[Lodges]과
    (신성하지 못한) 킹 제임스[King James] 성경의 탄생

    그러는 동안,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마자,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37세된 아들은 영국 국왕이 되었다. 맨리 팔머 홀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한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또한) 메이슨주의[Masonry]에 호의적이었으며, 정식으로 지정된 롯지에서 메이슨이 되는 과정을 거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대영제국의 제임스 1세가 되었을 때, 그는 메이슨주의를 장려했다. 그를 승계한 찰스 1세[Charles I] 역시 메이슨으로 받아들여진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프리메이슨과 영국 정보기관은, 정보기관 태생 시기부터, 명백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프리메이슨은 최소한 16세기 중반 이래, 영국 왕실과 영국 귀족 사회에 의해 보호되는[royally protected] 단체였다. 이처럼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제임스 1세나 찰스 1세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보기관을 광범위하게 활용했으며, 요원들은 주로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었다.--특히 프랑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불행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주 격렬하게 반-카톨릭적 태도를 취했으며, 대관식이 있은 지 1년 후 영국내 모든 예수회를 금지시켰다. 이후 1606년에는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카톨릭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대단히 엄격한 법률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그는 햄프턴 궁정 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를 열었으며, 이를 계기로 1611년 아름다운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of the Holy Bible]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성경을 만든 데에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 그는 이 새롭게 공인된 영어 번역 판본이 1525년에 만들어진 틴달 성경[the Tyndale Bible of 1525]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부인할 것을 명령했다.[하톤: 아직도 이러한 성경들에 조작과 변경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틴달 성경은 10년도 넘는 기간동안 윌리엄 틴달[William Tyndale](틴달은 위압적인 주교들과 왕세자들의 뜻에 반해서 작업했으며, 그들은 틴달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이 번역했던 훨씬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성경이었다. 틴달 성경은 고대 그리스어 판본으로부터 직접 번역했던 것으로, 당시 존재하던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다. 킹 제임스 성경은 앞선 판본에 나와 있던 진실을 효과적으로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버렸으며, 예수를 유태인으로 바꿔놓은 데다가[turned Jesus into a Jew],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참된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을 일종의 휴머니즘적인 독트린으로 변경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이기도 했던 훨씬 초기의, 훨씬 정확했던 아람어[Aramaic language] 판본과 비교해 보자면, 엄청나게 많은 변경과 엄청나게 많은 오류들이 생겨났다.[하톤: 당신들이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킹 제임스 판본은 또한, “이사[Isa]”와 “이수[Esu]”에서 유래된 잘못된 명칭(이름)인 “예수[Jesus]”를 보다 확고히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Paul](다소의 사울[Saul of Tarus])이 복음서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진실을 조작한 내용들을 전파하고 다니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지적하는 “이 문제”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에 대해 아주 놀라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당신들 가운데 여인들이 나서서 “그냥 사도 바울이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것, 그대로 읽으세요”라고 크게 고함치면, 아마 당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도 같군요!]

    제임스 왕의 사치와 전제 정치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소위 말하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은 궁극적으로 청교도 혁명[the Puritan Revolution]을 야기했다. 그의 통치 시기, 철저히 부패했던 영국 국교회는, 국민들에게 ‘복지’를 강제하고 국가 종교를 강요하던 교회이자, 봉건 정부의 폭정 은폐를 위해 매수된 영국 정치인들에 부합하여 운영되던 조직으로, 최초 설립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1607년, 북아메리카에 숙명적인 영국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1620년, 참된 기독교 이주자들이 영국 플리머스[Plymouth, England]를 떠나 메이플라워호[the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메사츄세츠 케이프 코드[Cape Cod, Massachusetts]에 뉴 플리머스[New Plymouth]를 설립했던 시기는, 제임스 왕의 통치 시기였다. 이 두 번째 사건은, 여로보암[Jeroboam] 왕이 기존 체제에 반대한 유사한 형태의 그룹이었던, 10개 부족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재정착하여 이스라엘을 세운 지, 정확히 2520년(다니엘서에 나오는 ‘타임, 타임즈, 그리고 하프 타임[a time, times and a half time of Daniel]’)(두 때와 절반으로 2,500년을 의미--역주)이 지난 후에 발생했다.--말하자면 사무엘서 하[II Samuel] 7장 10절의 내용이 두 번째로 완수된 셈이었으며,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계 바이킹들의 (스칸디나비아) 이주였다! (‘유태인들의 계보’ 참조--역주)

    [하톤: 자, 훌륭한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더 이상 가서 정착할만한 또 다른 “아메리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면, 꽁꽁 언 “극지방”에 가서 정착하겠습니까? 실로 세상이 너무 작아져서, “더 이상은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무언가를 숨기기에 최고의 장소는 바로 코 앞[RIGHT OUT FRONT]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 1세 시대, 그의 후원 아래에 있던 그랜드 마스터는 런던의 저명한 건축가 이니고 존스[Inigo Jones]였으며, 그는 그리니치[Greenwich]에 있는 여왕의 저택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했다. 후대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1685-1702)은 이 지역내 한 지점을 동과 서를 가르는 “영”점[“0” point]으로 선정했으며, 나중에 바로 이 곳에 왕립 천문대가 들어섰다. : 지리학적 경선은 그리니치 공원 안에 있는 이 지점을 통과하는 선을 여전히 기준 경선으로 삼는다.

    이주자들이 영국을 떠나간 지 1년 후, 제임스 왕은 템플 기사단원이자 프리메이슨인 프란시스 베이컨 경을 자신의 최고 참모[his Lord Chancellor]로 지명했다. ; 그러나 곧이어 베이컨은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에 따른 결과로, 그는 더 이상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부득이 은퇴를 맞이하게 된 베이컨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여러 권의 조예 깊은 수필집과 오컬트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의 저서들을 쓰면서 보냈다. 한편, 바로 그 해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the Dutch West Indies Company]가 설립된 해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중요한 일이 있는데, 1630년 6월 12일은, 부유한 영국 법조인, 존 윈트롭[John Winthrop]이 지휘했던 아르벨라호[the Arbella]가 영국을 떠나 (메사츄세츠) 살렘[Salem]시에 도착했던 날로, 바로 이 때부터 미국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시작되었다. 윈트롭은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서 교육받았으며, 런던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찰스 1세 왕[King Charles I]으로부터 동부 메사츄세츠 지역의 할양과 이 지역 정착에 대한 특권[Charter]을 부여받았으며, 그가 이끄는 그룹이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부터, 그는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주지사로 이미 선정되어 있었다. 초기 이주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이들 정착자들은 모든 것이 다 마련된 상태로 도착했으며, 이미 고등 교육을 이수한 인물들이었던 데다, 영국 상류계층과도 계속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캠브리지 사람들[The Cambridge Crowd]”이라 불렸던 이들은 엄청난 양의 서적들도 함께 가지고 갔으며, 캠브리지 대학의 일종의 연장으로서,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를 설립했다. 하버드는 그 설립 첫 날부터 자유주의자들[Liberals]의 양성소 역할을 했으며, 그 졸업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명 높은 미국 동부의 여러 기관들을 세웠으며, 바로 그들로부터 미국의 보이지 않는 정부[the Invisible Government]가 생겨났던 것이다.

    버지니아[Virginia]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1624년, 제임스 1세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바로 그 해, 능수능란한 술수를 가졌던 카톨릭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아르망 장 뒤 플레시[Armand Jean du Plessis])는 소년 왕 루이 13세[the boy King Louis XIII]가 이끌던 프랑스의 최고 수상[Chief Minister]이 되었다. 리슐리외는 이내,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영국 비밀 정보 기관 소속 스파이들의 계속되는 정탐활동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 라이벌이 될만한 프랑스 정보 기관 설립에 착수했다. 이듬 해, 제임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계 스튜어트 가문의 프리메이슨으로서, 영국 왕좌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무렵, 암스텔담에 있던 부유한 유태인들은 마침내 다가오는 영국 전복을 위한 이상적인 꼭두각시이자,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 줄 인물을 발견했다.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로, 그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26세의 청년이자 영국 상류 사회에서 선호되는 유복한 가문 출신의 젊은이였지만,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후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3년 후, 상당한 배후 작전과 재정적 지원 아래, 크롬웰은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은 바로, 그렇잖아도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찰스 왕은 당시 대단히 역동적이었던 제 1대 버킹검 공작, 조지 빌리어스 수상[Prime Minister 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의 손아래 움직이는 완전한 도구 역할만을 하고 있었는데, 1629년 수상의 많은 호전적인 계획들에 의회가 순응하지 않자, 수상은 왕에게 의회 해산과 함께 독자적인 왕권에 의한 국정 운영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빌리어스는 너무나도 분명히 영국 정보기관 최고위급 관리이기도 했으며, 한 번은 스페인 대사와 함께 독일 팔츠[the German Palatinate] 지방을 스페인이 점령하는 일을 돕는 계략을 꾸며, 맨스펠드 백작[Count Mansfeld]이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별 실익을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빌리어스가 고안했던 이런 저런 별로 인기 없었던 모험주의적인 시도들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그가 함께 일하기를 선호했던 인물은 에드워드 세실 경[Sir Edward Cecil]으로, 세실은 영국 정보기관 탄생 초기 공동 창립자였던 버레이 경[Lord Burleigh](윌리엄 세실)의 가까운 인척이었다. 독일 팔츠 개입이 대실패로 끝난 3년 뒤, 빌리어스는 하원에 의해 해고되었으며, 이후 암살되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기다리며, 이러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가지 코치를 받고, 손질 중에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한편, 영국 역사학자이자 장군이었던 A.H.M 람세이[A.H.M. Ramsay]가 쓴 ‘이름없는 전쟁[The Nameless War]’에서 이미 보았듯이, 유태인들이 조장했던 1640년의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람세이가 “칼뱅의 음모[a Cohenist Conspiracy]”라 부르는 일이 갑자기 발생했는데, 이는 1평방 마일의 구시가, 시티 오브 런던을 중심으로, 중무장한 건달들 또는 “작전 수행원들”의 집단이,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고 겁에 질리게 만든 일이었다. 유태인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이 악당들의 수는 “만 명에 육박했다.” 1640년부터 1660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영국 왕실과 국교회를 비난하고,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팜플렛과 전단지 “약 3만장”을 뿌렸는데, 모두 암스텔담과 제네바에서 인쇄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영국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혁명의 불꽃에 부채질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영국 정보기관이 이러한 국가 전복 시도의 싹을 자르기 위해 움직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크롬웰과 크롬웰을 돕는 유태인 후원자들 편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불행한 장 칼뱅(존 캘빈)[John Calvin(Chavin/Cohen)]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국가 전복적 성격의 이러한 과도한 비난은 프랑스 유태인이자 “개혁자[reformer]”였던 장 칼뱅[John Chavin]의 광신적인 장광설의 결과였다. 그는 1533년 국가 전복 시도를 이유로 파리에서 추방되었으며, 스위스 바젤로 피난했던 인물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불화를 야기하는 책을 썼으며, 소위 말하는 기독교 칼뱅 운동(칼뱅주의)[Christian Calvinist Movement]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그 때부터 ‘장 칼뱅’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영국은 기독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카톨릭이 훨씬 더 많이 수용되었다.)으로 양분되었다. 칼뱅은 “엄청난 수의 혁명적 웅변가들을 만들어 냈으며,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해를 끼쳤다. 말하자면, 종교적 열정이라는 구실 아래, 혁명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영국은 두 개의 반대되는 캠프로 분열되었으며, 유태인들은 후에 아일랜드로 옮겨 가서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

    그러한 영리한 분열의 도구 가운데 하나는 “사바스(안식일)[Sabbath]”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그의 비명과도 같은 주장이었으며, 이에 따른 결과로서 1650년, 왕(찰스 1세)이 처형되고 난 후,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가혹한 형벌에 처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무렵 영국 상원은 “헤브루 랍비들의 기관”처럼 변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람세이 장군[Capt. Ramsay]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의 음모를 추구했던 거리 혁명가들은 “수평파[Levellers]”(찰스 1세 시대 의회파로 구성된 당파원--역주) 또는 “합리주의자들[Rationalists]”로 불렸는데, 이들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럼프” 국회[“Rump” Parliament](직역하면 “잔여 국회”가 되며,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데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난 뒤 구성된 의회로,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의회 기능을 상실하고 ‘남겨진 의회’를 가리키는 표현--역주)를 구성한 자들이기도 했다. [하톤: 나는 당신들 “애국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 만약 국회를 재구성하는 것이 이렇게도 쉽다면, 왜 당신들은 당신들의 국회를--현재 의원들의 구성 틀 바깥에서--쉽사리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들이 항상 내게 “우리는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 데 상당히 지쳤습니다. 한 무리의 외부인들에 불과한 지크들(유태인들)[Zhiks]이 영국에서 이 일을 해냈다면, 분명코 당신들도 당신들의 합법적인 국회를 다시 구성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현재 보유한 법률/재판 시스템은 “전시”에는 완전히 군법에 따라 작동하는 것입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642년, 영국 전역을 휩쓰는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크롬웰은 의회를 이끄는 핵심 세력이 되어 있었고, 그 의회는 이미 2년 전부터 재구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찰스 왕의 지지자들이었던 소위 말하는 왕당파들[Royalists] 또는 기사파들[Cavaliers]과 왕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의회파들[Paliamentarians]”, 또는 라운드헤드들[Roundheads](짧게 자른 머리에서 유래한 명칭--저자주)간에는 유혈이 낭자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크롬웰은 물론 의회파를 지휘했으며, 심지어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에서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일도 도맡았다. 그리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무엇보다도 그는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최고의 유태인 군사 전략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톤: 물론,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미국 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유태인들[the Jews in England]”(런던에서 간행)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1643년, 한 무리의 유태인 집단이 영국으로 들어 왔는데, 마라노[Marrano](비밀 유태인)였던 포르투갈 대사 데소사[De Souza]가 그 중계 역할을 했다. 그들 가운데 유명한 자로는 페르난데스 카라할[Fernandez Crajal]이 있었는데, 그는 잘 알려진 금융업자이자 군사 청부업자였다.” 실제로 카라할은 크롬웰의 ‘신모범군[New Model Army]’ 구성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 때, 그리고 그 이후로 크롬웰 주변에 있던 다른 유태인들은, 주로 그의 핵심 참모 역할과 자금 흐름 관리 역할을 맡아 했으며, 그 중에는 암스텔담 출신의 유태인들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랍비 메나샤 벤 이스라엘[Rabbi Menassah ben Israel]도 있었다. 랍비 벤 이스라엘은 영리한 선전물 책자인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이스라엘의 경험)[Esperanza de Israel(Experiences of Israel)]’의 저자였는데, 이 책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결국 “그가 유태인들의 영국 입국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 무렵 크롬웰을 도왔던 또 다른 인물 가운데는 존 툴로[John Thurloe]가 있었는데, 그는 정보 총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앨런 델레스[Allen Dulles]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바에 따르자면, 툴로는 자신이 거느리는 많은 스파이들로부터 비밀 정보를 캐내는 데에만 한 해에 7만 파운드도 넘게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기능은 “정보국[Department of Intelligence]”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기관은 영국 정부의 여러 기관들 가운데 가장 초창기부터 그 공식 기능이 할당된 기관이 되었다. 툴로는 몇 년 뒤 크롬웰이 호국경[Lord Protector](호국경은 영국에서 왕권이 미약할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으나 크롬웰은 왕정 폐지 후 자신이 호국경이 되면서 왕의 역할을 대신함--역주)으로 있는 코먼웰스[Commonwealth](처음에는 크롬웰 정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나중에 ‘조직화된 정치 공동체’ 및 ‘영연방’으로 의미가 확대--역주) 아래에서 국무상[Secretary of State]이 되었다.

    [하톤: 결국 국민들이 정부와 관련해서 뭐라도 하나 알아 내려면, 당신들은 차라리 다른 행성으로 가서 새로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이는 은밀한 “작업”도 가능합니다.--이것이 정확히 당신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입니다. 현재의 정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자국 국민들에게 감추는 일을 주로 하는 “정보” 기관에 의해 구성되고, 또 운영되고 있습니다. 실로 나는 우리를 구성하는 팀과 관련하여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그렇지만 우리는 오직 진실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려는 역사학자들과 다른 많은 저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당신들은 우리를 CIA나 ONI, 기타 여러 가지 정보기관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실상 진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인가요?]

    1645년 한 해 동안 전장에서의 두 번의 결정적인 패배 이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항복했다.--이들은 이내 그를 크롬웰이 이끄는 적들에게 넘겼다. [하톤: 그렇지만 이 악당들 사이에서는 왕에 대한 어떠한 예우도 충성심도 없었습니다.] 람세이 장군이 밝힌 바에 따르면, 1647년 6월 16일, 올리버 크롬웰은 뮐하임[Mulheim]시나고그에 소속된 에베네저 프라트[Ebenezer Pratt]를 통해 암스텔담의 유태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공모하여, 찰스 1세를 암살할 것인지, 아니면 덫에 빠뜨려 죽일 것인지에 관한 음모를 꾸미는 일에 착수했다. 람세이에 따르면, 왕에게 씌워진 죄명은 완전한 거짓이었지만, 이는 이삭 도리스라우스[Isaac Dorislaus]라는 외국의 유태인에 의해 고안된 혐의로, 이에 따라 결국 왕은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계획대로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그 때 이후로, 올리버 크롬웰 장군이 지휘하는 신모범군[the New Model Army]은 의회보다도 더 큰 권력을 휘두르며,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또한 크롬웰은 유태계 병력이었던 “철기군(철갑 기병대, 아이런사이드)[Ironsides]”도 함께 지휘하며, 영국 전역에 걸친 사실상의 군사 독재를 감행했다. 그 때부터 유태 사회주의[Jewish Socialism]가 영국 땅에 전파되었다.

    1653년 7월 4일[하톤: 으으으으음?], 올리버 크롬웰은 새로운 “국가 회의[council of state]”(행정부의 기능을 담당--역주)를 설립하고, 140명의 국회의원들을 새로 지명했다. 이 국회는 이후 베어본스 국회[Barebone’s parliament]라고 불렸는데, 완전히 유태인들에 의해 점령된 국회였다. 크롬웰의 최고위 섭정직[the top of Cromwell’s Protectorate]은 존 툴로[John Thurloe]가 맡았으며, 당시 그는 국회의원 신분이기도 했다. 툴로는 심지어 정보기관장의 역할과 체신국장의 역할도 동시에 맡아 하면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보스에게 주변의 다른 강대국들의 비밀 계획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었다. 툴로는 또한 크롬웰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 받기를 권유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크롬웰이야말로 외국의 적들을 등에 업고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실상의 반역자였다. 2년 뒤, 이 세상 어디에 있는 유태인들이건 간에, 모든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영국 입국이 크롬웰에 의해 마침내 허용되었다. (이것은 크롬웰이 애당초 유태인들과 범죄적 결탁을 맺었을 때부터, 유태인 후원자들과 체결한 비밀 협정의 일부였다.)

    1658년, 마침내 크롬웰이 서거하자,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가 호국경의 지위를 물려 받고, 일탈한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을 뒤따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불과 8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사임이 강요되었다. 당신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인가? 너무 멀리 나갔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태인들이 직접 만든 엄청나게 두꺼운 책, ‘서구 문명에 대한 헤브루의 영향[The Hebrew Impact on Western Civilization]’(1951년 총 922페이지)에 보면, 우리는 이 모든 내용들과 관련된 추가적인 사항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111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영국 정부에 대해 지브롤터 해협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건 쇼넨버그[Schonenberg]였는데, 이건 마치, 1655년 유태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가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메이카 섬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537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 “랍비 마나셰 벤 이스라엘[Rabbi Manasseh Ben Israel](1604-1657)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었던, 자신의 책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Esperanza de Israel]’을 통해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유태인들의 영국 재입국을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영국 정부로 하여금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대안도 없도록”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법안의 틀을 직접 짰던 인물이 사실상 랍비 마나셰였다. (같은 책 797페이지에 나와 있다.) 물론 엄청난 실수였다!

    리처드 크롬웰이 현직에 있는 동안 툴로는 그를 부친과 마찬가지로 후원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신속한 몰락 이후, “모든 영국인들은 왕이 권좌로 되돌아가는 왕정 복고를 환영했다.” 이에 따라, 1660년 5월 8일, 찰스 2세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3주 후 런던에 입성했다. 웹스터 인명사전[Webster’s Biographical Dictionary](1943년)에 따르면, 왕정 복고가 있던 무렵, 크롬웰의 정보 총 책임자였던 존 툴로는 왕의 차기 국무상에 대한 참모 역할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대역죄[charges of high treason]로부터 사면되었다.” [하톤: 나한테, “정보기관 소속 인물”이 아니더라도 정부를 이끌 수 있다고 반박하지 마십시오. 조지 부시는 CIA 국장을 지냈으며, 당신들의 친구 키신저는 KGB 요원이었습니다.] 이듬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외 영토를 확보하고, 임의로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으며, 관할권내 영국국민들에 대한 민사 재판권도 획득했다! [하톤: 미국인들이여, 나는 당신들의 권리를 모조리 빼앗아 갈 수도 있는 행정 명령들(‘공산당 선언의 실현’ 참조--역주)에 대해 당신들이 직접 연구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런 다음, FEMA(연방비상관리청,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일반적으로 ‘연방재난관리청’이라 칭하는 기구이나 비상사태 발생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됨--역주)와 ATF(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 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단속을 목적으로 적법 수준 이상의 인권침해가 허용되어 있는 정부기관--역주) 등도 검토해 보십시오.]

    그러는 동안, 프리메이슨들 움직이다.

    그 사이 프리메이슨들은 늘 그렇듯 막후에서 자신들만의 비열한 계략을 짜느라 분주했다. 1646년 10월 16일, 영국 골동품 수집가였던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은 워링턴[Warrington]에서 프리메이슨이 되었으며, 런던 메이슨 홀[Mason’s Hall]에서 열렸던 회합에도 참석했다. 내전 기간 왕당파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가터회(동맹)[Order of the Garter](가터는 영국의 최고위급 기사를 지칭--역주)의 개괄적인 역사를 다룬 책을 펴 내기도 했다. [하톤: 명칭 자체가 “동맹(오더)[Order]”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애쉬몰은 랍비 솔로몬 프랭크[Rabbi Solomon Frank]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고, 그를 통해 헤브루어를 배우기도 했다. 라루덴 신부[Abbe Larudan]는 당시 출판된 자신의 책, ‘프리메이슨들이 압도하다[Franc-macons Ecrasse]’에서 영국에서 유태인들이 메이슨 조직을 좌우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롬웰 덕택이라고 썼다. 그리고 1648년, 유태계 메이슨들 덕택에 크롬웰은 절대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되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에는 프랑스에서도 프롱드의 난[the Fronde](부르봉 왕조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항에 따른 내란--역주)이라 불리는 유혈이 낭자한 내란(1648-53)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예수회는 파리에서도 정부전복적 성격의 게리네(일루미나티)[Guerinets(Illuminati)]라는 조직체를 창설했으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은 조만간 폴란드가 맞이하게 될 심각한 문제를 조장하고 있었다. 멀린스[Mullins]의 책, ‘유태인들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 of the Jews]’(84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나와 있다. : A.D. 1655년 유태인들은 영국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가는 한편, 스웨덴 찰스 10세[Charles X]의 폴란드 침공을 비밀리에 돕기도 했다.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는데, 왜냐하면 폴란드계 유태인 지도자들이 사전에 스웨덴 국왕에 밀사를 보내, 폴란드의 방어 역량과 관련된 정보들을 그 구체적인 사항까지 다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찰스 10세의 폴란드 정복 이후, 유태인들은 점령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악질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했으며, 이에 저항한 스테판 차르니에키[Stephen Czarniecki]와 같은 폴란드 애국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찰스 10세와 점령자들을 자국 땅에서 쫓아냈다. 스웨덴인들이 물러가고 난 후, 폴란드인들은 이번엔 유태인들을 집중 공격했으며, 그들의 반역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3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 국민들이 노예화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의 실상에 관련된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마찬가지의 일이 미국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p.101-106

    [인용의 끝]


    피닉스 저널 제 137권 (미간행 저널),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 제 6, 7, 8, 12, 13장, pp.49-65, 96-106에서 발췌


    (피닉스 저널 제 137권은 미간행 저널로 원래 제목이 없으나, 하톤은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을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로 정해줄 것을 요청--phoen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