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저널, Phoenix Journals - 제137권, 유태인들의 계보 III, 3장
  • 제137권, 유태인들의 계보 III, 3장


    제 3장, 1995년 5월 4일 목요일, 3:31 P.M. 8년 261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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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자르족[the Khazars]의 등장

    634년경, 그 때 당시 바로 부유한 상인들이자 무역업자들로서, 일찍이 터키그리스 지방에 정착해 있던 유태인들은, 비잔틴 제국[Byzantium]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흑해를 가로질러 크림 반도[the Crimea]로 갔다. 우크라이나 지방에 위치한 크림 반도는 그때보다 1300년 이전에 이스라엘-키마리안족[the Israelite-Cimmarians]이 시티안족[the Scythians]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정착해 살았던 곳이었다. 오늘날의 남러시아 지방에서(그 곳에는 현대사의 중요 도시인 얄타[Yalta]도 위치해 있다.), 이들 유태인들은 번성해 나가는 이주지를 건설했다. 유태인들이 이곳으로 옮겨간 데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헤라클리우스[Heraclius]의 강요된 개종과 세례 요구를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불과 몇 년 전,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도 했었다. 크림 반도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이내, 야벳[Japheth]과 그의 손자 토가르마[Togarmah]의 후손들이었던, 사납고 호전적이었던 하자르족[Khazars]과 접촉했고, 이들과 교혼했다. 초원 지대[steppes]를 누비던 터키계 부족이었던 하자르족은 당시 광대한 영역에 걸쳐, 30여개의 다른 부족과 국가들을 지배하고, 이들로부터 무거운 공물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유태인들과 같은 부류의 이단자들[heretics(ketzers)]이나 추방자들[outcasts]은 하자르 왕국[Khazaria]에서는 명백히 환영 받았다. 하자르 왕국의 수도는 크림반도 동쪽 볼가강[the Volga River] 어귀이자, 카스피해[the Caspian Sea] 북서쪽에 위치한 이틸[Itil]이었으며, 이 곳은 오래 전부터 노예 무역이 번성하던 곳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 이 도시의 이름은 삭신[Saksin]이었는데, 삭신은 수 세기 전 아시리아의 포로로 있다 탈출한 부족들 가운데 한 부류였던 이스라엘-사카센족[the Israelite-Sacasene](오늘날 색슨족[Saxons]으로 알려져 있다.)이 명명한 것이었다. 이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하자르족은 강을 통과해 그들이 어렵게 쟁취한 영토로 들어가는 모든 선박에 대해 정확히 10%의 세금을 걷었다.


    중세 러시아-조지아 연대기[Russian-Georgian chronicle]에서는, 하자르족을 “곡[Gog]과 마곡[Magog]의 무리... 소름끼치는 얼굴과 야수같은 습성을 가졌으며 피를 즐기는 야만인들”이라고 묘사했다. 이것은 꽤나 묘사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자르족의 한 그룹은 카라-하자르[Kara-Khazars]라 불렸는데, 이들은 길고 검으며 헝클어진 머리에, 짙은 검정에 가까운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종족으로, 주로 그들의 근친 종족이었던 훈족[the Huns](토가르마[Togarmah]의 또 다른 후손에 해당하는 종족)과 결혼했다. 훈족은 밝은 안색에 파란 눈, 그리고 흐르듯이 드리워진 붉은 머리를 가진 종족이었다. 양 종족을 아울렀던 하자르의 왕은 카간 대왕[the Great Kagan](여왕은 카토운[the Katoun]이라고 불렀다.)으로 불렸으며, 기운이 넘치고 야만적인 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무리(그 때 당시 그 수는 약 50만 명 정도였다.)를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자[powerful, no-nonsense ruler]였다. 카간의 통치 기간은 정확히 40년(한 세대)으로, 변경할 수 없는 규칙처럼 정해져 있었다. 우연히 그 보다 더 오래 살거나, 또는 그 시기를 넘어 통치하려고 하는 자가 나타나면, 하자르 관습에 따라 자신의 휘하에 있던 최고 직위의 장군이 처형했다. 이 특이한 관습은 ‘레지사이드(국왕 살해)[regicide]’라고 불렸다. 하자르족의 이교도적인 종교는 샤머니즘의 야만적인 형태에 가까웠는데, 무수히 많은 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자르족은 제례 의식 때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주로 말이 선호되었다.)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바쳤는데, 대개 포로로 잡아 온 자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가장 똑똑한 자를 바쳤다.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하자르족이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A.D. 198년으로, 바르실리언족[the Barsileens](토가르마 계열의 근친 종족)과 연대하여, 아르메니아 지방에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나타났었다. A.D. 550년이 되었을 때, 그들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39년 뒤에는 비잔틴 제국과 함께 페르시아를 막기 위한 방어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 다음 세기에도 동맹관계는 유지 되었고, 627년 하자르족은 동 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또다시, 성가신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A.D. 685년 유스티니안 2세[Justinian II]는 16세의 나이에 비잔틴에서 동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으나, 곧 그는 유스티니안 1세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살인광에다 전제적 폭군임이 드러났다. 10년 뒤, 그가 도입했던 대단히 엄격했던 카톨릭 규정이, 국민들이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그는 곧 레온티우스[Leontius]에 의해 폐위되었다. 레온티우스는 즉시 유스티니안의 코를 절단했고(어쩌면 혀의 일부도 포함하여), 그 후 그에게 리노트메투스[Rhinotmetus]라는 징벌적 성격의 가혹한 별명을 붙인 다음, 크리-타르타리[Cri-Tartary](크림 반도)에 있는 체르소나에[Chersonae]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유스티니안은 이 곳에서 탈출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하자리아[Khazaria]의 수도 이틸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카간[Kagan]인 부시르 왕[King Busir]과 함께 막강한 부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들어가 비잔틴 제국을 탈환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카간은 이 거래에 대한 증표의 일환으로, 자신의 딸(테오도라[Theodora])을 유스티니안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내 부시르 왕은 이중 속임수를 써서 그를 죽이려고 했고, 이를 피해 유스티니안은 자신의 하자르 출신의 신부와 함께 불가르족[the Bulgars](토가르마의 또다른 후손들)의 땅으로 다시 달아났다. 불가르의 왕인 테르볼리스[Terbolis]는 이 때, 유스티니안의 비잔틴 회복을 돕기 위해, 만 5천 명의 중무장한 기마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결국 성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에, 유스티니안은 테르볼리스와 그의 전사들에게, 지원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금을 하사했다. 유스티니안 2세의 제 2 통치기는 A.D. 705년에서 71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 2 치세기 동안 그는 자신의 첫번째 통치 시기보다 훨씬 더 전제적이었고, 끔찍할만큼 잔인했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도 결코 천사가 아니었다. 결국 유스티니안 2세와 하자르의 피가 섞인 자신의 아들은 암살되었으며,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필리피쿠스[Philippicus]는 해방자로 환영받으며, 비잔틴의 황제가 되었다.--그렇지만 그 역시 불과 2년 뒤에 다시 폐위되었으며, 자신에 이어 황제 자리를 차지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에 의해 장님이 되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유태계 시오니스트 작가인 아서 쾨스틀러[Arthur Koestler]는 1976년에 출판한 자신의 유명한 책, ‘제 13번째 부족[The Thirteenth Tribe]’(‘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에서 이 이상한 사건들의 연속에 대해 놀랄 만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732년, 하자르가 아랍인들에 대해 거둔 승리의 소문이 도처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미래의 (비잔틴 카톨릭) 황제가 될 콘스탄틴 5세[Constantine V]는 하자르의 공주(세례명 에이렌[Eirene])와 결혼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아들이 레오 4세 황제[Emperor Leo IV]가 되었을 때, 그는 ‘하자르인 레오[Leo the Khazar]’로 불리기도 했다. 몇 년 뒤, 어쩌면 A.D. 740년에, 하자르 왕(불란[Bulan])과 자신이 거느리던 사법, 군사 부문의 집권층은 갑자기 유태인들의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유대교(유대주의)[Judaism]는 이내 하자르의 국교[state religion]가 되었다...” 야만적이고 거친 하자르 왕국의 이 이상한 집단-개종[mass-conversion] 사건은,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단지 “교활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성가신 종족은 당시 온 사방에 그들에게 적대적인 종족들로 둘러 싸여 있었던 데다, 몇몇 수적으로 우세했던 적들은, 비잔틴 기독교, 로마 카톨릭, 모슬렘, 또는 페르시아 신앙 가운데 한가지로 개종하기를 이들에게 강요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자르인들이 “유태인들”이 되었는가?

    그렇지만, 상당히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하자르사[History of the Khazars]’의 저자인 소련 공산주의 고고학자, M.I. 아르타모노프[M.I. Artamonov]의 가설에 따르자면, 하자르인들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례가 없이, 그들의 새로운 종교로서 유대교[Judaism]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실제로는 주의깊게 고안된 유태인들의 쿠데타의 결과[carefully-planned Jewish coup d’etat]였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하자르의 왕에 해당하는 카간[Kagan]은 단순히 무리의 수장 정도로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권력은 벡[Bek]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동 통치자[new co-ruler]의 손에 넘어 갔다는 것이다!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명백한 친-하자르계 저자였던 쾨스틀러는 “군대 통솔권을 포함한 모든 국사(國事)는 벡[Bek](때로는 카간 벡[Kagan Bek]으로도 불렸다)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벡이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고대 하자르의 정부 시스템은, 카간이 신성을 대표하고, 벡이 세속 권력을 휘두르는, “양두 체제[double kingship]”로 변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직후에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하자르인들로 하여금 유태인들의 언어뿐만 아니라 22개의 문자로 된 헤브루 알파벳[Hebrew alphabet]을 채택하게 한 데 이어, 심지어 할례[circumcision]까지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아르타모노프는 하자르인들을 “유태계 색채를 가진 기생충과도 같은 종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권력 승계는 그랜드 산헤드린[the Grand Sanhedrin](유태인들의 집회--역주), 그랜드 사트랍[the Grand Satraps](사트랍은 국가내 지역 통치자의 명칭--역주) 그리고 그랜드 케힐라[Grand Kehilla](유태 공동사회 대표자 명부[Communal Register])에 등록된 랍비들, 이에 더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대단히 우회적이면서도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탄주의 블랙 오컬트 음모단[Cabal of Satanic Black Occultists]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음침한 인물이자, 도처에 있던 모든 세파르딕[Sephardic] 유태인들과 에도미트[Edomite]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권력자로 간주되었던 ‘나시(왕자)[the NASI(Prince)]’--유태인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한 결정권자--에 의해 통제되었다. 나시는 그 옛날 유태인들이 바빌론의 포로민들로 살던 시절 이래로, 그들이 유지해 온 300인 위원회[Council of 300], 그리고 300인 위원회의 모든 의사결정을 통제했던 보다 작은 규모의 33인 위원회[Council of 33], 그리고 33인 위원회에 지시를 내렸던 실질적인 내부 그룹인 13인 위원회[Council of 13]를 관장하는 인물이었다.[하톤: 으으으으으음...!] 나시[the NASI]와 통치권을 공유했던 자로는 아브 베트 딘[Ab Beth Din]이 있었는데, 아브 베트 딘은 모든 바리새주의[Pharisaism]를 대표하는 종교적 수장이었다.(그리스도 시절, 이러한 통치권을 가졌던 양대 우두머리는 ‘주고트[zugot]’라고 불렸으며, 당시 피에 굶주렸던 두 명의 유태인, 샤마이[Shammai]와 힐렐[Hillel]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미스터리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의 오컬트적 수완가들은, 당시로서 보자면 ‘불길한 방향[Left-hand Path]’으로 나아가던 자들로서, 사실상 조하르[Zohar](카발라의 사상을 담은 책자--역주)의 비열한 마법, 그리고 유대 카발라[Kaballah](전통[the Tradition])(유대 신비교의--역주)(카발라[Kaballah](카발라[Cabala]로도 불린다.)는 아론 벤 사무엘[Aaron ben Samuel]이라는 유태인에 의해 850년 바빌로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전수되었다.), 그리고 역겨우면서도 변태적인 내용의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연구[the Study]), 또는 이들에 의해 헤브루어로 쓰여진 책자로 비밀스런 내용을 담은 아본 길라이온[Aavon Gilaion](죄[Sin]에 관해 기술한 책--역주)에 빠져있던 자들이었다.

    이 동방의 유태계 지도자들은 그들의 본부를, 그때 당시, 바그다드에 있던 탈무드 아카데미[the Talmudic Academy]에 두었으며, 훨씬 나중에 탈무드 아카데미는 콘스탄티노플로 이전되었다. 이 정부전복적 성향의 아카데미의 수장이 아브 베트 딘[Ab Beth Din](또는 가온[Gaon]이라고도 불린다.--“각하[excellency]”의 의미)으로, 아브 베트 딘은 중동과 근동 지방에 흩어져 살던 모든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 한편, 나시[the NASI] 또한 대단히 존경받는 에그자일아치[Exilarch](망명자들의 수장), 또는 “속박자들의 왕자[Prince of Captivity]”로, 유태인들의 자율적 공동체들 전체를 아우르는 세속적 권력을 대표했다.

    유대교로의 도매급 개종 이후, 약탈의 전사들이었던 하자르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과 교혼해 온 데다 마찬가지로 사나운 인척 집단이었던 아르메니아의 아슈케나지족[the Ashkenazim](고메르의 첫째 아들이자, 토가르마의 형제였던 아슈케나즈의 후손들)(하자르족과 아슈케나지족은 때때로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과 더불어, 모두 그 때 이후로는 그들의 적들로부터 “크림 반도의 붉은 유태인들[Red Jews of the Crimea]”로 불렸다. 이렇게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주변의 영토를 황폐화시키며 약탈하고 다닐 때, 항상 거대한 붉은 전투 깃발을 들고 다녔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일찍이 에도미트-몽골계 터키인들[the Edomite-Mongol Turks]과 교혼해 오기도 한 터였다.--그리고 에돔[EDOM]은 물론 붉은 색[RED]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무렵, 갑자기 크림반도(“작은 하자리아[Little Khazaria]”)에는 색다른 근본주의 유태 교파였던 카라이트파[the Karaites] 유태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카라이트파는 아난 벤 다비드[Anan ben David]에 의해 A.D. 765년 페르시아에서 창설된 소규모 종파였다. 그 때 이후로 유태인들 사이에는 이들의 교리가 널리 전파되기도 했다.(1897년, 러시아 차르 제국[Russian Tsarist Empire]에는 12,894명의 카라이트파 유태인들이 살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곧이어, A.D. 775년, 하자르 군주의 손자였던 레오 4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권을 물려받았다.--하자르인 레오 황제[the Emperor Leo the Khazar]로서. 그리고 이어지는 5년간 카톨릭의 비잔틴 제국을 철권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는 눈에 띄는 하자르의 공주이자 “꽃”이었으며, 그녀의 결혼은 대 하자르 왕국[the great Khazar]이 거대한 무슬림의 적들에 맞서, 결정적인 아르다빌 전투[battle of Ardabil]에서 승리를 거든 직후에 있었다. 이 무렵 베트스팔리아의 수도승[the Westphalian Monk]으로, ‘아키타니아(로마 제국의 지방 명칭--역주)의 기독교인 드루스마르[Christian Druthmar of Aquitania]’라고도 불렸던 자는 자신이 라틴어로 쓴 논문, ‘엑스포지토 인 에반겔리움 마테이[Exposito in Evangelium Mattei]’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늘 아래 단 한 명의 기독교인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이름은 곡[Gog]과 마곡[Magog]이며, 이들이 바로 훈족이다[who are Huns] : 그들 가운데는 가자리(하자르)[the Gazari(Khazars)]라 불리는 종족도 있는데, 이들은 할례를 하고, 유대주의[Judaism]를 철저히 준수한다.”

    그런데, A.D. 833년, 혹은 이 무렵, 하자르의 카간[Kagan]과 벡[Bek]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카톨릭의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흑해[the Black Sea]와 아조프해[the Sea of Azov]를 가로질러 돈 강[the Don] 어귀로 군대를 보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하자르 동맹을 도와, 양국간의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사르켈[Sarkel]에 거대하고 튼튼한 요새(백색의 성[the White Castle])를 지었다. 이는 “만만찮고도 위협적인 세계 무대의 신참자들로, 서쪽 지방에서는 바이킹[Vikings] 또는 노르스맨[Norsemen]이라 불렸고, 동쪽 지방에서는 로우스[Rhous] 또는 로스[Rhos] 또는 루스[Rus]라 불렸던 종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고, 쾨스틀러는 전한다. 이들 스웨덴 출신의 동부 바이킹족은 실제로, 하자리아의 가짜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던 진짜 세파르딕 유태인들, 그리고 이에 더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가짜 기독교인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 “그들의 서쪽 분파(노르웨이족[Norwegians]과 데인(덴마크)족[Danes]으로 구성)는 이미 유럽의 모든 주요 수로를 관통한 데다, 아일랜드의 절반도 점령한 상태였다. 이어지는 수십년에 걸쳐, 그들은 아이슬란드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노르망디를 점령했으며, 파리를 약탈하고, 독일, 론 강 삼각주 지대[the Rhone Delta], 제노아 만[the Gulf of Genoa]을 공격한 데 이어, 이베리아 반도[the Iberian Peninsula]를 돌아, 지중해와 다르다넬스 해협[the Dardanelles]을 거쳐 콘스탄티노플까지 공격했다”고, 아서 쾨스틀러는 명백한 두려움 속에 기술하고 있다.
    p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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